LA 적십자사 ‘점거’ 사건을 아십니까?
LA 적십자사 ‘점거’ 사건을 아십니까?
  • 양재영
  • 승인 2015.05.1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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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5.18 운동 산 증인 양현승 목사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지 벌써 34년,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행사 불참 소식, 작년에 이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불허 방침 등은 80년 5월 광주가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여전히 불편한 기억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LA에서는 양현승 목사를 비롯한 400여명의 교민들이 LA 적십자사를 점거하고 약 72시간 동안 ‘헌혈된 피를 광주로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전두환 정권과 대치하는 이민 역사의 기념비적 사건이 벌어진다.

‘LA 적십자 혈액원 점거’와 ‘집단 헌혈’로 이어진 이 사건은 LA에서 헌혈된 피를 한국정부가 접수하도록 요구함으로 계엄군에게 ‘광주에서의 유혈사태’를 인정하도록 압박했고,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LA 교민들 뿐 아니라 전 미국인에게 깊은 인상과 충격을 주었다.

당시 적십자사 혈액원 점거를 주도했던 양현승 목사(샬롬 커뮤니티 센터)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당시 장태한 교수, 양필승 교수, 길민택씨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 세력과 함께 ‘LA 적십자사 점거’를 주도했던 양 목사는 얼마 전 워싱턴 DC 근교로 이사해 메릴랜드 주에서 열릴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50개주 참여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 양현승 목사가 메릴랜드 주에서 세월호 참사 강연을 하고 있다. ⓒ <뉴스 M>

 5.18 민주화 운동과 세월호 참사

-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세월호 관련 규탄집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신적으로 이번 인터뷰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저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얼마 전 메릴랜드에서 강의를 할 때 무릎을 꿇고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흐느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1980년과 2014년이 연결되고 누적되어 만들어진 역사적 비극입니다. 5.18 희생자들보다 그 아이들이 더 불쌍합니다. 믿고 기다린 아이들이 눈에 밟혀 가슴이 아픕니다.

-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재해현장에서 적십자사 봉사자로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2005년 8월 23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몰아쳤을 때 미국 적십자사 봉사자(National Diversity Council 위원)로 구제 현장에 가고 있었는데 허리케인 리타가 몰아쳐 곤경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3개월에 걸친 3개 주 7개 도시에서의 봉사 경험으로 보았을 때 이번 세월호 사건은 1시간 안에 모든 아이들을 구조할 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천재(天災)였지만 세월호는 명백한 인재(人災)요 관재(官災) 였습니다.

‘헌혈압박’(Blood Push)과 연대투쟁

-‘LA 적십자사 점거’ 사건으로 돌아가서 당시 상황을 설명 부탁합니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의 항쟁 소식이 들리자 LA 한인 사회는 크게 술렁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교회에서 보이스카웃 프로그램을 돕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보이스카웃 복장 그대로 입고 뛰어갔죠. 3살 난 딸아이가 떠올라 ‘두렵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5월 24일 아드모어 공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준비했는데, 좀 더 충격적이고 강력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여론과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찾으려 했는데, 그때 내놓은 방법이 집단 헌혈을 이용한 이른바 '헌혈압박'(Blood Push)를 통해 미국 정부를 움직이자는 방법이었지요. 

   
▲ 미국적십자사 전국본부(DC National H.Q)로 보낸 공문.ⓒ <뉴스 M>

- 왜 ‘헌혈압박’이라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죠?
LA 동포 교민들의 피를 광주로 보냄으로 계엄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단, 광주에서의 집단 학살이 사실이라는 걸 한국 정부 스스로가 인정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또한 LA 적십자를 통해 모아진 피를 한국에 보내줄 것을 요구함으로 미국 적십자와 미국 정부의 개입을 끌어내어 미국정부가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광주 시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십자사 정도는 점거해야 효과가 극단화된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 당시 점거농성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습니까?
저는 당시 미국 적십자사 남가주 혈액원 대표인 노먼 키어씨와 친분이 있었고, 혈액위원회 위원이었습니다. 또한 궐기대회 후 장태한(당시 대학생, 현재 UC Riverside 교수) 씨가 대변인 역을 맡았고, 저의 동생인 양필승(전 건국대 교수)씨도 저와 함께 단식 농성을 주도했습니다. 김상일(이후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후 미국 거주중), 국영길(변호사), 김운하(미주 한인 사회 초기의 신문이었던 신한민보 발행인) 씨 등도 끝까지 함께한 소중한 동지였습니다.

초기에는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이후 중장년과 청년학생들이 매우 조직적인 형태로 움직였습니다. 김상돈(4.19 후 첫 민선 서울시장)씨와 윤선식 목사 등이 헌혈에 참여했고, 이후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당시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던 통일운동 진영도 모두 참여했고, 출신 지역을 초월해 경상도, 전라도, 이북 사람 할 것 없이 참여한 LA 최대의 한인 연대투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선 ‘일제 강점기 이후 처음으로 미주한인들이 모국의 정치 상황에 침묵을 깨고 거리에 나선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현지 언론의 관심이 대단했다고 하던데요.
점거농성을 시작하면서 제가 단식을 선언 했는데, 당시 미국 언론에서 현장 보도를 하고, 대규모 기자회견이 열리는 등 대단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한 기자회견을 열어 헌혈을 광주로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여론 몰이를 했죠.

하지만 저희는 언론 동원에만 머물지 않고, 카터 대통령을 위시한 미 상원 의원 등 정치가들에게 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서울의 재야인사들과 직접 통화하여 미국 LA에서 연대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걸 알렸죠.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도 통화해 서울 상황을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해산과 무기력한 아픔

- 헌혈을 한국에 보낼 수 없었고, 72시간 후 농성을 해산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UPI와 AP 통신은 광주에 피와 음식이 부족하다고 보도했고, 저희들은 한국 적십자사 총재 이호 씨에게 미국적십자사를 통해서 정식으로 텔렉스를 보냈지만, ‘현재 상황에서 피 공급은 광주지역의 수요량에 비해 적절하다’는 거절의사를 보내왔습니다.

또한 계엄군이 광주 도청을 함락하고 헌혈된 피가 한국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위대가 술렁거렸습니다.

당시 저는 무기한 단식을 하는 등 지속적이고 보다 강도 높은 투쟁을 하여 광주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강경론을 펼쳤습니다. “광주의 시민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농성을 푼다는 것은 훗날 산자로서 죽은 자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라도 해야 한다. 태평양을 가로 넘어서 같은 민족이 똘똘 뭉쳐 서로의 생명과 삶을 지켜주는 것은 민족으로서 의무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농성은 일단 끝내고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계속하자는 현실론이 채택되어 결국 해산했습니다.

   
▲ ‘LA적십자사 점거’ 당시 해산을 알리는 미주 한인 언론 보도 기사. ⓒ <뉴스 M>

 - 벌써 30여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3살 난 딸아이를 아버지, 어머니께 맡겨 놓고 무기한 단식 투쟁에 들어가면서 저는 이미 그때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늘 그 때를 생각하면서 저는 이미 죽은 자이니 하나님께 매일 죽은 자로서의 자세로 살자고 다짐합니다.

제가 이곳 워싱턴 DC로 옮겨오지 전까지 캘리포니아에 있던 저희 집 뜰에는 무등산의 갈대를 심어 놓고 있었습니다. 늘 그때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싶었죠. 하지만 이번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면서, 5.18 당시엔 LA에 있으면서도 광주 시민과 함께 시위하며 그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긍지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죽어가는 저 아이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 2011년 미 적십자사 50년 봉사상 수상 기사.ⓒ <뉴스 M>


양현승 목사는 이후 1987년 미국연합감리교회(UMC)에서 안수를 받은 후 사회봉사 활동, 인권 운동을 통해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지난 2002년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상’과, 2011년 ‘50년 봉사상’ 및 2012년에 UMC ‘Spirit of Shalom Award’를 수상했다.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4.29 LA 폭동,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이 관여했으며, 오늘도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의 샬롬(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봉사하고 있다.

역사적 의미와 성공

5.18 당시 광주 시민을 위해 싸웠던 LA 한인 동포들의 헌신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LA 항쟁에 참여한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 역사 중에 LA 한인들의 운동도 큰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004년도에5.18 기념재단이 인턴으로 민족학교에 파견했던 최주식 씨는 ‘해외동포에게 진 빚 갚아야’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다.

‘LA 적십자사 점거 사건’은 민족 비극을 앞두고 남녀노소, 계층과 지역, 공간을 초월한 연대가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 상황과는 달리 태평양 너머 LA에서 목숨을 걸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미국 이민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계승한 한인 동포들이 LA를 비롯한 50개 주에서 이번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고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양 목사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함께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렇게 당부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이제 중요한 건 ‘이 사건을 얼마나 우리의 가슴에 품고 오래 동안 조직적으로 지켜 가느냐’ 입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양재영 기자 / <미주뉴스앤조이>, 광주 민주화 운동 35주년을 맞아 2014년 기사를 다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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