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청빙받은 목사는 누구였을까?
처음으로 청빙받은 목사는 누구였을까?
  • 최주훈
  • 승인 2015.05.22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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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보면 청빙의 모범이 보인다

요즘 목사 청빙 공고를 자주 본다. ‘청빙’, 청하여 들인다는 뜻이지만 실상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채용’, 내지는 선발하겠다는 이야기다. 좀 심한 말 같지만 마치 궁중에서 여인네 ‘간택’하는 듯한 모양새라서 그리 달갑지는 않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검증 받은 목사와 함께 바른 교회를 일구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 할만하다. 그래서 여러 신청서류와 설교 등을 다각도로 검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신청서류와 멋진 설교 뒤에 숨겨진 문제들은 어찌할 것인가?

청빙과정에 대한 구조적 보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 답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개신교 최초 청빙목사' 이야기 하나 풀어보자

종교개혁의 메카로 불리는 독일 비텐베르크에 가면 시립교회 뒤편 공원에 세 사람의 동상이 나란히 있다. 루터, 멜란히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의 동상이다. 보통 이 셋을 종교개혁의 트로이카라고 부르는데, 루터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의 동역자가 있었기에 종교개혁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뜻이다.

루터는 지도자, 멜란히톤은 학자, 부겐하겐은 행동대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루터는 설교로 깨우치고, 멜란히톤은 학문적으로 다듬고, 부겐하겐은 교회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일군 실천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겐하겐이 개신교 최초의 목사가 되는 과정을 보면 개신교 목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인지 알게 된다.

부겐하겐은 소위 ‘청빙에 의한 최초의 개신교 목사’다.(1523년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 목사 서임)

교단마다 다르겠지만 목사가 되려면 거의 10여년의 수련과정을 거쳐야 된다. 내가 몸담고 있는 루터교회만 하더라도 정상적인 코스를 밟는다고 가정할 때, 신학교 4년, 대학원 3년, 전임전도사 준목실습 3년, 그 후로 총회의 인준과정이 지난 후에야 될 수 있다. 아무리 초고속이라고 해도 빠르면 약 10년 이상 걸린다.

그런데 16세기에는 자기가 사제가 되겠다고 서원하면 기초교육 약 3-6개월, 심지어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안수 받아 사제가 되기도 했다. 사제로 서품 받은 후에야 신학교육을 받았다.(이것은 순전히 당시 상황이다.) 루터도 그렇게 했고, 부겐하겐 역시 이렇게 목사가 되기 수년전인 1509년에 수도원에서 이미 안수 받았다.

내가 앞서 강조 했다시피 부겐하겐을 ‘개신교 최초의 청빙목사’라고 했는데, 이것은 가톨릭교회와는 다른 방법과 절차를 거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교나 수도원장이 안수하면 절차와 상관없이 사제가 된다.(이 원칙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즉석 안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다)

부겐하겐이 목사가 되는 과정을 보면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사제의 서임이 주교권에 포커스가 맞춰진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개신교 목사는 교회, 대학교, 시의회라고 하는 삼자구도의 청빙위원회를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어느 교회든지 목사를 세울 때는 '청빙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한다.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청빙위원회가 여러모로 알아보고, 기도하면서 가장 적임자를 찾아 목사로 세운다.

최초의 개신교 청빙 목사인 부겐하겐의 경우가 특별한 이유는 '교회 내부인사로만' 청빙위원회가 꾸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 대표, 대학교 대표, 여기에 시의회 대표까지 꾸려진 청빙위원회를 통과해야 했던 것이 최초의 루터교회 목사 서임이다. 지금도 역시 루터교회 목사가 되려면 준목고시(타교단으로 말하면 강도사 고시나 목사고시)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때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동의 절차가 없다면 절대로 고시에 응시 할 수 없다. 이는 곧 대학교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오늘날 아쉽게 자취를 감춘 전통이 있는데, 그것은 “시의회의 추천”이라는 측면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일반 시민에게서 지도자로 추천 받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일반 사회에서도 공적 직무를 유감없이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일 것이다.

‘루터교회 목사는 교회, 대학, 시의회, 이 세 곳의 청빙을 통과해야만 자격이 주어진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해보자. 이는 곧 “신앙, 지성, 사회적 인격”이 통합적으로 인정될 때만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신앙, 지성, 사회적 인격. 이 셋 중 한 곳이라도 결격사유가 있다면 루터교회 목사가 될 수 없다.

부겐하겐의 청빙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루터교회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개신교 목사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보여주는 것이고, 개신교 목사의 청빙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다시 말해 목사가 된다는 것은 교회 밖 어디를 가든 인정받은 사람, 그리고 인정받을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또한 개신교 목사는 자긍심을 가질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직임이지만 그 책임도 만만치 않다. 일반인이라면 쉽게 넘어갈 허물이라도 성직자들이 어물쩡 넘어가기라도 하면 세상은 용납하지 않는다. ‘신앙, 지성, 인격’의 표준이 되어야 될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소망이 목사에게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인보다 운신의 폭이 상당히 좁다. 매사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성직자치고 그렇게 운신의 폭이 좁다고, 또는 ‘왜 나에게 이렇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냐?’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말하는 목사가 있다면 가짜 목사다. 이런 의미에서 가짜 목사는 요즘 시대에 참 많다.

목사는 ‘소명’이다. 만일 이 소명 의식, 즉 자긍심과 영적-사회적 책임의식, 윤리의식이 없는 목사라면, 목사의 직임을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라 언제라도 멍에를 벗어던져버릴 수 있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목사를 좁은 길, 불편한 소명 한 가운데 부르셨다. 그런데 이 소명이 비단 목사에게만 요구되는 것일까?

개신교 신학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만인제사장론’이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모두 부름 받은 제사장이다. 그렇다면, 목사 뿐만아니라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매순간 일상 한 가운데서 ‘신앙, 지성, 인격’이라는 시험대 위에 자신을 끊임없이 올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최주훈 목사 / 서울 중앙 루터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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