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쓴 목사님들
왕관을 쓴 목사님들
  • 신성남
  • 승인 2015.05.27 07: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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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을 잃으면, 야심이 삼킨다
   
▲ 신성남 ⓒ <뉴스 M>

한 주간 내내 기다리던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새로운 얼굴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있던 얼굴들마저 더러 안 보입니다. 다시 마음이 아픕니다. 아무리 세지 않으려 해도 한눈에 저절로 숫자가 나옵니다. 어린 아이를 포함해도 출석 교인이 불과 30명도 되지 않으니까요. 

교역자 생활비를 포기한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교회 임대료를 내기도 숨차니까요. 그래서 밤이면 대리운전을 합니다. 당연히 생활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남들처럼 좋은 남편에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비록 자신은 목사이기에 각오한 좁은 길이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왜 작은 교회는 이리도 힘들까요. 교회가 작으면 새신자도 기피합니다. 큰 교회들은 자리가 모자라서 건물을 증축한다고 법석이지만, 작은 교회는 사람이 너무 없어 그 좁은 예배당조차 오히려 넓어 보입니다. 눈물조차 마르게 하는 세월이 5년을 지나 10년도 넘어가지만, 늘어나는 주름살 외에는 상황이 변한 게 별로 없습니다.

도리어 요즘은 교회도 문 닫는 시대가 되었다고 난리입니다. 벌써 목회를 떠난 선후배 목회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가난한 목사는 아내와 함께 손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저희는 주님뿐입니다!"       

같은 시간 이웃 대형 교회의 궁전같이 웅장한 건물 속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경건하고 우아한 복장들이 단정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목마른 사슴이 물가를 찾은 듯 모두 설레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드디어 설교 시간입니다. 긴 옷을 입은 설교자가 등장합니다. 하도 거룩한 복장에 이게 예배인지 가톨릭 미사인지 일순 착각하게 합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개신교 목사가 저처럼 중세 사제 흉내를 내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하라는 구제는 제대로 안 하면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시키지도 않은 '종교적 무게잡기'는 참으로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옷으로 겉치장을 하는 것은 그나마 약과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 속에 있지도 않은 권위를 칠하기 위해 온갖 위선을 동원합니다. 입만 열면 사랑, 복, 출세, 그리고 성공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늘 "더욱 열심히 모이고, 더욱 잘 바치라!"입니다. 그리고는 당연히 고액의 연봉과 판공비를 아주 알뜰하게 받아 갑니다. 

아무튼 많은 목회자들이 기독교를 '주일 종교'로 변질시킨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일상 속의 세상은 죄가 많은 장소이고 주일과 교회만이 신성한 것처럼 이원론적 사고를 은근히 교인들에게 주입시킵니다. 그래야 종교 장사가 더 흥행할 수 있으니까요. 그 덕분에 평일에는 그 존재감이 별로 없이 지내다가 일요일에만 반짝 빛이 납니다. 주일에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철학자 볼테르는 "기독교를 죽이고 싶으면 주일을 폐지시키면 된다!"고까지 잘라 말했을까요.

차라리 한국교회도 유럽의 어느 교회처럼 국가에서 통합 관리라도 해야 하나요. 덴마크의 교회는 정부가 직접 관리한다고 합니다. 목사들은 나라에서 주는 급여를 받습니다. 덴마크 전체 국민 중 약 80%가 자발적으로 자기 소득의 '백분의 일'도 못 되는 0.4% 정도를 '종교세'로 내는데, 정부가 그것으로 교회 크기에 관계 없이 전체 목회자들에게 공정하게 나누어 줍니다. 따라서 공동체들 사이에 불필요한 크기 경쟁을 안 해도 좋은 것이지요. 한국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세례 문답을 받을 당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십계명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목사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찬송가 뒤에 있는데요"라고 답을 하더랍니다. 그냥 웃어 넘겨도 될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세례의 본질보다는 교회 성장을 위한 '새교인 늘리기' 실적이 우선시 되고 있는 경우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지금 필자는 단순히 교회 양극화나 율법주의나 외형주의를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회는 초심을 잃었습니다. 초심을 잃으니 야심이 싹트는 것입니다. 또한 야심이 생기면 욕심이 커집니다. 그리고 그런 욕심이 결국은 다양한 형태의 '교회 사유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무려 12년째 내부 분쟁중인 서울의 광성교회를 보는 성도들의 마음은 정말 참담합니다. 소위 직분자란 사람들이 대형 교회 소유의 막대한 재산과 주도권을 놓고 아주 끈기있게 싸우고 있습니다. 이젠 지칠만도 하건만 충성스런 십자군답게 타협도 없고, 양보도 없고, 그리고 항복도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서로 가시관을 차지하겠다는 선한 싸움일까요.  

정작 만왕의 왕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분의 종이라는 어떤 목사들은 가시관 대신에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과거 중세 교황이 그런 모습이었지요. 머리에 큰 관을 쓰고 금과 보석으로 온 몸을 장식했습니다. 그런 후에 입법, 사법, 그리고 행정 등 교회의 삼권을 모두 한손에 장악하고 왕 행세를 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가 오늘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이 방자해지면 '바른 목회'와 '바른 성장' 대신에 '빠른 목회'와 '빠른 성장'을 추구하게 됩니다. 내용보다는 실적을 중시하고,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성공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언제나 자기 구원과 축복과 감사와 평안과 성취를 노래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사회정의와 회개와 성찰과 희생과 회복과 섬김에는 그다지 열매가 없습니다.

사실 세상에 날 때부터 '도둑'이란 없습니다. 처음엔 사소한 바늘 하나를 탐하던 자가 나중에는 소 도둑으로 성장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목회를 통하여 부자가 되려고 한 목사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초심을 잃으니 그만 야심에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종이란 자가 '종교 권력'을 탐하여 왕관을 쓰고 에쿠스를 몰며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그저 '신성 모독'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왕관을 쓰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기 위해 그리로 가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으로 향하는 진리의 길은 결코 가시관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며 검소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바른 삶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섬기기 위해 가난한 종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왕처럼 부유하게 살고 싶은 분들은 제발 목사를 하지 마시고 차라리 장사를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결코 다스리는 '왕의 직분'이 아니라, 오직 섬기는 '종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샬롬!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계13:1)."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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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2장 2015-05-27 11:49:08
이 시대가 사이비들이 설치는 시대라는데 한국의 어느 설교방송을 들어 봐도 사이비는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 모두가 다 십자가 부활 예수 얘기를 하니까요. 그런데 정말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 마음에 그런 설교가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마음에 가까이 오지 않겠습니까? 설교에서는 복음을 말하지만 설교하는 그들의 실제 삶과 복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실제 이 시대의 부자 목사님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이득을 위해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은 성령이 역사하는 은혜의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