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해석은 '개연성' 강조, 동성애에는 '개연성' 무시?
성서 해석은 '개연성' 강조, 동성애에는 '개연성' 무시?
  • 홍신해만
  • 승인 2015.06.1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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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스' 해석, 본질은 용례보다 실존

작년에 기고한 글이 새삼 회자되니 묘한 기분이다. 작년 오바마 대통령은 6월을 '성 소수자의 달'로 공식 선포했는데, 퀴어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분주함과 더불어 동성애를 주제로 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오가는 걸 보며, '여러 의미로 6월은 성 소수자의 달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현우 교수의 파이스 해석 비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앞부분은 주해에 대한 성서신학적 비판이고 뒷부분은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다.

우선 성서신학적인 부분에 있어, 퀴어 비평은 독자 반응 비평, 해체주의와 후기 구조주의와 같은 틀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즉 퀴어 비평에서는 독자 또한 저자만큼이나 중요한 주체가 된다. 독자는 단순히 수동적인 위치에서 텍스트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저자와의 대화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능동적인 존재다. 민중신학이나 흑인신학, 여성신학의 성서 해석과 마찬가지로 퀴어 비평은 그 동안은 철저히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온 성 소수자의 눈으로 성서를 읽어 낸다. 퀴어신학은 이들 신학과 마찬가지로 고난의 현장에서 출발하여, 텍스트와의 능동적인 대화를 통해 도발적이면서도 독특한 성서 해석들을 내놓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번에 논란이 된 파이스 해석이다.

퀴어 비평이 이런 낯선 해석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퀴어 비평은 폭력을 고발한다. 성서를 헤테로섹시즘(이성애중심주의) 안에 가둔, 즉 성서를 향한 폭력을 고발하고, 성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해 온 폭력적인 해석을 고발한다. 아울러 폭력의 도구였던 성서를 위로와 구원의 말씀으로 오늘날 되살려 낸다.

신현우 교수는 파이스라는 어휘를 성 소수자로 번역하는 것이 잘못된 용례 인용이요, 지나친 추론이라며 비판한다. 어휘의 용례들을 분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퀴어 비평이 말하고자 하는 더욱 본질적인 관심은 용례 너머에 있는 실존이다. 예수와 바울도 성서를 인용했다. 용례 분석으로 본다면 예수와 바울 또한 신현우 교수의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우린 예수의 성서 해석이 무가치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보다 본질적인 관심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와 바울의 텍스트 인용이 무리하다고 해서 그것을 사이비 해석 내지는 증거 조작으로 단정 지어야 할까? 예수는 억압받는 이들의 실존을 자신의 상황과 이웃들, 그리고 텍스트와 상호 교류하며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는 퀴어 비평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를 봐야 한다는 비유가 있다. 용례와 인용에 대한 충실한 분석만큼이나, 그 너머의 존재도 중요하다. 성서는 오로지 본문 내의 개연성에 집착하기보단, 당시를 살아간 세계와 사람들 사이의 개연성 속에서 만들어졌다. 성서와 세상, 그리고 사람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내가 신현우 교수의 비판에서 아쉬웠던 점은 성서신학적 용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 붙은 동성애에 대한 그의 윤리적 견해와 주장들이었다. "동성애가 일종의 병적인 상태이며 중독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이는 논리적 문제이다. 입증의 책임은 동성애가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있다. 또한 이미 이 문제는 의학계에선 결론이 난 지 오래다. WHO, 미국정신의학회, 미국심리학회 등에선 동성애를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편견을 없애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난 그가 무슨 근거로 동성애를 중독으로 단정 짓고 있는지, 그리고 동성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는지 그가 강조한 '개연성'에 의심이 간다.

그의 말대로 이 사회엔 차별받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인종차별, 경제적 차별, 학력 차별, 성차별 등 온갖 억압들이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옥죄고 있다. 성 소수자들을 향한 차별도 그중 하나다. 이런 차별의 문제는 곧 인권의 문제다. 그리고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기에 인권 문제를 다룸에 있어 모든 억압은 우열 없는 주요 과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동성애만 긍휼한 것으로 여기는 차별적 관점은 문제다. 하지만 동성애자들 외에도 긍휼히 여겨야 할 이웃이 많다며 세월호마저 거론하는 그의 글은, 한 생명 한 마리의 양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 예수의 모습을 무색하게 한다.

젠더는 틀림이 아닌 다름의 영역이다. 다름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선 안 된다. 이는 인권의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최근 미국 정부와 여당이 끊임없이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받는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제도 개선에 힘쓰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세계인권선언은 다름이 차별이 되어선 안 된다는 평등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명시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국민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이들과 유사한 그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도 차별을 받지 않고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차별적 인식이다. 동성애 혐오와 같이 일그러진 세계관이 성서 텍스트와 만나 여성차별, 인종차별, 장애인 차별 등과 같은 인류의 온갖 추악한 범죄행위들을 정당화했다. 성서를 기록한 저자만큼이나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의 자리가 중요한 이유며, 성서와 독자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텍스트 해석의 매우 중요한 요인인 이유이기도 하다.

'개연성' 있는 성서 해석을 강조한 신현우 교수가 동성애에 대해선 인권적인 접근이나 의학적 정론, 법적인 평등권을 모조리 간과하며 왜 그토록 '개연성' 없는 추측에 의존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차라리 용례 분석에 대한 부분만을 언급했다면 좋을 뻔했다. 그가 뒤에 덧붙인 동성애에 대한 견해가 그 스스로 주장한 '개연성'도, 연역추리가 갖는 한계에 대한 비판도 일거에 부정해 버리는 꼴이 되었다. 헤테로섹시즘을 벗어난 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향한 '가능성'은 거세한 채, 동성애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연역적 한계'를 드러낸 그의 비판은 참으로 아쉽다. 텍스트와 오늘의 세계 그리고 여러 다른 학문들과의 '개연성'을 통해 '가능성'을 확장한다면 성서는 더욱 풍요롭게 다가올 것이다.

홍신해만 / 미국에서 유학 중인 신학생. 현재 연합그리스도교회(UCC·United Church of Christ)에서 인턴 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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