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 선생, 이제 커밍 아웃 하시지요?
바디우 선생, 이제 커밍 아웃 하시지요?
  • 김기대
  • 승인 2015.06.24 13:0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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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사건으로 풀어 보는 혁명가 바울

2차 대전 이후 유럽 학계는 아우슈비츠 만행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합리성에 모든 것을 걸었던 학자들은 이성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야만 이후의 세계를 재분석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1930년대 태동했지만 2차 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비판이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종전되었다고 해서 세상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소련은 노동자 인민의 나라가 아니라 패권국이 되었고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를 놓고 미국과 대립했다. 알제리와 베트남은 유럽의 지식인들을 더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2차 대전의 피해자이면서 종전 이후 가해자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는 프랑스를 보면서 지식인들의 고뇌는 더 깊어 갔다. 

유럽 지식인들은 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토대로 네오 마르크스주의, 불교, 이슬람 등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스탈린에 실망한 유럽 좌파들은 트로츠키와 마오이즘(마오저뚱 주의)을 기웃거렸다. 레지 드브레 같은 지식인은 볼리비아로 날아가 체 게베라 혁명군에 일원이 되었다. 그 중 마오저뚱이 주도한 대장정은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패전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국민당의 포위망을 뚫고 1년여에 걸쳐 9,600Km를 탈출한 홍군의 대장정은 물질과 의식, 이론과 실천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구좌파들에게는 인간의 주관적 능동성에 주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1968년 5월 68혁명이 시작되면서 모든 기존의 권위는 부정되었고 '금지만을 금지한다'는 68의 슬로건처럼 모든 것은 허용되었다. 이제 '해 아래 새 것'은 없었고 보편주의라는 것도 사라졌다. 모두가 제 소견대로 하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무한한 자유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곳에도 '구원'은 없었다.

알랭 바디우는 이런 지적 편린을 다 거친 사람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의지하지 않아도 혁명은 가능하다고 본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기승으로 바디우의 혁명적 신념이 희미해지던 차에 그는 '사도 바울'을 만났다.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바울이 경험했던 회심처럼 바디우에게 바울과의 조우는 회심 사건이었다.

 

진리 -사건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지배질서를 전복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에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진리는 어떤 사건을 통해 발견되는데 이것을 경험한 주체는 과거와는 단절하고 이 사건에 충실해야 한다. 바디우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반대하면서 전통적인 플라톤주의의 진리와 주체의 개념을 그만의 방법으로 되살리려 하면서 바울에게서 그 방법을 찾는다. 

바디우는 바울이 그리스도와 만난 사건에 몰두하지만 바울의 예수 해석에는 관심이 없었다. 1세기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와 비슷한 내러티브를 가진 유랑 설교가들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부활한 그리스도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와의 만남이 그를 사도로 주체화시켰다. 다시 말해 제자들과는 다른 경로를 통해 사도로 부름받았는데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메시아 사건을 통한 주체의 정당화는 보편주의의 토대가 된다.   

바디우는 19세기 수학자 그레고리 칸토어의 집합론에서 무한과 실존의 관계를 배워오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잠재적 무한'을 일상에서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 체험과 칸토어의 집합론, 그리고 진리 - 사건 - 주체를 연결시키면 '바울이 만난'( 다른 사람이 만난 메시아에는 관심이 없다) 메시아만 진리라는 말이다. 진리는 초월의 영역에서 누군가가 검증해 주어야 하는데 칸토어 이론에서처럼 무한은 유한에 의해서 무한성을 인정받는다. 즉 무한한 존재 그리스도에 의해 바울의 유한성이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바울의 유한성이 무한한 그리스도를 진리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회심 사건은 진리가 되어 바울을 혁명적 투사로 만들고 이 사건은 로마와 유대 질서를 무너뜨리는데 충실하게 작동했기 때문에 진리가 된다.  

그러므로 혁명이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좌절하지 말고 진리 사건을 만들어나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경험에서 자신만의 진리 사건을 발견해야 하는데 진리의 객관적 기준은 사건에 대한 본인의 충실성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를 진리 사건 주체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된다. (바디우의 말은 아니고 그의 이론을 적용해 본 예다.)

A라는 사람은 동성애자들의 '비정상적' 행위를 목격하고 나서는 '동성애는 죄'라는 명제를 진리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주체 A의 판단이므로 그것을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이제 A는 충실하게 이 진리를 퍼뜨려야 한다. 그래서 동성애 반대 집회도 나가고 시민들도 계몽하는 등의 실천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충실성을 획득한 것일까?  동성애의 '비정상성'을 지적하는 충실성을 가지려면 모든 비정상에 대해 충실성을 가져야 한다. 부의 편중, 환경문제, 불의한 권력과 같은 모든 비정상과 싸워 나가야 한다. 그런데 동성애의 비정상성에만 충실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진리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 그것은 '견해'일 뿐이다.

바울은 그 날의 진리 사건 이후 과감한 주체가 되어 로마와 유대의 전통과 싸워 이길 '소망'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경험한 진리 사건은 정당성을 확보한다. 

 

어떤 것이 진리라고 누가 결정하는가?

바디우의 바울 이해에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관적 경험으로 보편의 토대를 쌓는 것은 맹목적 결단주의로 흐를 수 있다. 또한 '스탈린과 히틀러의 자기 주관성과 바울의 그것이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는 <바울의 정치적 종말론>의 저자 도미니크 핀겔테의 질문이기도 하다. 또한 도미니크는 바디우가 진리 사건과 진리 내용을 별개로 본다고 비판한다. 그리스도의 나타남은 역사적 예수와 함께 가야 하며, 갈릴리 무지랭이들을 향한 예수의 복음 없이 개인의 주관적 체험으로만 충실성을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니크는 어떤 사건과 마주할 때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담지자가 되라는 바디우의 생각을 높이 산다. 어설픈 관용에 기초한 포스트 모던적 사고로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를 읽고 있으면 거슬리는 부분은 있어도 독실한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을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에게서 복음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사상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예수의 사상을 관념화시킨 존재로 폄하되던 바울을 복권시킴으로써 전거를 무두 잃어버리고 방황하던 유럽 지성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레고리 칸토어가 유한에 포함된 무한의 개념을 주장하면서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면, 알랭 바디우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칭하고 있다. 하지만 유신론자라고 하면서 내용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건지 '바알신'을 믿는 건지 구별이 안 되는 '자칭 기독교인'에 비한다면 바디우는 충분히 '기독교적'이다.

바디우 선생! 이제 무신론자 코스프레 그만하시고 기독교인으로 커밍아웃 하시지요? 르네 지라르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당신 글을 읽고 은혜받았거든요.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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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2015-07-04 02:27:08
무한은 유한에 의해서 무한성을 인정받는가?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바울의 유한한 논리에 의하여 인정받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과연 유한한 인간에 의해서 인정받는 진리나 하나님은 무한한 것일까?
인간 중심의 사고일 뿐이다. 또한 성경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음을 반증한다.

인간이 없어도 하나님은 존재할까?
여기에 답이있다.

하나로 2015-06-25 10:06:14
공감합니다. 나 역시 바디우의 글을 읽으면서 바디우 선생이 왜 신앙고백하기를 주저하는가, 하는 생각도 얼핏 해 보았습니다. 바디우가 지적했던 바울의 혁명적 입장이 오늘날 교회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고민해 보십시다. 오늘날의 바울의 모습을 파솔리니 감독이 쓴 씨나리오 "사도 바울"이 영화화되지 못한 것이 아쉽네요. 김 목사님의 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건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