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신학은 좀 관대하면 안되나
정통 신학은 좀 관대하면 안되나
  • 김기대
  • 승인 2015.07.01 13: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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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쉽게 잊혀진 신학자, 한스 프라이

1965년 폴 틸리히의 별세를 시작으로, 68년 칼 바르트, 71년 라인홀드 니버, 76년 루돌프 불트만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이성으로 시작해서 이성으로 무너지는 20세기를 풍미하던 신학자들이 10여 년 세월 동안 모두 사라져 버렸다. 신학자들이 살아 있어야 그들의 신학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서구 신학계를 대표할 스타의 부재가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다행히 유럽 신학계는 차세대인 위르겐 몰트만(1926~),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1928~2014) 등이  명맥을 이어갔지만 미국 신학계에는 차세대 대표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무주 공산이 되어 버린 미국 신학계에서 대가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변방의 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신의 죽음의 신학'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얼굴을 내밀었으나 선배들 만큼의 영향은 주지 못했다. 하비 콕스가 돋보였으나 그의 책들은 대안없이 기독교의 세속화만 재촉했다(현재 콕스는 젊을 때의 신학을 많이 수정했다). 반대쪽에서는 성경신학에 기초한 복음주의가 부각하기 시작했다. 역사 비평에 의해 누더기가 되었던 성서비평을 제자리로 돌려 놓은 데는 이들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으나 그들이 본래 원하던 바는 아니었겠지만 마이클 호튼이 '미국제 복음주의'라고 호명한 왜곡된 신학운동의 탄생도 넓게는 이러한 흐름 위에 있었다.

   

구글이미지에도 이 사진만 남아 있을 정도로 잊혀진 신학자 한스 프라이

한스 프라이(Hans Frei, 1922~1988), 나이로만 보면 유럽의 몰트만, 판넨베르그와 비슷한 또래이지만 아쉽게도 66세라는 비교적 빠른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그의 신학도 함께 묻혀졌다.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라인홀드 니버의 제자로 칼 바르트에 대해 연구한 그였기에 바로 위 선배 신학자들의 자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있는 시대적 위치에 있었다. 그의 첫 저작은 <The Eclipse of Biblical Narrative>로 1974년에 출판되었다. 출판 당시 서구 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아직은 대가들에 묻혀 있었다. 뒤이어 여러 저서들이 출판되면서 선배들의 빈자리를 대신할 신학자로 막 뜨기 시작하던 그의 신학 최전성기에 안타깝게 별세하고 말았다.

<The Eclipse of Biblical Narrative>는 우리 말로 <성경의 서사성 상실>(한국장로교 출판사, 2000년)로 번역된 유일한 한스 프라이의 저서이며, 장로회 신학대학 이형기 교수의 <성경의 내러티브 신학과 교회의 공적 책임>(한들출판사, 2010년)에서 한스 프라이가 자세히 다루어 졌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으면서 책도 절판되었다. 한스 프라이를 설교학 입장에서 연구한 찰스 켐벨의 <프리칭 예수> (기독교 문서 선교회, 2001년)에서도 그의 신학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한스 프라이의 탈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설교학의 새지평'(New Directions for Homiletics in Hans Frei's Posthberal Theology)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영어로 쓰인 한스 프라이 연구서로는 Toward A Generous Orthodoxy (Jason A. Springs, Oxford University Press, 2010년)가 유명하다. 관대한  정통(Generous Orthodoxy)은 본래 한스 프라이의 개념이었으나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기독교를 생각한다>(청림출판, 2011년)에서 이 용어를 차용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친숙한 개념이다.    

 

내러티브 신학의 기초를 놓다

전통적인 신학이 명제 신학('예수는 구원자이다' 라는 식의 명제들)이라면 이야기 신학은 성서를 관통하고 있는 서사(이야기)에 주목한다. 명제 신학도 극복하면서 텍스트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보자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스 프라이의 사상을 '탈자유주의 신학(Post Liberalism Theology)'이라고 부른다. 프라이는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변증'을 문제 삼는다. '변증적'(apologetic)이란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신학은 현대 문화 속에서 설명되고 수용되기 위한 자기 증명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성서의 사건은 시대 정신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영남신학대학교 김동건 교수는 자유주의 신학의 변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변증적 신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보편적인 인간의 필요나 공통적인 인간의 경험과 관련해서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성서가 가진 그 자체적인 언어의 세계나 기준보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나 인식과 상관적으로 작업을 한다. 예를 들면, 지금은 이성의 시대이고 모든 진술은 합리성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이 합리성의 토대에 따름변 성석의 기적, 동정녀 탄생은 수용될 수 없다. 그러면, 변증적인 신학은 이런 성서적 사건들을 적절히 합리적 사건으로 해석해서 시대적 정신과 모순되지 않게 설명한다. (한스 프라이 신학의 특징, 신학과 목회, 28집)

결국 성서의 진리도 이성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 신학의 변증에 반대하면서 한스 프라이의 이야기 신학은 계시에 주목한다. 성서 텍스트를 합리적 문헌으로 축소시키는 우를 범했던 자유주의 신학과 달리 프라이는 계시의 서사성을 강조한다.

한스 프라이는 '실제적이거나 역사 같은 성서의 이야기들(realistic or history-like stories of the Bible)', '픽션이 아닌 픽션(non-fictional fiction)' 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합리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은 '사실', '역사' 이런 개념들을 선호했지만 이야기 신학에서는 '서사'가 강조된다.

말하자면 성서는 인간과 역사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변증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이다. 오병이어 사건을 예로 들자면 모더니티 신학에서는 '도시락 지참설, "에세네 파의 공급설' 등을 주장했고, 보수 성경신학에서는 예수에 의해 실제 일어난 기적 그 자체에 집중한다. 반면 한스 프라이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지(합리성),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 지(역사성)의 판단을 유보한다. 그것은 구원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서사로서 그 자체로서 진리이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와 잘 어울린다. 아직도 역사성, 합리성이라는 '전(pre)' 근대적 개념에 천착하면서 그것을 '진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다.  

 

진보 보수를 아우를 수 있는 신학

자유주의신학로부터 출발한 진보 신학자들은 성서의 계시보다는 문화적 보편성이나 역사성에 주목해 왔다. 반면 이른바 정통보수들은 성서의 계시성을 강조하면서도 비평적 잣대를 무리하게 적용하거나 문화의 편파적 이익에 복무해 왔다. 깊이 들어가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표피적인 차이를 가지고 대립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한스 프라이는 실증적 역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진보가 아니며, 성서의 자구 그 자체보다는 텍스트의 이야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보수도 아니다. 그는 두 진영을 넘나들면서 성서에 정통의 가치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 정통은 편협한 정통이나 전통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전)통적인 가르침은 관용(용서) 그 자체다. 2015년 미국이 직면한 현안에 대해서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정통'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 정통에는 관용이 없다. 관용을 강조하는 이들에게는 성서가 실종되기도 한다. 한스 프라이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에 주목하면 관용도 계시도 모두 충돌 없이 우리에게 수용될 수 있다.

한스 프라이를 읽고 있으면 많은 학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자크 데리다도 생각나고, 증명할 수 없는 단계를 오히려 실재계로 명명했던 자크 라깡과도 겹쳐진다. 르네 지라르가 즐겨 사용하는 '미메시스' 개념을 프라이는 일찌감치 사용했으며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아우에르 바흐(Erich Auerbach)가 처음 미메시스 이론을 철학적 개념으로 정착시킨 사실도 프라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기독교 윤리학으로 보자면 자크 엘룰과 닮아 있으며 팀버튼 감독의  2003년 영화 <빅 피쉬>는 이야기가 어떻게 진실로 변해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동성결혼 합헌이라는 낯선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보 보수 진영의 전사가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이다.

어제 한스 프라이보다 한 살 많은 1921년생의 할머니를 양로병원으로 심방 다녀왔다. 아직도 정정하고 음식도 잘 들고 생각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휴대 전화를 하나 해달라는 고집만 빼고. 식구가 없어 연락할 때도 없는데 말이다.

요즘 한스 프라이 책을 읽고 있는지라 양로 병원에서 돌아오면서 그의 생각이 났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93세) 정치보다 더 하면 더 했을 진보 보수 신학(앙)의 갈등을 해결해 주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한 어제였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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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ary4all 2015-07-02 00:48:01
김기대 편집장님의 학습량 혹은 독서량의 엄청남에 경의를 표합니다. 관용이라는 단어를 매우 중시하시는 것 같은데요. "성서의 사건은 시대 정신과 모순 되어서는 안된다" 멋진 언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성서의 사건에 시대 정신은 모순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