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와 '예수는 없다'
'가나안 성도'와 '예수는 없다'
  • 김기대
  • 승인 2015.07.15 0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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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데스크] 두 강연의 문제점안에 이민 교회 미래가 있다
   
▲ 양희송 대표와 오강남 교수

지난 주간 <뉴스 M>과 관계된 두 개의 행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청어람 양희송 대표의 '가나안 성도 현상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오강남 박사의 '바른 예수 바른 믿음'이란 강연이었습니다. (앞으로 호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사실 <뉴스 M>이 관계되어 있다고 하기에는 부끄럽습니다. 양희송의 강의는 그의 미국 방문 때마다 강연을 주관해 온 LA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본부(LA 기윤실)에서 이번에는 <뉴스 M>이 맡아 주면 좋겠다고 해서 맡은 것이고, 오강남의 강의는 여름 학기를 개설한 미주 감리교 신학대학(미주 감신)이 행사 안내 기사를 부탁하면서 후원에 이름을 넣어달라고 해서 허락한 것입니다. 정작 학교측이 만든 배너에는 <뉴스M>이 들어가 있지도 않더군요. 농담이지만 오강남의 강의가 문제가 되면 '우리는 아무 관계 없는데요' 하면서 슬쩍 발을 빼도 될 듯합니다. 행사 준비도 LA 기윤실과 미주 감신이 주로 했지 그야말로 <뉴스 M>은 숟가락만 얹었습니다.

물론 주최를 하든 후원을 하든 충분히 가치 있는 행사였기에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LA 기윤실은 교회개혁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단체이고, 미주 감신은 낮고 비천한 자리를 마다 않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일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학교입니다. 강사의 지명도도 물론 있지만 두 단체가 주는 신뢰가 <뉴스 M>의 '이름을 빌려 주는'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명도에 있어서 양희송과 오강남 누가 더 높을까요? 양희송을 아는 사람들 중에는 오강남을 아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되겠지만 오강남을 아는 사람 중에는 양희송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통계적 엄밀성과는 거리가 먼 추측을 해 봅니다. 지명도를 단순 비교하기가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마니아 층이 타종교와 기독교의 거리 만큼이나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멀 겁니다.  몇몇 스텝을 제외하고 두 강연에 모두 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두 행사 모두 참석 인원 예측에서 빗나갔습니다. 양희송의 행사는 50여명 정도를 예상했는데 그 반 정도가 왔습니다. 오강남의 행사는 미주 감리교 신학대학생과 강연장소를 제공한 평화의 교회 교인을 포함해 최대 70명 정도를 예상했는데 세 번의 강의 중 첫날은 120명 정도가 왔고 조금씩 줄긴 했지만 연인원 300명 이상이 참석했습니다.

<뉴스 M>에서는 두 행사 모두 같은 비중으로 두 번의 안내 기사를 실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강사의 지명도 차이도 아닐 겁니다. 변수가 있다면 <미주 중앙일보>에서 오강남 강연 기사를 보도했으니 종이신문의 덕을 조금 더 보았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그러면 인원수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이것 역시 객관적 데이터에 의한 것은 아니고 '다년간 교민 교계에 종사한' 사람의 '촉'에서 나온 것임을 감안하고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 오강남 교수의 강의는 세 번의 강의 중 첫날은 120명 정도가 왔고 조금씩 줄긴 했지만 연인원 300명 이상이 참석했다.

1980년대 중후반 이후 복음주의 교회들이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진영에 속한 사람들의 나이가 상대적으로 젊다는 뜻입니다. 1980년대 초반까지 대학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기독학생회(SCA) 퇴조와 더불어 복음주의권 신흥 기독청년 그룹들이 부상했지만 기독학생회 만큼의 깊이는 갖추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학생회의 필독서가 '민중신학', '해방신학', '해방전후사의 인식' 류였다면 복음주의권에서는 서남동, 안병무, 불트만, 몰트만, 틸리히를 대체하는 낯선 이들의 책이 읽혀졌습니다.

복음주의 권에서 가나안 성도 즉 교회 이탈 교인에 대한 논의가 신학 차원의 논쟁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젊음=인터넷에 능숙함'이라는 등식이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오지 않아도 집에서 습득할 수 있는 정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뉴스 M>의 강연 안내 기사 조회수를 봐도 양희송이 더 많습니다. 문제 의식은 지녔지만 키보드 전사에 머물러 버리는 사람들이 복음주의 진영에 많다는 것이지요.

그날 강연에서 나온 질문은 교회에서 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하소연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소통은 중요한 것이지만 질문자들은 소통의 의미를 '내 말이 상대방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상대방의 말이 나에게 들리지 않는 것은 소통의 범주가 아닌 모양입니다.

복음주의 세대나 교회 개혁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전세대 크리스천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한데 전세대가 모두 조용기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독청년운동을 하던 전세대의 눈에 복음주의 청년들은 복음성가 부르며 자기 도취에나 빠져있고, 신학이 실종된 QT나 하는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는 불통의 대상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읽는 책의 성향에 있어서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고요.

그러므로 '가나안 성도'에 대한 현상 분석이 아니라 보다 깊은 신학적 논의를 기대해 봅니다. 교회 안 나가는 기독교인이라는 맥락에서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을 많이 거론하는데 '교회 안나감'에서 공통분모를 찾지 말고 그의 치열했던 성서 연구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강남은 1.5세대 종교학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1세대 종교학자라면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가르치던 윤이흠, 정진홍 등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오강남은 그들보다는 약간 젊은 층에 속해서 그렇게 분류해 보았습니다. 비슷한 세대로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은퇴한 후 강화도에서 심도학사를 운영하고 있는 길희성이 있습니다.

'예수는 없다' 라는 도발적인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강연은 보수적 또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는 거슬립니다. 예수 부활의 역사성, 타종교와의 대화 문제, 배타적 진리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듣다가 실제로 강사가 하고 싶은 말의 뜻에 도달하기도 전에 일단 벽부터 쌓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강남의 강의 내용이 최근의 학계 흐름을 반영한 것은 아닙니다. 종교간의 대화를 다루고 있는 부분은 포스트 모더니스트 같지만 역사성을 강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모더니스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성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가 한 때 인기있는 분야였지만 요즘 철학계에서는 '주체'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지키면서 다른 현상을 분석하는 흐름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미로슬라브 볼프도 '팔을 벌리고, 포옹하고, 그리고 놓아 주라'는 말로 그러한 흐름을 담아 냅니다. 삼위일체와 같은 전통적인 교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급진에 가까운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 존 밀뱅크의 신학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보살 예수'라는 '예수는 없다' 못지 않은 불경한(?) 제목의 책을 쓴 길희성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타종교의 문제를 풀어가기 때문에 훨씬 '은혜'롭습니다. 반면 오강남은 그 부분이 약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학자가 아닌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간의 대화를 설명하는 '산의 정상은 하나이지만 그곳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는 비유도 사실은 좀 오래된 것입니다. 산의 정상이라는 객관적 지점에 치중하는 근대적 시각이지요. 어떤 길을 따라 정상에 도달하느냐에 따라 그 정상은 같지만 '다른' 정상입니다. 험난한 코스로 간 사람, 관광객을 위해 잘 닦여진 길로 간 사람, 케이블카로 올라간 사람 모두가 같은 정상에 도달했다고 같은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라는 객관적 좌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른 사람의 주체적 경험이나 판단이 중요하다는 쪽으로 학문의 방향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리의 상대화를 주장하면서 '산의 정상'을 객관적으로 절대화시킨 모순에 대한 비판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입추의 여지없이 왔을까요? 입추의 여지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행사장이 좁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자체 교인들이 기본으로 확보되는 대형교회 부흥회나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한국 정치인의 강연, 여러 단체가 공동 주최하면서 각 단체별로 참석 인원을 할당하는 행사도 아니고, 우리 신문사에서 '후원'도 전혀 하지 않아 특별한 홍보랄 것도 없었던 강연에 이 정도 온 것은 남가주 강연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청중 중에는 가장 큰 한인 은행의 행장도 있었습니다. 그는 늦게 와서 제일 뒷줄 등받이도 없는 나무 벤치에 앉아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다른 행사에 가면 누구나 다 알아보고 먼저 와서 인사하고 상석에 앉아 '내빈' 취급을 받을 사람인데 말이지요. 나 역시 한 때 그 은행에 다녔던 아내가 귀띔을 해주어서 알았지 청중 누구도 그가 높은(?)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남가주형 가나안 교인'들은 교회 보다 가르침의 내용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집토끼를 놓치기 싫어 안전 제일 주의로 간다면 집 떠난 토끼가 돌아오기는커녕 남은 토끼도 잡아 둘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교인 확보를 위해 진리를 포기하고 오강남 학설을 받아 들이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강사도 강연 중에 자신의 말을 가리켜 "이런 주장도 있다는 선에서 내 이야기를 받아 들여야지 이것만이 진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통용되는 신학적 '진리'는 전 세대의 '진리'와 싸워 얻은 결과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진리도 다음 세대에 의해 번복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누군가에 의해 번복된다는 것은 불쾌하므로 '진리 수호'를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하겠지만 피해갈 수 없는 흐름이라는 사실을 교회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청중들은 오강남으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겁니다. '예수의 보혈의 공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전통 신학의 명제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새롭게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듣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재림이 낭설이라는 말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용어가 아닌 삶의 용어, 사회에서 통용되는 교회 밖의 용어로 재해석하고 싶은 겁니다. 그들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지금 목말라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교회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이 '타락한' 세상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 일반 언론인 <미주중앙일보>가 주최측에서 보도 의뢰를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큼지막하게 오강남 강연 기사를 보도했을까요? 속된 말로 오강남이 '장사'가 된다는 걸 파악한 겁니다. 일반 신문기자도 아는 사실을 지금 교회만 모르고 있는 겁니다.

동성혼과 같은 의제에 대해 "빨리 10명에게 전달해 주세요" 라는 따위의 텍스트를 보내는 이들이 한인교회의 주류라는 아주 큰 오해들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메신저 대화방에 어떤 사람이 중앙일보에서 동성혼 찬반투표를 하고 있으니 빨리 가서 반대를 누르라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요즘 이런 것들 많이 받아 보시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이런 응답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교단장 선거, 대통령선거, 지방선거에서 누구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동성혼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이지만 남에게 특정 선택을 강요하는 당신의 교양 없는 행동은 받아들일수 없다"라고 말이지요. 교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화였습니다.

붕괴속도가 한국 교회 보다 더 빠른 이민교회의 미래가 정말 걱정이 된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어디에 목말라 있는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잡아 내야 합니다.

그게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양희송은 교회 이탈 교인을 걱정하면서도 기성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갑니다. 오강남은 신학자가 아니므로 교회 제도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두 강사가 공통되게 주장하는 '이대로는 안 된다'를 깊게 새겨들어야 합니다. 혹시 많은 목회자들이 '이대로도 괜찮다!'라고 하거나 '이대로는 안 된다'라면서도 전혀 엉뚱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게 고민해 볼 때입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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