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드라크마가 된 그리스의 운명
한 드라크마가 된 그리스의 운명
  • 김기대
  • 승인 2015.07.1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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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남이가!'를 외쳐야

드라크마를 화폐단위로 사용하다가 유로를 쓰게 된 그리스 경제의 앞날이 불투명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리스는 현지 시각으로 지난 5일 이루어진 국민투표에서 긴축정책의 지속 등을 요구하는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 제안을 거부했다. 이어 11일 그리스 정부가 채권단에 제출한 개혁안이 그리스 의회를 통과했다. 채권단측과 그리스 정부의 줄다리기를 통해 결말이 날 전망이다. 하지만 그리스 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에 대한 그리스 시민의 반발도 만만찮아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쉽게 전망할 수 없는 상태다.  

2001년 유로화를 쓰는 유로존에 그리스가 가입하기 전까지 그리스는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드라크마를 화폐단위로 써왔다. 예수 당시의 유대는 로마 제국의 화폐단위인 데나리온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리스의 드라크마도 같은 환율로 통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한 데나리온(드라크마)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이처럼 환율은 같았지만 1세기 중동에서 그리스 제국의 영향이 채 가시지 않아서일까? 신약 시대에 백성들의 체감 가치에서는 드라크마를 더 쳐주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유대 결혼 적령기 여인에게 열 드라크마는 결혼예물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 1,000달러와 1,000달러를 주고 산 의미 있는 물건과는 가치가 다른 것과 같은 경우이다.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때 결혼 지참금 형식으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꿰어 주는데, 여인은 그것으로 자신의 머리를 장식했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찾는다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로마 제국의 등장과 함께 변방국으로 밀려났던 그리스는 1832년부터 드라크마를 화폐단위로 다시 사용한다. 드라크마의 부활을 통해 옛 영화를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2001년부터 유로존 국가가 된 그리스에서도 ‘유로’를 사용하게 된다.

이미 지난 2010년 한 차례 IMF의 구제 금융이 있었으나 그것으로도 막지 못하고 2015년 다시 그리스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유럽연합 입장에서 보면 잃어 버린 한 드라크마와 같은 그리스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인지, 아니면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포기하고 나머지 드라크마로 유로존을 유지할 지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심지어는 가장 큰 채권국인 독일이 먼저 유로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들린다.

   
 

통일 비용으로 인해 제살 깎는 아픔을 경험했던 독일국민들은 그리스 때문에 또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관론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은 유로존 내에서 제일의 경제 강국이자 가장 큰 그리스 채권국인데 밑 빠진 독에 언제까지 물을 부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런 독일의 분위기에 대해 2차 대전 후에 독일이 받은 혜택을 기억하라는 비판의 소리도 넘쳐 난다. 이런 비난에 대해 독일은 우리도 할 만큼 했다라고 응수한다. 하나의 유럽을 꿈꾸며 시작했던 유럽연합(EU)에 자민족 이기주의로 인한 균열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유럽은 2차 대전 이후 유럽 공동체를 통해 전쟁없는 평화로운 유럽을 꿈꾸게 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애독서로 유명해진 제러미 러킨스의 <유러피언 드림>(민음사,2005년)은 유럽 연합의 출범을 이렇게 설명한다.

1957년 유럽 경제공동체(EEC) 형성을 위해 체결된 로마 조약의 전문은 "유럽인들 사이의 더욱 긴밀한 연합을 위한 기초를 놓는 것"이 목표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해묵은 적대 감정을 기본적 이익의 통합으로 대체하고 대체하고 경제 공동체를 확립함으로써 유혈 분쟁으로 오랫동안 분열되어 온 민족들 사이에서 더 넓고 깊은 공동체의 기반을 만들고, 이제부터함께할 운명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 로마 조약의 원대한 꿈이다. (261쪽)

이 회의가 로마에서 열렸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점점 거대해지는 미국에 대적할만한 지역공동체를 꿈꾸면서 그 회의 장소를 로마로 삼았다. 은연중에 로마 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로마제국은 기독교 제국이기도 했다. 초기 유럽 연합의 국가들은 모두 개신교와 가톨릭에 기반을 둔 나라들이었다. 이들은 니케아 신조라는 공통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이 범주에 끼지 못하는 나라들은 초기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교회 신앙을 가진 그리스가 대표적이며, 이슬람에 기반한 터키는 아직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는 그리스 제국의 적자라는 전통 때문에 유럽연합 초기 국가들에게 거부감이 적었다. 유럽연합은 로마 그리스의 전통을 계승하는 즉 헬레니즘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리스는 2001년부터 유로존에 가입하는데 경기 호황과 더불어 그리스의 주산업인 선박 해운에 대한 외국의 투자가 2009년까지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었다. 그러다가 미국발 경제 침체와 함께 위기가 닥쳐오자 그리스 경제는 버티지 못하고 1차 IMF를 맞게 된다. 요한 판 오페르트벨트는 <유로화의 종말>(골든북 미디어. 2012년) 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번 구제 금융에는 그리스 당국이 재정지출 삭감과 세금인상으로 재정적자를 줄이고 정부부채를 통제한다는 조건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경쟁력 제고,경제 구조 개혁, 경제의 체질 개선이라는 과제가 그리스 정부에 주어졌다. 아테네에 위치한 그리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 유럽연합의 관리를 받게 되었고 3개월마다 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구제금융을  통해그리스는 2012년까지 시장의 도움 없이도 정부 재정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스 정부가 위의 조건을 잘 이행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159쪽)    

그런데 조건을 잘 이행하지 않았나 보다. 5년 만에 다시 구제 금융을 받아야 될 신세가 됐다. 구제 금

   
 

융을 제공하는 측 중심으로 개혁이 이루어지면 노동시장이 악화된다거나(IMF이후 우리 나라의 대량 해고 사태를 기억하면 된다), 복지가 축소될 수 있다. 한국의 보수언론들이 그리스사태를 복지병이라고 분석하는 것과 달리 그리스의 복지 상태는 유럽 기준으로 중간 수준이며 결코 과다하지 않다. 유권자들은 그나마 복지가 줄어들까 좌파연합(시리자) 정부에 투표했고 채권국의 개입으로 복지 축소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한국은 달러화에 대한 환율을 조정함으로써 수출을 통해 사태를 극복할 수 있지만 그리스는 채권국과 단일 화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조차 쉽지 않다. 그리스가 다시 드라크마로 돌아오면 즉 유로존을 탈퇴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경제전문가들이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채권국들이 그리스를 찾아야 할 한 드라크마로 생각하고 끝까지 지킬 지 아니면 퇴출시킬지의 고민이 곧 유럽연합의 고민이다. 민족적 경계를 뛰어 넘어 평화로운 세상 만들자고 했지만 민족적 이기주의까지 허물 수는 없다. 단일 민족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서울이 재정상태가 어려운 다른 자치단체를 지원할 수 있지만 이 경우 지방 자체 단체가 서울에 빚을 많이 졌다고 해서 지방도시를 버리지는 못한다. 최악의 경우 중앙정부가 개입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이런 취지로 시작했지만 각 나라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를 무조건 도와줄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결국은 '같이'가 아니라 '따로' 인 셈이고, 유럽 의회나 유럽 중앙정부가 자리도 잡기 전에 화폐 통합부터 서둘러 이룬 결과다. 따라서 그리스 사태는 단순히 경제 위기가 아니라 유럽 연합의 존재 의미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될 것이다.  

유럽연합이 출범하던 1992년 10월, 한국 사회는 유럽연합이 종말을 상징하는 사탄이라고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당시 다미 선교회는 겨우 한반도 위기설로 종말론을 조장하는 홍혜선보다 훨씬 스케일이 컸으며 나름 이런 위기사태를 예견했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유럽연합에만 책임을 돌리는 것도 또 다른 음모설이 말려들 가능성이 있다.

나중에 영화로도 제작된 핼 린지(Hal Lindsey)의 "The Late, Great Planet Earth"(1970년)가 유럽 연합을 로마 제국과 연결시키고 사탄적 존재로 몰아 부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메리카 합중국과 유럽 연합을 보면 누가 더 강력한 '세상 권세'인가를 알 수 있다. 영토권이 있는 미국과 달리 "유럽연합은 한정된 영토를 바탕으로 하는 실체가 아니다. 유럽연합이 회원국들의 영토 내에서 발생하는 활동을 조정하고 규제하긴 하지만 자체적인 영토권이 없다. 유럽연합은 영토 범위를 벗어난 통치 체제다."(유러피언 드림, 258쪽)

유럽연합이라는 거대한 몸통이 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라는 일단의 의혹과 거대 지역 이기주의라는 현상이 썩 유쾌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갈수록 강성해지는 미합중국의 권세도 불안하다. 이들 블록에 대항해서 아시아가 새로운 경제 블록을 만들기에는 아시아 국가들의 민족적 특성은 종교로도 인종으로도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어 쉽지 않다. 일본이 주장하던 대동아 공영권의 트라우마도 아시아에는 아직 남아 있다.

아무튼 그리스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채권국들이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를 찾는 심정으로 도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남이가!'는 한국에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치사한 정치적 수사이지만 지금은 유럽 연합이 그리스를 향하여 '우리가 남이가!'를 외쳐 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유럽 연합이 괴물로 남지 않고 그들의 본래 취지였던 평화에 가까이 가는 길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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