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을 엿보니 좋더냐
타인의 삶을 엿보니 좋더냐
  • 김기대
  • 승인 2015.07.2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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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의 이름으로 엿듣는 자들의 회개를 기원하며

영화 <타인의 삶> (플로리안 헨켈 본 도너스 마르크 감독, 2006년)은 도청에 관한 영화다. 1984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뮈헤 분)는 그가 하는 일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없는 사람이다. 확신에 가득 차 '국가(동독)'를 위해 봉사하는 그의 모습에서 청교도에게서 맡아지는 순결의 냄새마저 감지된다. 통일 직전까지 동독에서는 9만명이 넘는 비밀경찰(슈타지 Stasi, 국가 안전부의 약칭)과 약 17만명의 정보원이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동독 인구(1980년대 동독 인구는 약 1,600만 명 정도)를 기준으로 하면 50명 중 1명은 감시원 이었던 셈이다. 비즐러 역을 맡은 울리히 뮈헤는 동독 출신 배우인데 반체제적 성격이 강했던 그도 아내에게 감시를 당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이 역할이 너무 강렬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인지 영화가 개봉된 이듬해 53살의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영화 속 비즐러는 반국가 혐의가 있는 용의자를 잡아다가 윽박지르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공포에 몰아 넣어 자백하게 만드는 고수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이 장면을 보고 든 생각은 ' 공산국가가 반공 공화국 대한민국 정보기관보다는 낫네!'였다. 80년대까지 대한민국 정보 기관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폭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비즐러가 심문하면서 피의자에게 "우리가 멋대로 잡아들였다는 건가? 우리의 인도적인 시스템을 모독하는 것 만으로도 자네는 체포감이야"라고 한 말은 히틀러 밑에서 선전상을 지낸 괴벨스의 어록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를 연상시킨다.    

때리지 않는 심문 고수 비즐러에게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찬 코치 분)과 그의 애인이자 여배우인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  분)를 감시하라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집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후 두 사람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도청한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은 선물을 푼 후 육체관계를 한 것으로 판단'이라는 보고도 한다. 그만큼 모든 것을 엿듣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즐러는 점점 그들의 삶에 매료되어 간다. 더불어 동독 정부에 반대하는 자유 인사들을 모두 반국가적 인물로 매도하던 그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게 된다. 드라이만의 삶을 엿들을 수록 드라이만은 동독정부의 체제에 반대할 뿐 순수한 사회주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즐러와 드라이만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회에 충성하고 있을 뿐이다. 비즐러가 혼란에 빠지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자신이 살아오던 방식이 애국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드라이만은 다른 방식으로 인민과 예술과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편 문화부 장관 헴프는 크리스타에게 눈독을 들인다. 곪을 대로 곪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민은 평등하지 않고 헴프는 권력을 이용해 크리스타를 탐낸다. 사회주의 국가만의 문제이겠는가?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권력을 대신해 똑같은 짓을 한다. 헴프는 드라이만을 그녀에게서 떼어 놓아야 했고 그러려면 드라이만의 반국가 행위를 잡아내어야 한다. 비즐러는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여기고 도청 지시를 성실히 수행했지만 실은 권력자 개인을 위한 업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비즐러는 국가와 권력 사이의 균열을 비로소 깨닫게 되고 두 사람을 도우려고 한다.

헴프의 끈질긴 유혹과 배우로서 성장하고 싶은 크리스타의 욕망이 일치하는 순간 둘은 관계를 갖는다. 이 사실을 아는 비즐러는 그 만의 방법으로 드라이만으로 하여금 둘의 내연 관계를 눈치채게 만든다. 국가를 위한다고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해본 건조한 삶을 살아온 비즐러는 외도한 애인 크리스타를 받아들이는 드라이만에게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삶을 엿듣던 비즐러는 매춘부를 불러 그들의 삶을 흉내내지만 사랑이 반드시 육체관계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서글픔만 터득했다.

 

좋은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

드라이만의 친구 알베르트 예스카는 드라이만에게 "좋은 사람을 위한 소나타"라는 악보를 건낸다. 얼마 안 있어 정부로부터 감시받던 예스카가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드라이만은 동독의 현실을 서독의 슈피겔지에 폭로하기로 작정하고 동독 정부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타자기로 작업을 한 후 친구 한 명을 서독으로 탈출시켜 슈피겔지에 투고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비즐러는 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묵인한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 이 두 타인의 삶은 비즐러의 삶 속으로 들어와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본래 비즐러가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비즐러가 그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착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인간' 이 되어 간다.

동독정부는 슈피겔에 실린 글의 필자가 드라이만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더욱 옥죄기 위해 약물 중독 혐의가 있는 크리스타를 잡아 들인다. 결국 크리스타는 배우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에 타자기를 숨겨둔 곳을 말하고 만다. 하지만 비밀 경찰은 드라이만의 집에서 타자기를 찾지 못한다.  본래 타자기가 숨겨져 있어야 할 곳을 비밀경찰이 뒤지자 드라이만은 순간 크리스타를 바라보는데 그 길로 크리스타는 길거리로 나아가 달려드는 차에 뛰어 들어 자살을 한다.

모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비즐러는 한직으로 좌천되고 그곳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의 소식을 듣는다. 통일 후 드라이만은 우연히 만난 문화부 장관 헴프로부터 도청에 관한 사실을 듣고 그제 서야 자신이 슈타지로부터 감시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수색 당시 늘 숨겨두던 곳에 타자기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드라이만을 보호(?)하고 있던 비즐러가 미리 숨겨 두었던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듬 해 이루어진 독일 통일 후 동독의 모든 자료는 공개된다. 드라이만은 문서 보관소에서 자신을 감시한 그러나 도와준 비즐러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얻는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크리스타의 일로 슬럼프에 빠져 있던 드라이만은 친구가 준 악보 제목인 '좋은 사람을 위한 소나타'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한다. 그리고 책 앞 부분에 비즐러의 암호명인 'HGW/XX7' 에게 헌정한다는 말을 쓴다.

비즐러는 서점 앞에서 드라이만의 신간을 발견하고 책을 구입한다. 서점 직원이 비즐러에게 묻는다. "선물하실 거에요?". 비즐러는 말한다. " 아니요. 나를 위한 겁니다.  (Nein,das ist fuer mich, No, this is for myself).

 

누가 정말 좋은 사람일까?

드라이만은 모든 사실을 알기 전까지 타자기를 숨겨준 위치를 정보기관에서 밀고한 것도 그리고 미리 그곳에서 타자기를 치운 것도 크리스타가 한 일로 알고 있었다. 미리 치워주기는 했지만 밀고한 사실만으로도 죄스러워 차에 뛰어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타자기를 치우지 않았다. 그러면 크리스타는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당연히 죄책감이 컸겠지만 그녀가 알고 있던 타자기 숨겨둔 곳인 마루 밑에서 타자기가 나오지 않았을 때 드라이만을 향해 이 남자가 나를 못 믿고 있다고 생각해서 모멸감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숨이 넘어가는 순간 달려온 비즐러를 보고 크리스타는 그를 비난한다. 죽기 직전에야 모든 것이 비즐러 소행이었음을 알게 된 것 같다.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한 크리스타는 좋은 여자는 아니었지만 불쌍한 여자다.

   
▲ 비즐러의 삶은 독일통일 이후 초라해졌다. 하지만 그의 삶의 수준에 상관없이 그는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셋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드라이만, 대부분의 영화 평론가들은 동독이라는 암울한 사회를 견뎌낸 지식인 드라이만에 주목한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일까?  오히려 그는 전형적인 비겁한 지식인에 가깝다. 사랑했던 여인이고 그를 배신한 일 때문에 죽음을 택한, 아니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애인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죽음을 택한 여인이다. 어느 연유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 수 없지만 죽음의 일차적 책임은 드라이만에게 있다. 죽어가는 크리스타를 안고 '미안하다'를 외쳤지만, 죽음 후 몇 해 동안 그 충격으로 슬럼프에 빠져 지냈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드라이만은 크리스타를 마음 속에서도 떠나 보낸다. 그는 자신의 책을 크리스타에게 헌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책의 제목의 모티브가 된 자살한 음악가 친구 예스카에게도 헌정하지 않는다. 그를 감시하면서도 지켜 주었고 마침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제공한 비즐러에게 헌정한다.

비즐러는 책임감이 투철한 정보요원이었지만 그 책임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아 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드라이만을 돕는다. 수 많은 사람을 감옥에 보낸 그이지만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는 순간 출세도 포기하고 마치 스스로 고행하듯 좌천된 장소에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성실히 일한다. 통일 후 드라이만은 책을 발견하고 이 책을 나를 위한 책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는 자신이 했던 일을 곱씹으면서 더욱 처절히 회개해야 한다. 행여 비즐러가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작가 하나를 키웠다는 오만에라도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바리새파를 위선자라고 부른 것도, 사도 바울이 죄와 은혜를 연결시켜 설명한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는 추악한 죄가 아니다. 그런 죄는 성서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단죄할 수 있고 이런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은혜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하는 자들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또한 바울이 문제삼은 죄는 죄 같지 않은 죄이다. 본인이 죄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죄이다. 비즐러가 그랬다. 그는 성실한 국가 공무원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타인의 삶을 엿보는 불법행위를 하면서 그는 도청보다 더 큰 죄, 즉 자신이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고백에 다가 간다.

 

서로 들여다 보는 삶

한국 정보 기관인 국정원의 도청 문제로 대한민국이 벌집 쑤신 듯하다. 한 직원의 자살이 있었고 적반하장 격으로 우리가 뭘 그리 잘못 했느냐는 '스파이'(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 표현)들의 전대미문의 항명이 있었다.

사실 정보전의 시대에 정보기관의 도청은 필요할 수도 있다. 도청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는 권세를 가지고 '적'에 대한 정보전이 아니라 내국인을 상대로 사찰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비난 받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호해야 할 내국인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기막힌 모양새다.  

비즐러는 도청을 통해 사람이 변했다. 분명 동독정부 하에서 '합법적'인 일을 하고 있었지만 진리와 '합법'이 다른 맥락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더 이상 자신이 진리를 위해 일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새정치 민주연합의 은수미 의원은 사회주의 노동자 연맹(사노맹) 사건으로 고문을 당했던 일을 회고하면서 그런 기관에 고문당한 사실이 부끄럽다고 페이스북에서 밝혔다. 은의원은 당시 걸린 결핵성 종양으로 소장과 대장 사이를 50㎝나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나를 한 달 가까이 고문하면서 그대들이 한 말 기억하는가? ‘간첩잡고 국제활동하기도 바쁜데 어쩌다 국내사람인 어린 너를 고문하는지, 더럽다’ ‘우리도 가슴이 덜컥 할 때가 있다. 언제인줄 아나?’ '길을 걷다 우연히 우리에게 고문당한 사람을 봤을 때다‘

나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서 불법적인 고문을 하지만, 고민도 하고 부끄러움도 알며 기개도 있다고 봤다. 나를 고문했던 3개조 21명. 서로를 별칭으로 부르던 그대들. 지금도 기억나는 별칭인 만두, 김과장은 (아직)재직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한번 대답해보라. 이것이 당신들의 본모습인가? (은수미의원 페이스북 내용 편집)

 

2015년에 엿듣는 이들이여! 엿들었으면 최소한 피감청자들의 삶이라도 본받기를 바란다. 역설이지만 엿들어도 본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국가에 위험인물이 아닐 것이다. 셀폰이든 인터넷이든 저쪽 편에서 들리는 이야기들은 정보원들이 살아온 삶과는 전혀 다른 내러티브다. 그 균열에서 오는 잔여가 그들을 회개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첨단 장비 없이도 우리는 노출된 세상을 살고 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드라이만은 차를 타고 비즐러의 뒤를 좇아간다. 감시당하던 자가 이제 감시하는 자가 되는 장면처럼 우리는 좋든 싫든 타인의 삶에 개입되어 살아간다. 타인의 삶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우치는 지혜에 도달한다. 이처럼 타인의 삶이 반면교사를 넘어 텍스트로 나에게 작동할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리의 방편으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M/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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