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이 된 맨발의 성자 이세종
문화유산이 된 맨발의 성자 이세종
  • 김기대
  • 승인 2015.09.04 01: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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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언론 작은 뉴스에서 한국 교회의 길을 찾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 달 24일 경 광주 전남 지역 지방 언론을 중심으로 작은 기사가 하나 떴다. 전남 화순 출신으로 일제하 기독교 토착신앙의 실천가였던 이세종(1879~1944)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화순군은 최근 도암면 등광리 선생의 생가에서 '성자 이세종 생가 복원사업' 준공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기독교 동광원 수도회와 이세종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문화재예방관리센터가 주관했다. 기념사업회와 주민들이 비용을 대고 전라남도와 문화재예방관리센터의 재능기부로 진행됐다.

문화재예방관리센터에 따르면 이세종 선생의 생가와 광주 양림동 선교유적 등을 잇는 한국기독교 영성 신앙 순례코스 개발도 추진할 계획이다. 한국 교회가 사회의 골치거리가 된 현실에서 지방 자치 단체가 이세종 선생의 생가를 문화 사업으로 인정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지하철 역 입구의 방향이나 역 이름까지 개입하는 교회의 횡포가 아니라 어떤 교단이나 대형교회도 개입하지 않은(더 정확히 말하면 관심 조차 없는) 생가 복원이 지역주민과 지자체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그곳을 순례 코스로 개발한다는 뉴스는 한국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지방 언론의 구석 작은 뉴스가 아니라 한국 교회사의 큰 사건으로 불릴 만 하다.  

이세종은 누구인가?    

1880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에서 태어난 이세종은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머슴살이를 하면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오직 일밖에 몰랐기에 상당한 재산도 축적했다고 한다.  그의 성실성을 눈 여겨 본 주인은 자신의 딸을 주어 사위 삼을 정도였고, 수전노처럼 돈을 모으던 이세종은 쌀 한 톨을 나눠 먹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큰 돈은 벌었지만 주인집 딸이었던 아내 순희와의 사이에서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그는 아이를 '점지'받기 위해 무당의 지시에 따라 산당을 짓게 된다. 돈도 있고, 아이도 간절한 터라 산당도 매우 큰 규모로 계획했다고 한다. 이때 산당 건축을 맡은 목수가 혼잣말을 하는 것을 이세종은 듣게 된다.

"이렇게 공들여 지으려면 예배당이나 짓지, 이게 뭐하는 것이다냐?" 이 말에 이세종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40살 되던 해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노라복(Robert Knox)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세계관이 바뀌게 된다. 이후 그는 이름을 이공(李空)이라고 고친 뒤 비움의 영성을 실천한다.

   
▲ 이세종 선생 생가 복구 준공식. 화순군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예수를 믿게 된 이공은 원 없이 먹어 보던 것이 소원이던 머슴살이 시절의 음식으로 다시 돌아갔다. 부자가 되어 먹게 된 육식을 비롯한 산해 진미를 멀리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아내와 금욕생활에 들어가고 아내는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묵묵히 아내를 데려 왔다고 한다. 자신의 영적 실천을 위해 아내를 등한히 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많으나 이런 일 때문에 한국의 호세아로 불리게 된다.

이공은 스스로 성경을 익혀 자기 영성의 세계를 구축하고 이현필 강순행 목사 등 호남의 대표적 영성가들을 제자로 키워 화순의 성자, 맨발의 성자로 불리게 된다. '화순의 성자'란 호칭은1930년대 박형룡, 김재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 목사가 이세종을 만나본 뒤 <새사람>이란 잡지에서 ‘화순의 성자’라고 평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공의 제자 이현필은 광주와 무등산 일대에서 한국 전쟁 뒤 고아들과 폐병 환자들을 돌봤다. 등광원은 이현필이 설립한 개신교 수도 공동체로 수도자들의 자녀와 고아들을 구분하지 않고 키운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음식물을 남기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하루에 밥 한 끼씩은 더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 모았다.

2012년 12월 26일 한겨레 신문 인터넷 판에서 조현 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현필의 제자로서 병든 스승을 업고 다니면서 탁발하는 삶을 살다가 스승이 별세한 뒤 평생 이세종의 생가 마을에서 독신 수도자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한영우(83)씨는 “이현필은 동광원에 들어간 사람에게 가장 먼저 다 떨어진 옷과 깡통을 던져주어 걸인 차림으로 탁발을 하게 했다”며 “탐욕만이 넘친 지금이야말로 탁발 정신이 절실해진다”고 말했다.

이세종에 대한 자료는 엄두섭이 지은 <호세아를 닮은 성자>(은성, 1993년)가 거의 유일했다. 그러다가 지난 2011년 KIATS(한국고등신학연구원)가 펴낸 <이세종의 명상 100가지>가 나왔다. 고등신학연구원은 최근 한국의 영성가 발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고등'의 신학을 연구하는 유수의 신학자들이 삶으로 신앙을 보여준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인상적이다.

비움의 영성이 아니라 채움의 천박함이 영성으로 둔갑하고 있는 한국 교계 현실에서 이세종의 삶이 신학적으로 조망되고, 또한 교회를 넘어 사회 문화적 가치로 인정받게 된 사실이 사회에서 힘 자랑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대형교회와 비교되어 신선하게 다가 온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M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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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2015-09-08 11:23:39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기억하게 해주는 참 감동적인 기사입니다.
더불어 한국 기독교 역사는 짧지만 복음의 사람들의 삶은 참 강력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보배이며 하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