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서 보낸 하루
세탁소에서 보낸 하루
  • 박지호
  • 승인 2015.09.08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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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도 교인들의 삶의 현장서 함께 일하며 몸으로 깨쳤으면
노동절(Labor Day)을 맞아 본지 편집장이었던 박지호 기자의 세탁소 현장 체험기를 다시 올립니다 - 편집주 주

 

   
▲ 세탁소에서 보낸 하루. 반복되는 일상의 고단함과 한푼 두푼 땀 흘려 벌고 모아 드리는 헌금의 소중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박지호)

먼 미국 땅에 와서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한인들의 삶을 몸으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반복되는 일상의 고단함이 어떠한지, 한푼 두푼 땀 흘려 벌고 모은 돈을 어떤 마음으로 헌금하는지, 그 돈이 엉뚱한 곳에 헛되이 낭비될 때 그 심정이 어떨지.

아는 분을 통해 소개받은 세탁소를 찾아가서 사장님께 경험 삼아 하루만 일해 보고 싶다고 부탁했다. 처음엔 “뭘 경험할 게 있겠느냐”고 하더니 “정 그렇다면 한번 해보라”며 넉넉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아침 9시에 세탁소에 도착했는데 사장님은 7시부터 분주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사모님이 앉으라고 의자를 내준다. 사장님은 동분서주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장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무슨 일이든지 시켜 달라”고 했더니, “그냥 구경만 하고 가세요” 한다. 그럴 법도 하다. 세탁일이라곤 군대 있을 때 전투복을 다려본 게 전부인데 뭘 얼마나 도울 수 있겠나.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딩동.’ 손님 오는 소리다. “Hi, how are you?” 사장님이 반갑게 손님을 맞는다. 손님은 바지 두 벌과 상의 세 벌을 맡기고 돌아갔다. 옷을 받아들고 주머니부터 뒤졌다. 손님이 맡긴 옷에 혹시 다른 물건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가끔 볼펜 같은 것들이 세탁기에 함께 들어가면 다른 세탁물까지 모조리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세탁소에서 쓰는 번호표는 세탁을 하고 난 뒤에도 종이가 찢어지거나 해지지 않도록 특수 처리가 된 종이다. 일반 종이보다 비싸기 때문에 사장님은 번호표가 꼬깃꼬깃해질 때까지 재활용한다. 통에 담겨 있는(아래) 종이들이 재활용한 번호표들이다. (박지호)

주머니를 확인하고 나면 번호표를 붙이는 작업이 이어진다. 사장님이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번호표를 옷에 붙였다. 그런데 사장님은 옆에 있는 통을 뒤적이더니 꼬깃꼬깃 구겨진 번호표를 꺼냈다. “이게 다 돈이예요. 세탁소는 아끼는 만큼 버는 거지” 하며 웃는다. 세탁소에서 쓰는 번호표는 세탁을 하고 난 뒤에도 종이가 찢어지거나 해지지 않도록 특수 처리가 된 종이다. 일반 종이보다 비싸기 때문에 번호표도 최대한 재활용한다.

그러고 보니 세탁소에 들어섰을 때 카운터만 환하고 가게 뒤 쪽은 컴컴했는데,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서다. 스팀 보일러도 아무 때나 돌리지 않는다. 작업 시간을 고려해 최대한 짧게 가동한다. 만만찮은 연료비 때문이다. 세탁용 솔벤트인 ‘퍽’이라는 용액도 마찬가지다. 새로 구입한 용액은 흰 옷을 세탁할 때만 쓴다. 검정 옷을 세탁할 때는 썼던 용액을 재활용한다. 사장님 내외는 점심도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50대 초반인 사장님은 한국에서 일류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소기업을 경영했었다. 5년 전 회사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왔다. 자녀들을 미국에 보내놓곤 이산가족처럼 지내느니 어렵더라도 함께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후회는 없다.

그래도 한때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사장님인데 가끔 힘들 때가 있지 않냐고 물었다. 그런 맘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생각하기 나름이고, 지금이 오히려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쉴 틈 없이 빡빡한 스케줄에다, 접대하고 접대 받느라 밤늦게 들어오기 일쑤고, 주말에는 골프 약속까지 있어서 가족들 얼굴도 제대로 보기 힘들다. 그래도 지금은 정해진 시간만 열심히 일하면 되고 주말도 쉴 수 있으니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오히려 행복하다고 했다.

세탁일이라는 게 하나부터 열까지 몸을 써야 하는 일이기에 힘들지만 일한 만큼 벌 수 있어 좋고, 수입이 일정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사모님의 권유로 사장님은 최근에 들어서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모태신앙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바빠서 못 나갔고, 미국 와서는 이민 교회들의 좋지 않은 모습에 실망해 교회를 떠났다가 근래 다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 스파팅 작업 중인 사장님. 약품과 옷 먼지로 인한 알레르기 때문에 연신 콧물을 훌쩍이셨다. (박지호)

짧은 점심시간 후엔 스파팅(spotting) 작업에 들어갔다. 일종의 초벌 작업에 해당하는데, 옷에 묻은 얼룩이나 찌든 때를 세탁 전에 미리 제거하는 일이다.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세탁소의 실력은 얼마나 스파팅을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 손님이 빼달라고 한 얼룩은 기필코 제거해야 한다. 
 
한 손님은 커피를 쏟은 모양이다. 여기 저기 얼룩이 심하게 묻어 있었다. 커피는 그나마 양반이다. 심한 경우 대변이 잔뜩 묻어 있는 옷을 맡기는 손님도 있단다. 사장님은 우선 옷의 재질부터 유심히 살폈다. 옷감의 종류와 얼룩의 종류를 확인한 다음 그에 맞는 약품을 뿌려야 한다. 민감한 재질의 옷에 독한 약품을 뿌렸다간 구멍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파팅 작업은 아무한테나 못 맡긴다.

그런데 사장님이 아까부터 연신 재채기를 해대며 콧물을 훌쩍인다. 약품과 옷 먼지로 인한 알레르기 때문이다. 직업병이라며 웃으신다. 손가락 끝은 화학약품 때문에 일찌감치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옷에 얼룩을 제거하면서 중간 중간 오른손을 매만졌다. 언제부턴가 손이 저리단다. 스파팅 작업을 하면서 힘들여 솔질을 하다 보니 근육에 무리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사장님 팔뚝에는 흉터가 많다. 무슨 흉터냐고 물었더니 다림질 판과 호스들을 가리킨다. 다림질을 하다가 덴 자국들이다.

   
▲ 사장님 팔뚝에는 흉터가 많다. 무슨 흉터냐고 물었더니 다림질 판과 호스들을 가리킨다. 다림질을 하다가 덴 자국들이다. (박지호)

스파팅을 끝내고 세탁기로 옷을 가져갔다. 집채만 한 세탁기 안에 옷을 집어넣었다. 강한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드라이클리닝을 할 때 쓰는 퍽이라는 용액 냄새다. 장시간 노출되면 몸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세탁기 앞에 유리문을 설치한 이유다. 사장님은 세탁기에 옷을 집어넣을 때는 숨을 참으라며 주의사항을 일러줬지만 이미 한껏 들이마신 뒤였다.
 
세탁이 끝나고 다림질 작업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면 구겨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어느새 작업실 내는 스팀 보일러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사장님은 다림질 작업을 앞두고 일찌감치 반팔로 갈아입으셨다. 사장님은 나를 위해서 특별히 환풍기를 돌려주셨다. 조금 살 만했다. 하지만 여름에는 환풍기는커녕 에어컨도 소용이 없단다.
 
사장님은 옷만 봐도 그 사람의 경제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옷의 깨끗한 정도는 경제 수준에 비례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옷일수록 더럽다. 부자들이 두 번 세탁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한 번밖에 못하니까 그렇고, 부자들은 주로 사무실에서 앉아서 일하니까 옷을 더럽힐 일이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밖에서 몸을 쓰는 일을 하다 보니 옷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맡긴 옷은 손이 더 많이 간다. 일주일에 몇 번씩 옷을 맡기는 부유층이 주 수입원이지만, 그래도 가난한 이들의 옷에 더 맘이 쓰인다. 우체부 크리스(가명)는 세탁비를 아끼려고 세탁은 집에서 하고 수선만 맡겼지만, 사장님은 고생하는 크리스를 위해 서비스로 다림질까지 해줬다.

   
▲ 다림질에 도전했다. 옷 놓고, 뚜껑 덮고, 스팀 쐬면 될 거 같은데, 맘처럼 쉽지 않다. (박지호)

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4시가 넘었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뻐근하다. 이제 정리만 하면 된다며 사장님이 퇴근하라고 한다. 시원한 냉수 한 잔 들이켜고 사장님께 인사하고 가게를 나섰다.

하루 잠깐 일한 것으로 그들의 삶을 제대로 알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세상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고 오만한 자세일 것이다. 돈을 절약하고, 시간을 아끼고, 열악한 환경을 감당하고, 때로는 손님에게 욕도 얻어먹고, 그런 일상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일까. 고단한 육체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안식일은 어떤 의미일까. 이들에게 필요한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 때로는 목사들도 이들과 함께 육체노동을 하면서 이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교회, 주일, 말씀이 무엇인지 몸으로 깨우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박지호 기자 / <미주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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