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원로 교육자의 기도 인생
어느 원로 교육자의 기도 인생
  • 전성은
  • 승인 2015.09.22 10:42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 신앙스토리

'생애 최초의 기도 응답'

중학생 때였다. 아버지가 새로 나온 영어사전을 생일 선물로 사주셨다. 우리나라에서 중고등학생용으로 처음 출판된 사전이었다. 당연히 학교에 가지고 갔다. 그런데 한 친구가 지나가다 그 사전을 보고는 덥석 집어들고 좀 빌려달라고 하면서 들고 가버렸다. 그 친구는 주먹이 세서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였다. 누구 물건이든지 자기가 갖고 싶으면 빌려달라고 하면서 갖고 가서는 돌려주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날 학교가 끝나도록 그 사전을 돌려받지 못한 채 집에 와야 했다. 

아버지가 난생 처음으로 생일 선물로 사주신 사전을 그렇게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그 녀석하고 맞붙어 싸우든지, 담임선생님에게 일러바치든지 해야 했다. 그 친구는 학교에서 주먹을 쓰는 써클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싸움은 일대일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담임선생님에게 일러바쳐 사전을 되찾는다 해도 그 후에 일어날 일이 더 큰 문제였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사전을 되찾아야 했다. 

다음날 새벽, 나는 난생 처음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어머니는 늘 새벽기도회를 다니시는 분이셨다. 새벽기도회 중에 하나님께 꼭 사전을 찾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뒤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담임선생님에게 일러바치는 대신 맞붙어 싸우는 쪽으로 결정했다. 뒷일은 그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교실에 들어서서 책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 녀석이 지나가면서 사전을 내 책상에 턱 던져놓고 가는 게 아닌가. 

그렇다. 이것이 내가 생애 최초로 기도 응답을 받은 체험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엎드려 기도하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 엎드려 기도하는 습관을 훈련받으며 자랐다. 지금도 그 습관은 여전하다. 그 일 이후로는 더 열심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고 잠들기 전에 기도드리는 일을 계속해 왔다. 내 자녀들에게 그 습관을 훈련시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고3 때의 기도와 인생 행로'

고3이 되었을 때 일이다. 4·19혁명이 일어나 학교는 휴교 중이었고,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와 보니 아버지가 올라와 계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워계셔서 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시자마자 경남 거창으로 내려가 거창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일하고 계시던 터였다. 할머니가 거창에서 아버지의 교직생활 뒷바라지를 하셨고,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던 누나와 나를 건사하느라 서울에 계셔야 했다. 오후 공부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집에 왔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낮에 본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계셨다.

다음날 아침에도 아버지는 꿈쩍도 않은 채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계셨기에, 인사도 못드리고 도서관을 가야 했다. 물론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았다고 했다. 나로선 아버지가 학교에서 무슨 마음 상하신 일이 있구나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이러기를 사흘째,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저녁 먹으러 집에 오니 거창에서 권수원이라는 학생회장과 하중조 두 학생이 올라와 자기들이 잘못했으니 용서하시고 함께 돌아가시자고 빌고 있었다. 아버지는 두 학생을 일으켜 앉히고 함께 기도를 하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나에게 두 학생이 이왕 왔으니 서울 구경을 시켜주라고 하셨다. 나는 권수원과 하중조 두 학생을 데리고 서울 구경을 시켜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날 밤 10시 기차로 두 학생을 태워 보내고 나서 나는 교회로 갔다. 당시 나는 필동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군대용 천막을 치고 바닥은 가마니를 깐 천막교회였다. 강대상 옆 풍금 뒤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밤이 맟도록 기도했다. 아버지가 지방의 고등학교에서 교육에 매진하시는데 정작 아들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게 아버지에게 도움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고 다시 밤에 교회에 가서 밤새 기도를 했다. 그러기를 사흘째 되던 날 새벽, 내가 거창으로 내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곧장 학교로 갔다. 담임선생님이 계시지 않아 고1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거창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어느 선생님보다도 고1 때 담임선생님을 제일 존경하고 또 선생님도 나를 참 이쁘게 보아주셨던 터라 염치없는 부탁을 드렸다. 밤 10시 차로 내려갈 터이니 죄송하지만 전학 서류를 만들어서 거창고등학교로 보내 주십사고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은 이유도 묻지 않고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집에 오니 마침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다. 두 분께 오늘 밤 아버지와 함께 거창으로 가겠으니 아무 말씀 하시지 말아달라고, 어머니께는 친한 친구 넷을 초대할 터이니 만둣국을 끓여달라고 부탁드렸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만둣국은 내가 일평생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내가 삼일 동안 밤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온 것을 아시는 터라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1960년 6월 1일, 나는 서울에서 거창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해 12월 5일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3일 동안의 학교 신앙집회에 원경선 이사장님이 오셔서 로마서를 강해해주셨다. 당시 우리는 선교사들이 썼던 창고를 교실로 쓰고 있었는데, 삼면이 창호지를 바른 창인데 창호지는 모두 비바람에 찢겨지고 없었다. 완전 삼면이 탁 트인 교실. 천장은 군데군데 헐어 구멍이 나 있었다. 이사장님은 검정색으로 염색한, 군대에서 흘러나온 돗바라는 두터운 외투를 입고 강의를 하셨다. 우리는 북쪽 벽에서 쳐드는 눈보라와 천장 이곳저곳 구멍을 통해 날아 들어오는 눈송이들을 피해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이사장님의 로마서 강해를 들었다. 

3일 동안 이사장님의 강해를 들으면서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나마자 기도 시간을 가졌다. 그 3일간의 성경 강해와 새벽기도를 통해 내게 한 가지 중요한 확신이 찾아왔다. 농과대학에 가서 농민들을 잘 살게 하는 방법을 공부하여 거창고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농사 짓는 교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이라는 확신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기로 결심하다'

1970년 아버지 전영창 교장선생님이 교장직에서 파면을 당했다. 당시 나는 대학에서 농경제학을 전공하고 거창고등학교로 내려와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파면당하신 이유인즉 이렇다. 한 해 전 거창고등학교 학생들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전국 고등학교 가운데 유일하게 데모를 한 것이었다. 그 데모를 주도한 주모자 열 명을 퇴학시키라는 도교육청의 지시가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이를 단호히 거부하시자 교육청에서 파면시킨 것이었다. 아버지가 파면당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결심했다. 예수를 안 믿기로.
 
물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믿었다. 내가 예수를 버리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보기에 우리 아버지처럼 철저하게 예수님 한 분만 사랑하고 살아오신 분이 없는데, 평생 고생과 억울한 일만 당하시다가 마지막에는 파면까지 당하신 것이다. 이처럼 일편단심의 신앙인조차 지켜주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는 게 현명하다 싶었다. 당신밖에 모르는 철두철미한 예수의 제자를 지켜주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다가는 큰일 날 게 뻔했다. 더구나 내 신앙은 아버지의 반의 반도 못 따라가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하나님, 미안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도 않고 당신 아들이 저 대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 것도 압니다. 그렇지만 죄송합니다. 이젠 그만 헤어져야 되겠습니다. 당신밖에 모르고 살아온 우리 아버지를 지켜주시지 않는 당신을 저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뒤로는 주일이 되어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주말에 집에 못 가는 학생들과 안 믿는 가정의 학생들을 데리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주일 오후에는 학생들과 함께 교회가 없는 마을에 가서 주일학교를 인도하는 것이 거창고등학교 교회가 하는 일이었다. 그 모든 일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해가 끝나가는 12월을 맞았다. 당시 거창고등학교는 12월이 되면 신입생을 모집하는 일이 제일 큰 일이었다. 

거창은 유림(儒林)이 강한 지역으로, 유림이 세운 중고등학교가 다섯 개나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기독교학교인 거창고등학교는 신입생 모집에 애를 먹던 시절이었다. 거기에 영호남의 감정대립이 심한 곳이 거창이다. 거창읍의 거열산은 백제와 신라를 가르는 산으로 수백 년 동안 산 서쪽은 백제였고 동쪽은 신라였다. 거열산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신라는 전투가 끊일 날이 드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백제가 강하면 거창은 백제의 지배를 받았고, 신라가 강하면 신라의 지배 아래 놓였다. 주인이 얼마나 여러 번 바뀌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거창은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역사적으로 오래 뿌리를 내린 곳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영창 교장은 기독교인에다 산 너머 무주가 고향인 전라도 사람이었다. 그러니 거창고등학교가 초기에 겪은 학생 모집의 어려움이 오죽 했겠는가. 그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년 12월이 되면 신입생 모집에 전력을 기울여야 정원(당시 120명)을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 12월이 되면 첫 일주일 동안은 선생님들이 새벽 다섯 시 반에 기도회로 모여 신입생 모집을 도와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아무것도 아뢰지 못한 기도회'

그해 연말 신입생 모집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 날이었다.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성은아, 아들이 안 나오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선생님들보고 새벽기도회에 나오라고 권하겠니? 내일부터 새벽기도회에 나오너라.” 

여전히 파면당한 중에 있던 백발의 아버지가 교회 나오기를 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교장실을 나왔다.    
   
당시 나는 인근 농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농장에는 트럭이 한 대 있었는데, 겨울철 새벽에는 시동이 잘 안 걸렸다. 그때만 해도 시동이 안 걸리면 크랭크를 넣고 손으로 엔진을 돌려 시동을 걸던 시절이었다. 나는 다음날 새벽기도회 참석을 위해 트럭을 농장 안 비탈진 오르막에 세워두었다. 이튿날 새벽, 트럭의 앞 유리창에 낀 성에를 긁어내고 기어를 1단에 넣은 다음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트럭이 비탈을 내려가게 해서 역회전을 시켜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시동을 걸고 농장을 나서는데 나도 모르게 찬송가가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물가지고 날 씻든지/ 불 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

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농장에서 학교까지는 약 3.5킬로미터로 길이 좁고 험한 내리막 길이었는데, 자칫하면 길 옆 논으로 빠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 길은 트럭이 다니기에는 좁고 가파랐다. 그 길을 울면서 찬송을 부르며 가다 보니 어느새 학교 마당이었다. 지금도 어떻게 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교장실엔 톱밥 난로가 따뜻하게 지펴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성경을 읽고 간단히 설교를 하셨다. 설교를 마치신 아버지가 ‘전 선생,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세요’ 하시며 나에게 기도를 시키셨다. 나는 기도를 시작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아버지….”

그게 다였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음을 참고 있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아멘!” 하고 말았다. 다음 날 새벽엔 교장선생님이 도재원 선생에게 대표기도를 시키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재원 선생도 “하나님 아버지…” 하고 운을 뗐으나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울음을 참고 있던 도재원 선생도 “아멘!” 하고 기도를 끝맺었다. 그 다음날은 나성순 선생님이 그러했다. 그해 1970년 12월 초, 신입생 모집을 위한 새벽기도회는 그렇게 하나님께 아무 말도 못한 채 끝이 났다.    

'원치 않게 하게 된 금식기도'

1986년 가을, 교육부가 YMCA중등교사협의회 회원 교사 100여 명을 해임한 일이 있었다. 경상남도교육청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학교의 교사 가운데 YMCA중등교사협의회 회원 교사들을 해임하라고 지시했다. 나와 이사회는 YMCA가 불법단체가 아닌데 YMCA중등교사협의회 소속 회원을 해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 회원교사들이 교육법을 어긴 일도 없으며 교사로서 교육 업무를 소홀히 한 일도 없는데 단순히 YMCA중등교사협의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해임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거창 교육청 교육감이 찾아와 설득하고 도교육청에서 장학사들을 보내서 나를 설득했다. 지금도 한 장학사가 한 말이 기억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고, 선생 한 둘 보호하려다가 학교 문 닫아도 되겠냐?”고.

학교를 염려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교사를 빈대에 비유하던 그 장학사의 말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버티고 버티던 나는 그 장학사가 다녀간 다음 학교가 휴교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교감선생님에게 용추사가 있는 골짜기에 3일간 다녀오겠다고 얘기하고 짐을 꾸려 떠났다. 교감선생님은 내가 기도하러 가는 줄 알 뿐 아니라 어디에서 기도하는지 알고 계셨다. 

나는 원래 금식기도는 못한다. 먹어가면서 기도한다. 그래서 빵을 잔뜩 사가지고 갔다. 용추사 골짜기 냇가에 텐트를 치고 일단 잠부터 잤다. 하나님이 내가 왜 왔는지 아시는데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한 잠 자고 깨니 한밤중이었다. 김 모 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소주를 몇 병 사들고 찾아왔다. 소주를 한잔씩 나누고 둘은 돌아갔고, 나는 또 잠을 잤다. 기도는 그저 “하나님, 제가 왜 왔는지 아시지요?”가 다였다. 그렇게 3일을 자고 깨고 하는 가운데 내가 가져온 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금식기도를 하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을 잊어버린 탓에 금식기도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금식기도 아닌 금식기도를 하고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짐을 챙겼다.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배낭을 메고 산을 내려오면서 하나님께 투덜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언제 제 기도에 친절히 대답해 주신 일 있습니까? 물어보러 온 내가 바보지요.”

그렇게 투덜거리는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였다.

“야 이놈아! 내가 너 고3 때 필동교회 풍금 뒤에서 기도할 때 네가 거창 가는 게 내 뜻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니? 그때 내가 너 사랑한다고 말했잖니. 내가 널 사랑한다는 말은 한 번이면 족하지 않더냐. 내가 내 아들한테도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어.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을 때 아무 말도 안했어. 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한 번 하면 족한거야, 이놈아!”
(인간의 언어로는 이렇게 길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다, ‘음성을 들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쓴 것이지 실은 번개 같은 찰나의 깨달음이었다. 문자적인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산을 내려오니 검은색 교육청 지프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에서 내리는 교육감과 도교육청 과장을 대하는 나는 침착했고 마음은 평온했다.

'평생의 기도, 하루의 기도'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 ⓒ김승범

나는 평생 기도하며 살았다. 지금도 성경공부와 기도가 내 생활의 중요한 요소다. 학교와 나라와 민족과 인류와 기독교와 심지어 불교까지도 내 기도의 제목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님께 무얼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또 언제부터인가 자식들을 위한 기도도 잘 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즈음엔 나를 위한 기도를 좀 더 열심히 하자고 다짐한다. 나 자신을 돌아볼수록 너무 추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 마음 하나 잘 다스리지 못한다. 무엇보다 예수님처럼 사랑이 넘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래서인지 그 급하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 화도 덜 낸다. 아직 멀었지만. 

사실 나는 평생을 기도하며 살았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기도하라고 권면할 수가 없다. 젊을 때 기도에 관한 책도 더러 읽었지만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는지. 그런 법칙 같은 것이 있기는 있는 건지. 그저 내 기도생활을 통해 한마디 하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르겠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응답받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요구하고 응답받는 기도는 중학생 때(신앙의 초기 때)의 기도인 것 같습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요구하고 응답받기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아버지니까 이런 말 저런 말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 아닌가 해요.”

내 나이 일흔 둘, 나는 아직도 이런 기도를 드린다. 

오늘 아무개를 만나는데 화 안 내게 해주세요. 오늘도 예수님 얼굴에 먹칠 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전성은 / <복음과 상황>

본지 제휴, 무단 복제 및 배포 금지

전성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거창고 교사를 시작으로 2006년 교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1년간 지방 읍내의 학교에서 ‘지천명(知天命)의 교육’에 일생을 쏟았다. 샛별초등학교 교장, 샛별중학교 교장, 거창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참여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한 바 있다. 퇴직 후에도 교육 정책 및 교사 교육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으며,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 편집인으로 성경 번역에도 매진해왔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는 ‘교육론’ 3부작인 《왜 학교는 불행한가》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바두기 2015-12-29 06:50:26
감동입니다. 이런 글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atom 2015-12-31 06:40:55
전에 들은 적이 있지만 다시 들으니 참 좋은 신앙의 모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전 선생님은 힘을 가진 사람들을 무조건 '위에서 난 권세'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를 기준으로 부당한 권세의 요구에 대해서 용감하게 거부한 점이 돋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