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경동, 휴우~ 기장
아! 경동, 휴우~ 기장
  • 김기대
  • 승인 2015.10.20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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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일 목사 청빙을 보는 불편한 시선

한국 기독교장로회(기장)의 대표적(상징적) 교회인 경동교회가 차기 담임목사로 현재 한신대학교(한신대)총장인 채수일 교수를 결정했다.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청빙위원장 박재윤 장로는 “채 목사는 21세기형 에큐메니즘, 생명의 신학과 실천적 신앙을 가졌고 정통과 시류 사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는 목회자로 (경동교회에) 적합한 분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국민일보>는 1년 전부터 민주적인 청빙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채목사 청빙은 "목회세습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좋은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현 담임 박종화 목사는 국민일보와 관계된 국민문화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또한 채수일 총장은 현재 한신대가 안고 있는 구조조정 갈등국면에서도 빠질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목사를 청빙하는 교회들이 4~50대를 선호하는 것에 비해 올해 64살인 채목사(1952년생)를 청빙했다는 점은 참신할 수 있겠지만 임기가 남은 재직중인 총장을 데려간 것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의 창립자이자 경동교회의 창립자인 고 김재준 목사를 생각하면 '경동'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전후 맥락은 차치하고라도 해결해야 할 학내 문제가 산적한 상태에서 현직 총장 빼가기라는 비판이 일 듯 한데 의외로 기독교 언론들은 논평없이 사실만 보도하고 있다. 심지어 기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에큐메니안>은 채수일 목사 청빙 사실 조차 보도하지 않고 있다. <에큐메니안>의 무관심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동교회는1945년 성야고보전도교회로 시작했다. 장공 김재준이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47년 교회 이름을 경동으로 바꾸고 그 해 강원용이 장로로 장립 된다. 1949년 경기노회에서 안수받은 강원용이 시무 목사를 맡으면서 이름 그대로 강원용 시대가 열린다. 강원용은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 기독교 진보 담론을 생산하는 데 앞장 서고 수많은 진보 기독교 활동가들의 모판이 되어 준다. 강원용 시절의 경동은 박정희 정권의 눈의 가시로서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아 왔고 그 반대 급부로 진보적 지식인들이 교회에 많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등장에는 강원용 목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국보위에 참여했고 1984년 여의도에서 열린 대형집회의 주강사로 활동한다. 수만명이 운집한 한국 기독교 100주년 대회에서 강목사는 군부독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1986년 강원용 목사가 은퇴하면서 경동은 김호식 목사를 차기 담임목사로 청빙한다. 1961년 경동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한 후 1969년 부목사로 사임한 김호식은 1974년부터 향린 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었다. 향린교회는 신학자 안병무 박사, 장하구 장로(전 종로서적 사장)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평신도 교회였다. 따라서 김호식은 향린교회의 첫 전문 목회자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민중신학에 관심을 가져온 안병무 박사가 민중신학과는 거리가 먼 김호식 목사를 첫 담임목사로 데려온 데는 신학은 진보적이어도 목회는 전통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김호식의 부임은 경동으로서는 모험인 동시에 강원용 목사의 의중을 점쳐 볼 수 없는 결단이었다. 김호식은 향린에 있었지만 결코 진보가 아니었다. 1986년은 6월 항쟁이 일어나기 1년 전으로 군사정권의 서슬이 무서울 때였다. 시대를 읽는데 남달랐던 강원용 목사는 교회의 성격을 바꾸기를 원했던 것인가? 아니면 김호식 목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기를 원했던 것인가?  궁금한 부분이지만 아마도 안병무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교단이 내세우는 에큐메니칼 정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학연(한신대)강하기로 유명한 기장에서 김호식은 연세대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김호식 목사가 담임으로 재직하던 당시 강원용과 김호식의 갈등설이 교회 밖까지 들려 왔다. 노회의 압박도 심각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마침내 김호식은 5년 남짓 목회한 뒤에 1991년 교회를 사임하고 예닮교회를 개척해 나간다.  김호식은 예닮에서 은퇴하면서 보란 듯이 한신대 출신을 예닮의 후임 목사로 결정한다.

경동에서 부목사생활을 오래 했던 이동준 목사가 1992년 경동 담임으로 부임했고 그는 1999년 사임한 후 제주도로 내려 간다. 

1999년 담임이 된 박종화 목사는 한신대에서 10년 동안 교수를 했고, 기장 총무를 지냈다. 2005년 보도를 보면 당시 교인수는 900여명이라고 나와 있는데 채수일 목사 청빙 공동의회에 350명이 참석한 것을 보면 경동 교회의 교세 감소를 짐작할 수 있다.   

박종화 목사는 에큐메니칼 신학자 답게(?) 활동 범위를 전방위로 넓혀 나갔다. 국민 문화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 뿐 아니라 여러 곳에 얼굴을 내밀어 왔었다. 물론 WCC대회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외연확대를 위한 필요한 만남도 있었겠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박종화 목사가 '내빈'으로 참석한 것이 심심찮게 보도되곤 했다. 게다가 박종화 목사의 설교에서 경동 특유의 사회 비판적인 선포는 찾아 보기 어려웠고 대신 기계적 양비론만 가득했다. 이런 점 때문에 교회 안팎에서 '경동이 변했다'는 말도 흘러 나왔다.    

'나는 꼼수다' 진행자로 잘 알려진 김용민은 2012년 총선 패배 이후 첫 주일인 4월 15일, 경동교회의 인터넷 예배 생중계를 보다가 박종화 목사가 설교 도중 이번 총선의 꼴불견이라며 김용민이 속한 나꼼수와, 총선만 되면 기독교 이름을 걸고 떳다방식으로 출몰하는 아무개당(아마도 기독정당을 지칭하는 듯) 을 지목하는 것을 듣고는 실망했다고 한다. '나는 꼼수다'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나꼼수의 의미를 정체불명의 기독정당과 동일선상에서 놓고 비판하는 것이야 말로 전형적인 양비론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모두 위기지만 진보 교회는 진보교회대로 위기에 처해 있다. 그들의 신학적 담론은 교인들의 삶의 자리와 동떨어진 채 허공을 헤매고 있고, 교회 개혁 담론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번 청빙이 '민주적인 절차'였다고 하지만 정말 채수일 총장이 이력서를 제출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진보의 상징인 기장교단의 '투사'들은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한신의 학연은 여전히 넘기 어려운 벽이고(역대 경동 담임목사 중 비한신은 5년을 목회한 김호식 목사 뿐이다), 조선신학교 설립과정에서 나타난 '친일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교단 내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뒤 평양신학교는 9월 20일 개강을 무기 연기했다가 그 이후로 다시 개교하지 못하고 폐교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의 교육기관으로 더 이상 신학교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신학교 설립 신고는 1939년 5월에 총독부에 제출된다.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상태에서 목회자 양성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취지가 송창근이 쓴 학교 설립 취지에 나와 있지만 다음과 같은 부분도 있다.

 

더욱이 지금은 국가에서 동아의 신질서를 수립하고저 막대한 희생을 애끼지 아니하고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이때에 우리 교회에서도 자연히 신질서를 세우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일본(국가)이 막대한 희생을 하면서까지 이루려고 하는 새 질서의 협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이 정도 쯤이야' 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친일 청산이 안된 것은 모두 '이 정도 쯤이야'라는 온정주의 때문이다.

기장은 아깝다. 한국 교회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기 성찰에 힘써야 할 터인데 돌아가는 모양새는 그렇지 못하다.

경동교회 청빙위원장 박재윤 장로는“채 목사는 교회 갱신을 위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등 개혁성도 갖고 있다. 한신대에서 신학을 하고, 고 강원용 목사가 이끌었던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활동한 이력 등을 볼 때 경동교회와 잘 어울리는 분”이라고 설명했다고 <국민일보>는 보도한다. '한신대에서 신학을 하고', '강원용 목사' 등의 청빙 사유가 씁쓸하게 눈길을 끈다.

현직 대학 총장을 담임목사로 데려올 수 있는 힘을 가진 경동, 그것에 대해서 비판 한 마디 못하는  '진보 기장' 이것 두 개 말고는 남는 것이 없는 현실, 이것이 기장과 경동의 현 모습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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