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의 심장과 박근혜 리더십
'선한 목자'의 심장과 박근혜 리더십
  • 김회권
  • 승인 2015.10.26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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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가 바라본 박근혜

2012 대선의 영적 의미

모든 정치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교회에,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활동에 다 미칩니다. 월터 윙크(<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 지배체제 속의 악령들에 대한 분별과 저항>)나 마르바 던(<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의 책에도 나와 있듯이 정치는 놀랍게도 영들(靈)의 역사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치는 자신도 모르게 특정 가치나 이념, 특정 정신이나 덕을 주창하게 됩니다. 짐 윌리스가 잘 설파했듯이(The Soul of Politics) 정치는 영적 활동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에 의해 성령 수용적 정치가 될 수 있고 탐욕적 소유와 배타적 독점욕, 창조질서 파괴와 인간노예화를 옹호하는 악령의 정치로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정치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메시아적 정치가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며 특정 인종이나 이념의 극단적 실현을 위한 적그리스도적 정치가 있습니다. 전자는 사무엘하 8장 15절이 말하는 다윗의 공평과 정의의 정치이며, 후자는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으로 대표되는 정치입니다. 이 후자의 정치를 성경은 정사, 권세, 보좌, 주관(행 4:26; 고전 15:24; 엡 1:21; 3:10; 6:12; 골 1:16; 2:15; 벧전 3:33)이라고 부릅니다. 정사, 권세, 보좌, 주관은 하나님의 영토 안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반역자들의 집단입니다. 이들은 종말에 진압되어 소멸될 때까지 역사의 중간기, 심판 유예 기간 동안에 인간의 정치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거나 배척하게 만드는 활동을 합니다.
  
이 세상의 정치는 메시아적 정치와 적그리스도적 정치라는 양 극단의 어딘가에 서 있습니다. 세상의 정당들이나 정치집단들은 사회의 다수 대중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정권을 잡습니다. 이 세상의 정당정치는 근본적으로 지배계급이나 다수 대중의 정치적 이해를 충족시키는 데 투신되어 있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를 집행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나 서독의 칼 슈미트 수상 등도 산상수훈처럼 정치할 수는 없다고 강변합니다. 대체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민주당, 사회당, 노동당 계열의 정당들은 개인의 인권이나 평등 실현에 치중하지만 보수적 성도덕이나 가정 수호 등에는 무관심합니다. 공화당이나 보수당 계열의 정치는 도덕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진보적인 가치들을 실현하는 데 느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정치는 특정 정당을 통해 100% 배타적으로 대표하기보다는 각 정당의 개별적인 정책을 통해 구현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2012년 한국의 대선은 과거 군부독재 시절처럼 아주 노골적인 민주와 반민주, 심지어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결은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가 검찰 장악, 방송·언론 장악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아주 크게 후퇴시키긴 했으나 야만적인 군사독재시절로 회귀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바는 박근혜라는 인물이 이념적 상품 가치보다 훨씬 더 호소력 있는 슬로건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가 과거의 민주 대 반민주, 독재 타도 세력 대 독재 회귀 세력의 대결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박근혜 후보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민중에 의해 타도된 군사독재체제의 창시자였던 박정희와 그의 중심 행적인 5·16쿠데타, 그 이후 이어지는 18년의 파시스트적 통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느냐에 따라 금번 대선이 선악의 대결처럼 단순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젊은 인재들과 참신한 민주 이념과 정책들을 도입해서 새누리당의 기존 구태를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김종인 박사 등의 경제민주화 기치가 어느 정도 관철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나라신학으로 본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경제 성장과 번영을 위해 모든 국가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했습니다. “5000년 가난을 떨쳐 보자”며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민주주의 걸음마 단계를 걷고 있는 대한민국을 물질적 번영과 부의 추구라는 아젠다(agenda, 議題)를 내세워 강압적으로 경영했습니다. 무리하게 근대화를 추구하여 농경사회 중심의 한국을 중공업 수출 주도형 국가로 전환하려는 독재자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을 사로잡은 정신적 열망의 집약적 외화물이 바로 ‘박정희 시대’입니다. 박정희 시대는 경제적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인 민주주의, 인권, 정의와 평등, 자유와 안식권을 포기했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관치 금융으로 급성장한 몇몇 기업을 견고한 동맹 세력 삼아 급속한 수출 증대와 GDP 증대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유신 반대 민주주의 투쟁에 나선 민중의 열화 같은 저항에 의해 박정희와 유신체제는 일단 급정거하게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박정희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합니다. 인권, 민주주의, 안식권 등 인간 존엄을 희생시킨 대가로 성취한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종신 독재의 정당성을 획득하려고 발버둥치던 박정희는 비록 유신체제 내부의 붕괴로 생물학적 죽음을 당했지만, 그를 모방하는 엄청난 수의 복제 인간들을 남겨두었습니다. 누가 ‘박정희 복제 인간’입니까? 인간의 고귀한 자유를 희생시키고 정신적으로 퇴화한 인간들을 대량 생산해서 철권통치하려는 모든 단위의 지도자가 박정희입니다. 고귀한 가치를 포기하고 덜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폭력과 불법 등에 의지하는 모든 지도자가 박정희입니다.

유신체제의 박정희는 오늘날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다양한 층위의 박정희로 분산돼 있습니다. 박정희 이미지가 무노조 기업의 냉혹한 경영자이지만 돈 잘 버는 이건희,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국토·하천·생태 파괴자 이명박,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70여년 이상 파괴해 온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삼대 세습 독재자들,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 세습을 시도하는 교황 같은 개신교 목회자들, 노동자를 억압하고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는 악덕 기업주, 자녀를 공부하는 기계로 부리는 냉혹한 부모들, 자신의 권력과 직위로 부하들을 여러 가지로 괴롭히는 직장 상사들,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일삼는 가장들이 바로 박정희 복제 인간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인정하는 인격적 감수성과 영적 감수성이 크게 퇴화된 중생대 삼엽충 같은 하등동물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각 부분에서 “박정희 타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미분화된 박정희 반독재 투쟁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이런 박정희 복제현상이 박정희를 배척하고 민주화운동을 했던 소위 민주투사들을 비롯해서 모든 장삼이사(張三李四),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反)박정희 투쟁은 곧 자기 안에 내면화된 수단주의, 편법주의, 폭력과 권력의존주의 등과의 투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박정희 투쟁은 내 안에 솟아 있는 반하나님적인 욕망과의 투쟁인 것입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마음으로 김회권은 김회권 자신 안에 있는 기득권 집착(박정희)에 투쟁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쉽게 대하는 박정희는 한국교회의 악한 담임목사들이며 종교 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은 대개 부교역자들을 막노동자처럼 부리고 4대보험도 안 들어주는 것은 물론이요 아주 적은 월급으로 부려 먹습니다. 강단 설교를 통해 정당성 없는 긴급조치를 남발하면서 의로운 장로과 평신도들을 치리하고 추방합니다. 부목사를 학대하고 평신도들을 우롱하면서 교회 성장과 재정적 수입 확장을 추구합니다. 이런 목사들이 박정희의 매트릭스적 복제 인간인 셈입니다. 이런 목회자들은 망우리 근처에서 서식하고 있고 강남 일대, 대도시 주변에 군락을 형성해 번성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체제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다니엘서의 야수적 국가체제였습니다. 박정희체제는 인권을 박탈하고 인간의 자유와 양심의 권리를 짓밟은 아주 사악한 짐승국가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척결되어야 할 권력입니다. 우리는 1979년에 암살된 박정희를 반대하는 그 마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독재자적 근성, 권력 의존과 권력 중독, 타자 인권 유린에 상응하는 냉정함 등을 반대해야 합니다.
   
물론 박정희체제의 장점도 말해야 한다는 절충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박정희가 아니면 누가 이 5천 년 가난을 몰아냈겠느냐? 이것은 허무주의적 태도입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체제가 독재보다 훨씬 더 경제성장에 유리합니다. 독재는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체제를 심화합니다.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면 조국 근대화가 불가능했다고 혹은 북한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입니다. 박정희체제는 우리 온 국민이 저항해서 타도했던 파시스트적 독재 세력이었습니다. 대법원이 이미 밝혔듯이, 유신헌법의 모든 법률행위는 불법이었고 국민이 맡긴 주권에 대한 배신이었고, 공화국 주권의 찬탈 행위였습니다. 박정희 이후에 민주 정부 해 보니까 별 것 아니더라, ‘박정희 타도’를 외치던 김영삼, 김대중 별거 아니더라는 생각 때문에 지금 박정희 시대가 우호적으로 회고될지 몰라도 박정희체제는 전체적으로 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악이었습니다.
    
박정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집트의 파라오,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같은 전제군주입니다. 그는 하층민들과 노예들의 노동으로 국가, 체제, 제국을 건설한 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와 아합도 강력한 군사력으로 수출 활성화와 GDP 증대로 국부를 증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자유농민의 토지 경작권을 박탈하고 대지주 중심의 수출기업농을 장려했습니다. 이사야, 미가, 아모스 등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오므리-아합시대의 무리한 경제성장주의와 부국강병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주전 8세기에 위대한 예언자들이 일어나 왕실을 집중적으로 탄핵하게 된 것도 오므리-아합의 수출주도형 조방농업, 지주농업체제 때문이었습니다. 오므리-아합체제는 결국 엘리야-엘리사-예후-여호야다에 의해 붕괴되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과거와 화해하려면

박근혜 후보의 경우는 유신체제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살한 독재와 조국 근대화 둘 다를 역사에 남겨 준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우발적 요인 외에 다른 어떤 정치적 자산도 없었습니다. 다만 도덕적 부패로 보수 정당이 무너질 때마다 감성적 호소력으로 선거판을 보수 세력의 승리로 반전시킨 정치적 업적은 두 차례 이상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수 정당을 구출한 리더십이었지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한 공적 업적이나 기여는 아니었습니다. 보수 정당이 권력을 유지하도록 혹은 권력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보수 정당이 환골탈태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버린 셈이었습니다. 차떼기당은 선거에서 대패하여 다시 바닥에서 청렴과 겸손으로 내공을 쌓아 정권을 잡거나 다수당이 되어야 하는데 박근혜의 감성적 대중 정치로 갱신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박근혜는 권력에 민감한 사람이지 역사의 대의나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민감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박근혜는 박정희뿐 아니라 박정희 시대 18년 전체를 역사적으로 평가할 만한 사상적·학문적 역량을 닦을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공부를 하거나 스스로 독서를 해서 한국 현대사의 굴절과 파란만장한 굴곡의 역사를 일견할 수 있는 안목이나 통찰을 터득할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측근 중에 정직한 보수 사관을 갖고서라도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굴절과 전진의 역사를 과외 공부시켜 줄 모사나 스승도 없습니다. 최근까지 아버지 박정희와 공인 박정희에 대한 관계 정립도 하지 못했을 만큼 사고가 깊지 못합니다.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를 공적으로 평가하여 거리두기를 하고 쿠데타, 유신체제, 조국 근대화 과정의 인권유린 등을 포괄적으로 단죄하여 박정희 시대의 억울한 희생자들과 일괄 화해해야 합니다. 정수장학회, <부산일보> 등과의 관계도 완전 청산해야 합니다. 그것은 박정희가 권력으로 강탈한 일종의 장물이기에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박근혜가 정치인으로 거듭나려면 어두웠던 박정희 시대와의 창조적 결별을 하여야 합니다. 유신체제 및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등 박정희 시대의 모든 희생자들과 개인적인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두 사죄 선언과 그것을 입증하는 철저한 보상, 배상을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전태일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빈소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급한 마음으로 표를 얻기 위한 어떤 임기응변적 변통에도 호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3대 왕이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 때 북이스라엘 지파들을 강제로 부역을 시킨 실정을 반성하기는커녕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의 분노를 촉발하며 북이스라엘 열 지파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나오는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왕의 폭압적 정치를 청산하지 못하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연회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다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하나님의 심판 신탁을 받고 멸망당했습니다.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군주는 반드시 멸망당합니다.

국민 대통합을 논하기 위한 전제 조건

대선 후보 박근혜는 한국 현대사 공부를 철저하게 해서 박정희 시대 18년의 폭압적 독재정치 아래 파괴당한 모든 동포들의 얼에 사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피해자가 주도하는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박근혜는 대통합, 화해의 정치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장준하의 아들, 최종길 교수의 아들, 박종철의 아버지 등이 화해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진정성 있는 사죄를 통해 희생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한 목자의 심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한 대통합이나 화합은 정의와 진실의 터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박근혜 후보는 먼저 역사적 진실과 굴절 많은 현대사 속에 훼절된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가 일으킬 감동은 가슴 깊게 메아리치는 용서의 요청, 사죄 선언입니다. 박 후보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별세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기에 어쩌면 자신의 과거 행적 전체를 부정하여야 합니다. 여기 박근혜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와 육영수 여사에 대한 향수를 가진 노장층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는 그가 20~40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아버지 박정희 시대를 단죄하고 심판해야 합니다.

박근혜 후보는 지극히 정직해야 합니다.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행동과 말을 조화시켜 국민의 가슴에 미래를 위한 대통합과 화해의 에너지가 분출될 것이라는 믿음을 안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누리당의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차떼기당, 성범죄자 온상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낡은 정당과 관계를 청산하여 진정 국민 후보의 자리로 내려서야 합니다. 어떤 방송이나 언론, 정부기관의 직간접적인 선거 지원도 거부하여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금전적 지원도 거부하여야 합니다. 권력을 추구하지 말고 정의를 추구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국민을 감동시키는, 심지어 자신의 반대자마저도 감동시키는 정의감이나 공적 책임감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경제 관련 공약이나 간헐적인 경제 시사 논평은 우리 나라의 당면 과제인 양극화 해소를 성취할 수 있는 돌파력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에 가장 절실한 엘리트는, 정의와 자비가 최고의 경제적 효율성임을 믿고 기층 민중들을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선용하는 사상을 가진 학자들과 관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경제학과 경제민주화

박근혜 후보는 아직까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측근들과 자신의 지지기반이 되는, 무반성적 비도덕적 부유층들을 설복시킬 영감 넘치는 경륜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정책은 이한구, 최경환 등의 친재벌적인 계량주의 경제관 소유자들과 전통적인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구사하는 경제 관료들의 손에 다시 좌우될 것 같습니다. 김종인은 새누리당이나 박후보 캠프 내에서는 어떤 입지도 영토도 거점도 확보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언론을 발판 삼아 박 후보 주변에 모여드는 수구적 경제통들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 형국입니다.

박근혜의 미래 통합 한국 구상에는 가난한 자들을 나라 발전의 원천이자 토대로 받들려는 어떤 비전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문제는 노동량의 투입이나 일자리 문제가 아니라 경제 불의, 땅‧부동산 관련 불로소득의 엄청난 증대, 조세 정의의 불철저한 집행 등의 문제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경제성장도 멈추고 사회 전체는 활력을 잃게 됩니다. 한 나라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의 몸에 비유하자면 모세혈관과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경제는 멈춥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가난한 자들의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예언자들이 일어났습니다. 박근혜는 엘리야 같은 예언자의 형안으로 자신의 포도원을 빼앗긴 채 죽어간 이스라엘 자유농민 나봇들의 아우성에 구체적인 경제정책과 비전으로 가슴 깊이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태일도 방문할 수 있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도 가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주창하는 하나님 나라 경제학은 공동체에 소속할 자유와 그 터전을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들을 공동체 안에 묶어 놓는 것을 우선시하는 경제학입니다. 이것이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과 잠언서, 복음서,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공동체 경제학입니다. 성경 경제학의 대전제는 공동체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인 땅으로부터 오는 소출을 누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 다 자기 포도원과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사는 사회를 궁극적으로 지향했습니다(왕상 4:25). 어떤 가난한 사람도 땅의 소출로부터 영구적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신 15:7~11)가 경제와 반경제 사이 경계선의 지표석이었습니다. 특히 신명기 15장 11절의 “땅에서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고”라는 구절의 의미는 가난한 자가 땅으로부터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즉 땅의 소출을 향유하는 데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처럼 성경 경제학은 무한 성장 경제학이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과 공동 번영을 위한 경제학으로, 사회의 가장 연약한 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데 최대의 관심을 갖는 경제학입니다. 경제활동이 ‘인류문명사회’의 존속과 번영을 위한 윤리적·정치적 고려에서 완전히 일탈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는 사회, 즉 인간이 서로서로 의존하는 포용력 있고, 연대심 넘치는 통일체를 위한 부분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적 경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반(反)경제적인 무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기업의 횡포에 항상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대기업은 경제 발전의 향도(嚮導)요 견인차라고 칭송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반(反)경제활동에 연루된 적이 많았습니다. 천문학적 회계 부정, 탈세, 위법 및 불법 상속, 주가조작, 부동산 투기, 정경 유착, 노동자 학대, 천문학적 비자금 조성, 자본의 해외 은닉 등 숱한 범죄에 기업들이 깊이 연루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모집단인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에 기여하기보다는 자신이 홀로라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어찌하든지 시장의 바다에서 살아남으려고 하기에 최악의 불경기를 대비하는 마음으로, 고용 창출보다는 비자금을 통한 정치권·법조계·언론계 등에 로비를 하거나, 아니면 스위스나 영국 등의 해외 비밀은행 구좌에 예치했습니다.

고용 없는 성장의 결과, 대기업들은 계량화된 화폐 경제 기준으로는 엄청난 부를 창출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공동체의 모듬살이를 위협하는 실업 문제, 환경 파괴, 국제적인 자원 약탈, 국제적 빈부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거의 기여한 바 없습니다. 대기업들은 오히려 노동의 값어치를 쉼 없이 깎아내리는 반인간적인 체제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투입 대비 생산량으로 계측되는 생산성이라는 신화를 신봉하며, ‘평생 고용’을 통한 인건비 지출은 생산성을 위협하는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경제활동 자체를 인간의 삶을 위한 대의명분에 종속시키지 않는 한, 즉 경제가 아무런 규제 없이 자율적인 원리로 움직이는 ‘자율 왕국’의 영역으로 존속하는 한, 인류 공동체라는 ‘사회’는 치명상을 입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공동체의 붕괴를 보고서도 태연자약합니다. 기업의 경제활동은 공동체 전체의 생존과 평화로운 모듬살이에 기여해야 합니다. 경제(이코노미, 오이코노미아)는 집, 즉 생존 공동체 전체를 위한 살림살이이기 때문에 그 말 안에는 인류가 생존을 위해 취하는 긴밀한 상호적 계약 상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동체적 삶이 무너지는 것은 ‘경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간의 우애와 협동, 운명 공동체적인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경제활동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특정 기업이 순이익을 수조 원 남겼다면 그 혜택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여(分與)할 때 그것이 참된 생산성인 것입니다.

박근혜 후보는 2007년 당내 경선에서 줄푸세 정책을 내세움으로써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규제 완화에 여전히 관심을 보이고 재벌의 집중(금산분리정책 반대)이 우리나라 경제를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박 후보 캠프의 누리집에 나오는 ‘집 걱정 덜기 종합대책’ 1~3은 지극히 가슴이 없고 머리만 있는 경제 관료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양도소득세를 없애고 거래를 활성화하는 미세 조정 등 한두 가지 대책으로 얼어붙은 주택 건설 경기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거의 폭발 직전에 있는 사상 초유의 가계 대출, 이자 부담, 물가 상승,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 시장 동결, 교육비 증가 등 서민들의 가슴을 옥죄는 현실입니다. ‘희년함께’(구 성경적토지정의모임) 등이 제시하는 조세 정의의 일환으로 개발이익환수제 등을 실현하면 모세혈관까지 피가 공급되는 경제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각론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지 말고 총론을 선명하게 제시하여야 합니다. 참된 경제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모세혈관까지 피를 흐르게 만드는 몸 경제학을 도입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박근혜 후보의 경제정책이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새누리당의 경제적 권력 기반 자체에서 나옵니다. 재벌, 지주, 임대소득자 등 불한당 계급과 계층이 박 후보의 후원자가 되는 한 경제 정의 실현은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박근혜가 의로운 정책을 펴고 싶어도 새누리당이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에 대한 가슴 절절한 동정과 연대심이 없기에 김종인 박사를 아무리 내세워도 경제민주화는 힘들 것입니다. 이 점은 민주당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가들과 관료들은 상한 목자의 심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엘리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기 위해 사나흘씩 굶어가면서 예수님의 말씀 현장을 쫓아다니던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보고 민망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심장이 없습니다. 선한 정치는 선한 목자의 심장에서 나옵니다. 돈보다, 쾌락보다 정의와 자비를 더 사랑하는 정치가, 엘리트, 관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난한 자의 눈물을 보고 우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선량들이 국회의사당과 청와대에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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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 <복음과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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