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제네바 학살'에 대한 반박글'
칼뱅의 '제네바 학살'에 대한 반박글'
  • 권현익
  • 승인 2015.11.01 06:23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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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정통, 사역은 밥통(신성남)' 내용 중 칼뱅의 행적은 사실과 다르다

자금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위한 박근혜 정부의 열의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세계 모든 역사 학자들이 그의 선친이 쿠테타를 일으킨 독재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박 대통령의이 갖고 있는 역사에 대한 남다른 그 열정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김무성 대표는 자신의 선친에 대한 평가는 왜곡된 것으로, 친일파가 아니라 오히려 독립군에게 자금을 전해 주었던 애국지사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모든 역사 교과서는 좌편향되었기에 반드시 개편해야 한다는 굳센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분들은 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아닌 정상화라는 이름하에 자신들의 노력이 정당화 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재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듯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의 큼이나 권력과 언론을 동원한 프로파겐다(사상을 강요, 주입하기 위한 선전)로 만들어지거나 바꿔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오로지 사료로 말해지는 것이며, 그 사료의 정당성은 역사가들에게서 그 사실성과 적합성을 인정 받기 위하여 오랜 시간동안의 논쟁을 통하여 확정되어야만 비로소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김무성 대표가 아무리 자기 아버지는 애국지사였다고 침 뛰기며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사료가 없다면 그것은 ‘꽝’인 것입니다. ‘꽝’이란, 그의 주장들은 자신의 정치 행보를 위한 걸림돌들을 제거하기 위함 내지는 아버지를 향한 애뜻한 마음에서 나온 거룩한 사견일 수는 있어도, 북한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결단코 그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백보 양보해서 그의 선친이 독립군에게 자금을 넘겨주는 일이 은밀하게 이루어줘야 하는 일이기에, 아니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로 그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 혹 그것이 없다면 그것을 증명해 줄 정황이라도 있어야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에 관하여 비로서 논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지금부터 제가 서술하려는 역사 형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함입니다.

최근,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의 저자께서 본지에 올리신 <신학은 '정통', 사역은 ‘밥통'>이라는 글을 접하면서, 망가지고 찢겨진 한국 교회의 현재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교회의 회복을 위한 집사님의 간절한 절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사나 장로가 나서야 할 일을 집사직의 직분자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음에 더욱 가슴 아프게 동감을 하며, 현재 한국 교회의 작태는 분명 비판 받고도 남는 것임에도 동의를 합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를 향한 남다른 그 분의 사랑이 어떠하든 그 분이 언급한 역사 이야기가 그야말로 검정되지 않은 편향을 넘어 악의적 왜곡을 위한 글들을 근거로 서술되었다면 자칫, 교회를 향한 글쓴이의 열정이 애정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거룩성을 무너뜨리려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글을 접한 이후 곧바로 신성남 집사님께 메일로 게재한 글에 대한 저의 의견을 제시하였고, 집사님은 많은 부분에 동의를 하시면서 반박하는 형태의 글을 지면에 올리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제의를 하셔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로 글을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칼뱅(칼빈)에 대한 왜곡 역사가 비슷한 그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서술된 역사에 적합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는 그것을 서술한 사람의 객관적 시각인 것입니다.

프랑스사를 저술한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책 서론에서 “사가(史家)가 싫던 좋던 한편을 택해야 했던 논쟁거리를 다룬다고 할 때 감정과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아주 힘들지만… 그러한 것을 해 내는 것이 史家의 사명”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어떤 누군가 사실과 다르게 아니면, 나쁜 의도로 주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다면 그것은 역사 기록이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유신 독재와 친일파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현재의 국사책의 오류가 많으니 다른 국사책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자신들의 가정사를 국사책으로 만들어 놓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신성남 집사님께서 언급하신 “칼뱅이 수 십명의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6세기 그 당시의 역사 자료들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자료가 다음 세기로 넘어가면서 그 사실이 어떻게 변질되었다든가 아니면 그대로 역사 학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다든지 하는 사료의 변천사 역시 언급되어야만 그 주장이 옳바른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절차는 역사의 한 사건 내지는 한 사람을 단정, 정죄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칼뱅은 이미 죽어 없어졌지만 그의 명예는 산자처럼 여전히 보호 받아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 집사님의 논지 어디에서도 1차 자료는 커녕, 1차 자료를 다뤘던 2차 자료 역시 단 한 곳도 없을 뿐더러, 어느 누구나 인터넷을 뒤지면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찌라시(?)에 불과한 자료들을 마치 숨겨진 귀한 사료를 발견이라도 한 처럼 사용하였다는 것은, 한 인물을 살인자로 평가해야 하는 이 엄중한 역사적 작업에 있어 너무나 쉽게 다루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글쓴이께서 사료의 근거로 제시한 심상용, 조찬선 목사는 두 사람 모두 목사라는 직임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그들의 주장이 마치 사실일 것이라는 확신을 주게 되지만,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려는 학자 내지는 글 쓰는이로서는 저런 류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연구 내지는 검정을 거치지 않은 무책임한 가벼운 행동이라는 점입니다.

역사를 언급할 때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인용한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것은, 언급한 이 두 사람은 역사 학자도 아닐 뿐 더러 과연 이들은 최소한 역사 원서 한 권 정도라도 읽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편향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편향성은 오로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사람의 주장 하나만을 사실 확인 절차도 없이 그대로 옮겨다 놓은 앵무새의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니면 말고, 그 카더라’가 이제는 역사적 정설이 되어 버린 것이 현재의 실정입니다.

일본 도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신학대학, 이화여대, 목원대 교수, 전국 기독교학교 교목회장, 미국연합감리교 목사 등을 지낸 원로 신학자이자 목회자라고 소개되는 조찬선 목사의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은 저자 스스로가 밝히기를 순교자적 각오로 글을 썼다고 말하고 있지만, 칼뱅에 관한 부분만큼은 천주교의 쓰레기 자료들을 마치 자신이 어렵게 발굴한 귀한 사료인 것처럼 마구잡이로 갖고 와서 거기에다 자신의 저급한 상상력까지 동원하므로 기독교 역사 왜곡의 앞잡이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던 뿐 입니다.

조찬선 목사 뿐 아니라 최근 만나 교회 김병삼 목사 역시 설교 시간에 “칼뱅은 수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학살한 살인자”라고 힘주어 강조하였으며, 감리교 진영에서 발간되는 당당 뉴스에서도 검증되지 않는 이런 글들이 올려지는 것을 볼 때 이런 식의 역사 해석이 감리교 트랜드(경향)가 아닌가 하는 의심조차 들게 만듭니다.

조찬선 목사는 그의 책에서 “장로교 창시자 존 칼뱅은 사지절단 같은 가혹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며 생각이 다른 이들을 처참하게 탄압했다. 중세 마녀사냥은 여성에게 고문을 가해 스스로 마녀라고 허위자백하게 한 다음, 마귀와 간음한 죄의 대가라며 산 채로 불에 태워 죽게 했다."

그렇게 죽임 당한 단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언급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저자가 그 당시를 살지 않았기에, 이런 자료들을 과연 어디에서 갖고 왔으며, 어떤 학자들이 어떤 책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기에 이런 책은 사실을 언급한 역사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쥬네브의 중세 역사를 찾아 내기 위해, 수 도 없이 쥬네브 시내를 돌아 다니면서 과거 역사적 잘못에 대하여 인정하고 사과하는 팻말은 봤지만, 칼뱅 당시 세르베 사건을 제외하고 그 어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인 규정 및 인권 회복을 요구했던 그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세르베투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석은 유럽 곳곳에 세워졌고 그 현장을 찾아가 봤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이런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비석 하나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정상적인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 천주교 역사 학자의 책에서도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하여 언급되지 않음에도 도대체 이런 자료를 어디서 찾아 내었다는 것인지… 역사 학자들 모두가 칼뱅의 추종자들이라서 침묵하는 것일까요?

깔뱅에 대하여 작은 흠집을 하나라도 더 내야만, 자신 혹은 자기 교파가 칼뱅보다 더 진정성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이라도 한 듯 역사 날조 혹은 날조된 역사를 조 목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조찬선 목사가 칼뱅에 대한 ‘자기 증오’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반기독교인이 개신교를 공격하는 짓과 다를바 없는 무지를 근거로 한 어리석은 저술이었음을 이제 증명하겠습니다.

"(세르베는)…. 칼뱅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가 칼뱅에 의해 제네바 근교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칼뱅은 세르베투스가 산 채로 서서 참혹하게 불타 죽기까지 <다섯 시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칼에 의해 일 순간에 죽는 것도 아니고, 이글 이글 <서서히> 타는 불에 죽는 처참한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신앙의 잔악성은 그 어느 전쟁의 잔악성보다 수 백 배 더하다고 보아야 하고 <보복적 수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장로교는 문을 닫아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글의 출처는 1908년 뉴욕에서 출간된 <로마 가톨릭 백과 사전>에서 대부분을 그대로 빼껴오면서 아무런 인용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글인냥 서술해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천주교 백과 사전은 “깔뱅은 <세르베의 죽음>을 <주도>할 뿐 아니라 세르베가 죽는 그 현장에 친히 <참석>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즐겼다>”고 서술하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기븐 (Edward Gibbon 1737 - 1794)의 칼뱅에 대한 저주스러운 평가를 인용해 놓습니다. "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auto-da-fé(천주교 종교 재판)에서 <타오른> <수 많은 희생>보다 세르베 <한 명>의 <처형>에 대해 <더 깊이> <분개>한다”... 로마 천주교회는 이 글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행하였던 다른 수천, 수 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 학살의 희생들은 깔뱅에 비하면 그 죄악이 <경미>하며 매우 <신사적>이었다는 동정을 받아내고 싶었을지는 몰라도 조찬선 목사가 몰래 훔쳐다 쓴 이 글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판단이 안됩니다.

조찬선 목사는 일제시대의 일제 앞잡이 형사 나까무라 상보다 더 지긋지긋한 천주교 앞잡이처럼 보입니다. 그는 auto-da-fé라는 단어를 해석할 수 없어 그랬는지 <그 어느 전쟁의 잔악성>이라고 표현을 달리 했을 뿐, 그 내용은 왜곡을 일삼는 천주교회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서 자신의 비신사적인 분노까지 토해 놓았던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천주교의 주장이라고 해서 이 서술이 반드시 왜곡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라고 질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왜곡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 하면, "세르베(투스)가 칼뱅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한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다"면, 왜 로마 천주교회는 이 보다 앞서 세르베를 두 번이나 화형 선고를 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로마 천주교회 역시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좋은 책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칼뱅의 똘마니 집단이었기 때문에 칼뱅의 거룩한 손에 피를 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서둘러 화형을 선고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날도 용서되지 않는 기독교의 근간인 삼위일체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조찬선 목사가 말하려는 것이 단지 장로교에 흠짓을 내려는 의도였라면, 화를 낼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그 유치 찬란함에 쓴 웃음만 짓을 뿐입니다. 웨슬레 정도를 공격하고 나서야 스스로 순교자적 자세로 글을 썼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찌라시를 그것도 몰래 훔쳐다 빼겼다 놓고 그 자신을 누가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겁이 난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는 학자로서, 나아가 개신교 목사로서도 이미 죽음었습니다.

왜곡의 또 다른 증거는 이것입니다. 천주교 백과 사전의 첫 주장부터 역사라고 말하기도 아까운 <비 사실>은 <필리핀>은 <한국> 옆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르베의 화형은 현재 깔뱅의 집이 있는 쥬네브에서 직선 거리로도 2킬로 떨어진 외곽지 <샹펠>이라는 곳에 이루어졌습니다. <깔뱅의 집 앞>이라고 말한다면 깔뱅의 집은 <반경 2킬로>가 넘는 <어마어마한 궁전>에 살았던 추기경이나 영주여야 했을 것입니다. 하긴 추기경이나 주교만 되어도 궁궐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았기에 이런 추측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깔뱅은 월세로 살았으며, 손님들이 많은 관계로 다른 사람에 비하면 큰 집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리 큰 집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쥬네브의 깔뱅의 집 앞을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깔뱅의 집 앞이 화형 장소로 적합하지 않은 좁은 골목길이었음을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어리짐작>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당시 로마 천주교회가 <화형을 집행>할 때 시민들에게 <경고의 의미>를 담아 <도시 한 가운데>에서 파리의 경우는 <파리 시청>이나 <파리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종교 범죄자들을 화형하였고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볼 수 있도록 뜨겁지 않은 불로 하루 종일 사람을 그슬려 죽였던 것입니다.

이런 자신들의 역사적 배경을 쥬네브에 그대로 대입하다보니 쥬네브 역시 도시 한 가운데서 그것도 깔뱅의 집 앞에서 세르베를 죽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하나만 봐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깔뱅의 잔인성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에서 <추측>과 <악의적 감정>으로 서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추측과는 달리 세르베가 죽임 당하는 곳은 칼뱅의 집 앞도 쥬네브의 도시 한 가운데도 아닌 도시 밖의 외곽지 '샹펠'이라는 곳이며, 더 중요한 사실은 깔뱅이 그 형장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조찬선 목사는 세르베의 죽음 현장이 쥬네브에 있지 않음을 알았든지 근교라는 말로 바꿔 놓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것은 칼뱅이 화형의 그 현장에 있었다고 천주교 백과 사전과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이런 잡동사니의 글이 역사 사료로 채택될 수 있는 것일까요? 김무성 대표의 선친인 김용주가 친일파가 아닌 애국지사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당해 보입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역사를 서술했느냐가 정당한 역사로 평가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처음에 언급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천주교회가 아무리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그것도 천주교 주교가 발행한 백과사전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수의 책을 발간했다 할지라도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닌 악의적 왜곡을 위한 전술적인 부끄러운 책일 뿐입니다. 이 외에도 입에 다 담지 못할 더 많은 악의성 글들이 있지만 다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면 이런 상식 이하의 글을 분별하지 않은 채, 그것도 몰래 뺐겨 쓰면서도 순교적 각오로 글을 썼다는 자신을 자찬한 조찬선 목사의 책은 분명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기에 이런 책을 인용한다는 것은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워할 부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쥬네브에서의 칼뱅이 학살을 행했다는 주장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카스텔리옹(1515~1563)이라는 칼뱅 시대의 사람이, 천주교 백과 사전과 비슷한 또 하나이 공상소설을 저술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그 당시 그 어떤 역사 책에서도 인용되지 않은 죽은 책으로 남아 있다가, 400년이 지나서야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에 의해 일략 베스트셀러로 둔갑되었던 책이기도 합니다.

400년의 긴 시간을 40년으로 줄인다 할지라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글인지를 반박해 보겠습니다.

 

#주장 01

"깔뱅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범죄들을 벌였다." (카스텔리옹의 주장을 인용)

 

반박 1

깔뱅은 두 차례에 걸쳐 쥬네브에 정착하게 되는데, 1차 체류 기간은 추방으로 인하여 다소 짧았는데 1536년부터 1538년까지이며, 2차 체류 기간은 쥬네브 시의회가 다시 그를 초대하므로 1541년부터 사망하는 1564년까지 쥬네브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카스텔리옹이 말하는 깔뱅 사역 초기 5년이라는 것은 2차 기간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깔뱅은 1555년 초까지도 쥬네브 시민들에게 심한 반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쥬네브라는 도시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깔뱅을 위하여 존재했던 도시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사부아 공국에서 나온 부르조아 계급들이 만든 도시 국가였습니다. 그들은 칼뱅이 오기 전까지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시켜 왔던 로마 천주교회 사제들을 추방시키고 난 후 이단 집단이라고 무섭게 공격해 오는 로마 교회로부터 자신들의 정당함을 신학적 이론으로 막아주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부여해 줄 똑똑한 신학자 하나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쥬네브가 깔뱅에게 아무런 권한(심지어 시민권조차 주지 않음)이나 권력을 부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과거 로마 교회가 쥬네브를 장악했을 때의 잔혹한 피 흘림과 억압을 이미 경험하여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역사의 반복을 원치않음과 동시에 자신들의 권리가 종교적인 것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뱅의 도시 쥬네브가 아니라 쥬네브라는 도시의 칼뱅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것입니다. 독재자라고 알려진 깔뱅의 첫 사역 기간 동안 사례비를 한 푼도 받지 못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그에게 설교자, 혹은 성경 선생이라는 타이틀만 부여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쥬네브에서의 칼뱅의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났던 카스텔리옹에 대한 좋은 인상이 남아 있어 그를 쥬네브의 한 학교 교장으로 추천을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카스텔리옹은 쥬네브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1544년 5월 시의회로부터 모든 직위가 파면되므로 생계를 위해서라도 쥬네브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깔뱅의 초기 5년이라는 기간(1541-1545)동안 카스텔리옹 역시 칼뱅과 거의 4년을 함께 사역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파면은 자신의 생계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교장 뿐 아니라 목사로서도 활동하겠다며 목사직을 요청하였지만 거절을 당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분풀이로 한 성경공부 모임에 나타나 난동을 부리다가 시의회로부터 파면을 당하는데, 이 사건 이전에도 그는 돈 문제로 많은 이들과 싸우는 것이 칼뱅에게 목격되기도 하였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을 정도로 영혼 구원에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그였다면, 칼뱅과 함께 4년 동안 머무르는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주장하는대로 깔뱅이 수 많은 살상과 화형을 집행했다고 한다면, 그는 왜 그 기간 동안 침묵만 하고 있었으며, 그런 피비린내 나는 와중에 그 악독한 살인 집단인 쥬네브의 목사가 되겠다고 나섰단 말인지…

그렇다고 그가 목사로서의 사명감이 철철 넘친 것이 아니었음은 사상의 자유가 마음 껏 주어졌으며, 누구나 쉽게 책을 출판할 수 있는 바젤이라는 도시에 가서 그가 쥬네브 보다 까다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로서의 삶을 살지 않고 생계형 직업만을 갖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대로 칼뱅이 살상을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그런 권력이나 그 일을 집행하기에 합당한 직임을 시의회가 부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칼뱅은 글들을 통하여 프랑스 왕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위그노 박해에 대하여 항의를 하며 관용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럽의 다른 개신교 국가들도 동일하게 관용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당시 유럽 최고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개신교 국가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박해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글까지 인용하면서 박해는 로마 천주교회를 지키는 일일 뿐 아니라 영혼 구원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필요한 정당한 행위라고 밝히고 있던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칼뱅이 제네바에서 그러한 무자비한 학살을 가하고 있었다면, 쥬네브를 다시 빼앗기 위해 손바닥처럼 쥬네브의 형편을 내다보고 있었던 로마 천주교회는 왜 침묵하였으며, 더 적극적으로 ‘니나 잘하세요’라며 칼뱅의 학살을 공격해야 정상적이지 않았겠습니까?

북한처럼 언론을 통제해서 쥬네브의 형편을 천주교회가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개신교 국가로 바뀐 이후에 여전히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얼마든지 편지로나 방문객들의 입 소문을 통해서라도 이 사실들은 전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수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와 쥬네브를 넘어다니고 있었고, 엄청난 분량의 책들과 물건들이 두 나라를 오가고 있었음에도 칼뱅을 비판하거나 그 어떤 반박이 없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1908년에 출간한 천주교 백과 사전에서 카스텔리옹의 글을 인용한 것을 제외하고서는 천주교 신자가 쓴 그 어떤 역사 책 어느 한 구퉁이에도 칼뱅의 이러한 학살을 언급하고 있지 않음은 무슨 연유일까요?

더군다나 카스텔리옹은 근대 관용의 선구자라 불려지게 된 그는 이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자기 생계에만 집중하면서 왜 10년 동안이나 침묵하였을까요? 혹 깔뱅이 쥬네브를 떠나는 그에게 혹시나 도움이 될까봐 써준 추천서가 효력을 잃고 또 다시 실직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 침묵했던 것일까요? 카스텔리옹의 학살이 사실이라면 그런 처참한 학살이 발생했던 도시가 칼뱅이 도착했을 때 13,000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1560년경에는 2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쥬네브로 몰려 왔을까요?

 

#주장 02

1. "칼뱅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던 카스텔리옹도 처음엔 멋모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일했다."

반박 - 멋모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일했다고요? 이 대목에서 츠바이크는 정말 역사에 대해 무지한 역사의 문외한이거나 아니면 카스텔리옹를 순박한 사람으로 묘사하려는 극작가로서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카스텔리옹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깔뱅의 집에 머물렀으며, 페스트가 돌았을 때, 깔뱅과 함께 환자들을 돌볼 정도로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런 카스텔리옹의 모습에 좋은 인상을 가졌던 깔뱅이 쥬네브로 돌아갔을 때, 교장이 비어있는 학교의 교장 자리를 그에게 추천하자, 얼른 달려 왔든 것이지, 쥬네브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것처럼 멋 모르고 깔뱅의 문하에 들어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2. 그러나 칼뱅의 독재와 그의 측근들의 위선이 시 전체를 망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까놓고 문제 제기 하다가 결국 제네바에서 쫓겨나고 만다.

반박 - 무슨 문제를 제기했나요? 학살의 잔혹함을 고발했나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1544년, 깔뱅이 바울서신서를 가르치고 있을 때, 카스텔리옹은 깔뱅과 동료 사역자들의 신실성과 신앙에 관해 신랄하게 인식 공격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터뜨렸던 것입니다. 관용의 선구자께서 학살의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가 하셔야 할 일이 겨우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요? 학살의 주범인 깔뱅을 말리든지, 아니면 깔뱅의 실체를 유럽 전체에 알리든지, 시민들을 동원해서 깔뱅을 추방하든지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칼뱅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종교국이라는 것은 쥬네브에 없었습니다. 굳이 종교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천주교회의 한 기관으로 화형까지도 내릴 수 있는 무시 무시한 종교재판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교 재판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 더러, 오늘날 노회(연회)와 같은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 결의하는 기관인 콩시스투와가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장로교의 당회나 노회는 쥬네브의 이 콩시스투와에서 도입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노회가 종교 범죄에 관하여 사형을 선고하든가요? 실제로 이 기관은 신앙 생활과 관련된 사건을 다스릴 수 있었으며, 최고의 형벌은 수찬 정지였습니다. 영적인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시의회는 이 권한 조차도 빼앗기 위하여 칼뱅을 여러 번 코너로 몰아 넣었는데, 도대체 누가 칼뱅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줬다는 것인지요? 그것도 쥬네브 출신도아닌 비 시민권자에게 이런 권한을 주는 국가가 있단 말인지요? 목사회나 콩시스투아르가 갖고 있는 종교적 권한을 축소시키려는 시의회와의 싸움의 증거는 지금까지 자료로 남아 있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세르베 사건 역시 당시 시의회의 다수당이었던 방종파가 세르베를 불려 들어 칼뱅을 위기로 몰고 가기 위한 것으로, 이미 세르베의 책을 출판하는 일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세르베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시의회는 이 사건을 종교 문제임에도 종교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이 재판에 목사들은 단 한명도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칼뱅은 재판관이 불러야 재판정에 설 수 있었고, 세르베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항상 당당할 뿐 아니라 4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당시 사형수로서는 최장기간 동안 재판) 그가 원하는 책들을 마음 껏 볼 수 있었으며, 재판정에서도 수시로 칼뱅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쥬네브 시민들은 세르베와 칼뱅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오히려 칼뱅을 가엽게 여길 정도로 세르베는 자신이 있었던 것입
니다.

하지만 상황은 세르베와 방종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다른 도시 국가들 모두가 세르베의 삼위일체 부정은 용서할 수 없는 일로서 최고형을 내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었으며, 만약 세르베를 살리기 위해 이 요구를 거부하게 되면 자신들의 세력이 무너질 것이 자명하기에 그들은 서둘러 화형을 선고하고 그 다음 날 곧 바로 화형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세르베를 살리기 위해 칼뱅은 오랫동안 모욕감을 감수해야 했으며 당국의 허락을 받아 동행인과 함께 감옥으로 그를 찾아가 대화할 뿐 아니라 그의 오류를 고치도록 지속적으로 설득하였던 것입니다. 칼뱅이 세르베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은 칼뱅이 프랑스에서 추격을 받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세르베가 만나기를 요청하여 그를 만나러 갔다가 세르베가 나오지 않아 헛탕쳤던 일이나, 말도 안되는 억지 논리에도 불구하고 수 십장의 편지를 오랜 시간 동안 주고 받았던 것은 세르베를 향한 칼뱅의 애뜻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을 마치면서

이 외에도 더 많은 반박 자료들이 있지만 독자들이 이 정도의 글만으로 허구의 역사가 사실인냥 자리잡고 있음을 금방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카스텔리옹은 이런 중요한 글을 그것도 쥬네브가 아닌 바젤에서, 자신의 이름을 숨긴 가명으로 저술하였다는 것은 못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츠바이크는 “ 카스텔리오가 침묵을 깨고 <이단자에 관하여>, <칼뱅의 글에 반대함>과 같은 글을 써서 이에 <목숨을 걸고> 맞서고자 하였다.”고 주장을 합니다.

조찬선 목사 역시 순교적 각오로 글을 썼다는데, 이 두 사람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역사 서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카스텔리옹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를 죽일 생각도 없었음에도 카스텔리옹은 마치 세르베가 화형 당한 것이 칼뱅의 신학을 공격한 것인것처럼 거짓말을 함과 동시에 그 자신을 세르베에 대입하여 가명 사용을 정당화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책이 출간되었을 때 칼뱅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그 책의 저자가 카스텔리옹이라는 사실을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츠바이크는 어떻게 설명할런지 궁금합니다.

카스텔리옹이 깔뱅을 평가 절하는 하고 싶은데 흠집 잡을 것이 특별하게 없고, 그냥 억하 심정으로 몰래 뒤에서 남을 욕하는 뒷담화 정도의 글을 남겼을 뿐인데 아주 훗날 로마 천주교회와 천주교 신자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독점물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공격하고자 하는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역사적 자료로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감리교 목사님들 조차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이 허구적 역사를 사실인냥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있다는 형편입니다.

칼뱅은 장로교의 아버지가 아니라 오늘날 개신교에 많은 영향을 미친 우리가 보호해야 할 소중한 개혁자임을 이 기회를 통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칼뱅을 신화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깔뱅에 대하여 <유독> <거짓>과 <왜곡> 그리고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깔뱅에 의해 그들이 빼앗긴 쥬네브와 그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받은 피해가 그 어떤 개혁자들보다 더 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칼뱅을 논함에 있어 사료적 가치도 없는 심상용, 조찬선 목사는 말할 것도 없고 억하심정으로 없었던 일도 있었던 것처럼 악의적으로 왜곡한 카스텔리옹과 그의 책을 편역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반드시 제외되어야 할 비 역사서가 되는 것입니다.

신성남 집사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료를 제시하신다면, 그 사료가 옳고 그름을 떠나 역사를 언급하는 글쓴이로서의 자세를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료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본인이 올리신 글에 대하여 책임을 지실 줄 아는 지성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권현익 목사 / 현재 프랑스에서 중세역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본 글은 <당당뉴스>와 함께 게재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1)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사건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4845
2) 변형된 500년 역사의 충격적 전말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4981
3) 종교개혁사는 개혁교도 핍박사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5310
4) 역사라는 것의 상식성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5848
5) 깔뱅의 비관용을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5496
7) 가톨릭이 화형 언도한 세르베투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5850
8) 그 때 가톨릭 손에는 왕들도 죽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6051
9)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프랑스 버전?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6052
10) 살인자들의 칼집, 똘레랑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6398
11) 엑소더스 프랑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6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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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이 2021-02-28 20:38:11
조씨는 코로나를 재앙으로 안봤나?원죄부인은 성경을 이해 못한 사이비종파들의 주장이다

"집사" 2015-11-03 10:48:54
권현익 목사님께서 쓰신 글을 읽어보니 가톨릭의 역사기록이라는 거이 쓰레기 집하장이고 조찬선 목사님은 열심히 쓰레기 수거를 하셨군요... 이게 맞나요? 일단 가톨릭의 주장과 조찬선 목사님의 주장이 '쓰레기'라고 치죠.

그런데 Jenny Yoon님이 인용한 카빈의 말을 맞고 보니 갑재기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차지철씨가 떠오르는 군요.

“각하,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빨갱이놈들)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습니까.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까불면 전차로 깔아뭉게 버리면 되지요“

성경적 마인드로 보면 차지철씨는 이미 수백만 명을 죽인 분임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각하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누가 뭐래도 당대의 최고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 걱정은, 후대의 누군가들이 차지철씨의 마인드를 본 받을까 두렵네요. 아 뭐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미 본받고 있는 거 같군요.

마찬가지로 누군가들에 의해 칼뱅의 마인드를 본받을까 두렵군요. 아 뭐 이미 너무 많은 개신교인들이 본받고 있는 거 아닌가요?

궁금 2015-11-03 02:23:40
아래 윤제니님, 혹시 칼빈이 저술했다는 <정통신앙 옹호론>이라는 책을 어디서 어떻게 참조할 수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출처로 드신 곳에도 가보니 정작 그 책에 대한 reference는 존재하지 않더군요. 페이지를 알려주는 것까지 기대하지 않더라도, 그 책이 원서라면 원서명과 출판사명이라도 알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책을 찾아보고 있는데, 현재까지 도대체 그 책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어서 말이죠.

집사 2015-11-02 23:07:07
권현익 목사님께서 쓰신 글을 읽어보니 가톨릭의 역사기록이라는 거이 쓰레기 집하장이고 조찬선 목사님은 열심히 쓰레기 수거를 하셨군요... 맞나요?

그런데 Jenny Yoon님이 인용한 카빈의 말을 맞고 보니 갑재기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차지철씨가 떠오르는 군요.

“각하,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빨갱이놈들)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습니까.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까불면 전차로 깔아뭉게 버리면 되지요“

성경적 마인드로 보면 차지철씨는 이미 수백만 명을 죽인 분임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각하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누가 뭐래도 당대의 최고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 걱정은, 후대의 누군가들이 차지철씨의 마인드를 본 받을까 두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