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가 아닌 '바보'가 되련다
'엘리트'가 아닌 '바보'가 되련다
  • 최태선
  • 승인 2009.10.11 2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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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평화의 사람들 ⑨ '오직 바보만이 어둠 속에서 빛을 봅니다'

한국 최고의 부자 동네라는 강남에 근처에는 소위 '강남 인접 시'들이 있습니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이 함께 다니는 학교가 있었습니다. 강남에 사는 아이들과 인접 시에 사는 아이들은 확연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차이는 그대로 아이들의 성적과 정비례합니다. 그래서 그 학교의 젊은 선생님들은 학원도 못 다니는 인접 시의 학생들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였습니다.

그 선생님들과는 또 다른 일을 하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강남의 아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하고 성적도 좋은 아이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용돈을 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정기적으로 고아원을 방문해 후원하고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작은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야학을 하는 선생님 중에 한 분이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이들과 고아원을 방문하는 선생님을 질책하였습니다.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입니다.

공격을 받은 선생님은 차분하게 자신이 그 일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에게 한자 하나 영어 단어 하나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공부 잘 하는 부잣집 아이들은 앞으로 이 사회의 지도층이 될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려운 아이들을 돌아보게 하는 일은 앞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비를 걸었던 선생님은 집요하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제로는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언성이 높아졌지만 주변 선생님들의 만류로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 일 후 2년이 지나 시비를 걸었던 선생님이 먼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이들을 데리고 고아원엘 다니는 선생님을 찾아가 전근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선생님은 과거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참 고맙습니다. 절대로 선생 그만 두지 마십시오.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야 합니다."

아이들을 고아원에 데리고 다니던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 두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하는 전근 가시는 선생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두 손을 마주 잡은 두 선생님은 그렇게 잠시 숙연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약 25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두 선생님 모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선생님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그 정열을 쏟아 부었습니다. 또 다른 선생님은 공부 잘 하고 부유한 집 아이들에게 그 정열을 쏟아 부었습니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한 일입니다. 그 당시 저는 공부 잘하는 부유한 아이들을 데리고 고아원엘 다니던 그 선생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트주의의 함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트주의가 문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엘리트주의의 무서운 점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높여 하나님과 견주어보려던 바벨탑을 쌓았던 인간의 교만함은 아직도 그대로 인간의 깊은 내면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엘리트주의는 인간의 그 숨은 죄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여간해서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엘리트가 되려는 마음은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자신이 엘리트가 되지 못한다면 자식들이라도 엘리트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마저 안 된다면 돈을 많이 벌어 엘리트 사위나 며느리라도 얻어야 합니다. 그렇게 엘리트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끝없는 소모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두드러질수록 엘리트주의의 폐해는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가끔 입으로는 하나님께 '립서비스'를 하기도 하지만 높아진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엘리트 의존적입니다.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은 엘리트가 아닌 존재는 멸시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없애버리려고까지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인류는 엘리트 그리스도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엘리트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결코 엘리트라고 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로 오셨습니다. 엘리트를 위한 교육환경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서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기까지 그분의 일생은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별 볼일 없는 가난한 존재로 역사 속에 등장하시고 비참한 존재로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그러나 인류에게 새로운 역사를 여는 사건이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도 그분처럼 낮아지고 비워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작은 자들(어린아이), 낮아진 자들(섬기는 자)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엘리트가 아니라 작은 자가 되고 낮은 자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진실 되게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엘리트주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병입니다. 다른 말로 그것은 '일류병'입니다. 우리가 그 병에서 치유될 때 인류는 복음이 말하는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오직 바보만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하나로 세상을 바꿔보려 시도하겠지요. 그렇다면 예수야말로 바보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보들만이 그를 추종하다가 그가 처형당한 뒤에 그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 거예요. 따라서 사도들은 모두 바보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바보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 또한 같은 바보들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방 우리 모두가 바보라는 그런 말이올시다."

엘리트가 아니라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유식한 학자가 아니라 겸손한 목수를 택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또 어부와 세리들을 사도들로 뽑으셨지요. 우리가 과연 그들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복음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과 학력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 모두 바보임을 기꺼이 시인합시다. 그러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에 마음 놓고 몸을 던질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떻게 바보가 되려는 마음이 좀 드십니까? 바보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일에 몸을 던지실 의향이 생기십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사 53:4a)

이사야의 말은 우리의 어리석은 이기심을 뒤흔듭니다. 우리는 그분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그분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도다." (4b)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5a)고 고발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의 그런 허물과 걍팍한 마음을 아시면서도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b)

그분의 일그러진 얼굴, 그분께서 당하신 고통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보이시기에 그런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보이시기에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 사랑을 하신 이는 그렇게 바보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처럼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며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지고 당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아픔과, 그분의 몸인 교회가 겪는 고난을 대신 지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분처럼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엘리트가 되기 위해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은 남이 잘못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흠까지 들추어냅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이의 허물을 덮어 주고 부족함과 고통까지 대신 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다른 이의 게으름을 질타하고, 능력 없음을 비웃으면서 그들의 불행은 오직 그들 자신의 책임임을 지적하면서 스스로 정의로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엘리트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처럼 바보가 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오직 바보만이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불행 안에 있는 행복을 보기 때문에 남을 이해하고 남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바보만이 모두를 끌어안고 어리석은 주님의 사랑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주변을 돌아보면 예수님 덕에 엘리트가 되려는 이는 많지만, 예수님을 닮아 바보가 되려는 이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이 땅의 교회들이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엘리트가 되어 이루는 나라가 아니라는 걸 꼭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엘리트가 되려는 이 경쟁의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바보로 살기 원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엘리트가 될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이 다 바보는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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