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많은 공, 큰 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많은 공, 큰 과
  • 김기대
  • 승인 2015.11.2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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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남, 중산층의 이탈과 3당 합당

김영삼 전대통령이 별세했다.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그의 공과를 살피는데 열심이다. '공과'를 구별해야 한다는 상투어가 박근혜 정부하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을 염두에 두면서 '좋은게 좋은거지'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 말이 비교적 의미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과'보다는 '공'쪽으로 여론이 기울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동안 한국의 정치 지형이 뒷걸음질 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고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에 큰 공을 세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망자에게 관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우리 네 전통이기는 하다.

분명 그는 업적이 많은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그는 올곧게 싸웠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자 선거 운동 과정에서 김대중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펼친 것만 보아도 그는 게임의 룰을 아는 사람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해 놓고서도 선거 당일 미국으로 가버린 안철수와 비교하면 김영삼 전대통령의 행보는 확연히 달랐다.

1979년 5월 그는 박정권과의 전면투쟁을 거부하는 이철승과 신민당 총재 경선을 놓고 맞붙어 역전승을 거두었다. 당시 마포에 새로운 당사 건물을 지어 막 이사했던 신민당 건물앞에는 지지자들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모여들어 밤늦도록 환호했던 장면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가 총재를 맡은 후 신민당에 대한 시민사회의 신뢰도 쌓여갔다.

그 해 8월 가발제조업체인 YH소속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조치에 항의하면서 농성장소를 신민당사로 잡을 정도로 김영삼의 야당은 믿음이 갔고 강했다. 경찰은 농성을 해제하기 위해 당사로 난입했고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신학자 서남동은 김경숙의 죽음을 민중신학적으로 조명했다.  -  서남동,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년) 참조    

그 해 9월 '미국 정부는 박정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는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인터뷰가 실리면서 그는 국회에서 제명되었다. 공교롭게도 지난 19일 뉴욕타임스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고 곧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별세하자 뉴욕타임스는 79년의 그 사설을 다시 게재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박정희는 10월 26일 최측근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한다.

이어지는 신군부의 폭압적인 독재의 시기를 거쳐 김영삼은 1985년 2.12 총선을 통해 화려하게 복귀한다. 결국 6.29선언으로 부분적인 항복을 받아 냈고 시민사회와 강력하고 선명한 야당(신한민주당)의 연합 투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지역구도가 고착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인한 부분적인 성취는 빛을 잃었다.

13대 총선의 결과인 민정당 125석 통일민주당 59석 평민당 70석 신민주 공화당 35석이라는 지역 구도는 87년 체제의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2위 득표를 했지만 총선에서는 3당으로 밀려난 김영삼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좁았다. 영남을 민정당과 나누어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김영삼은 김종필과 함께 민정당에 투항해 1990년 민주자유당(민자당)을 결성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가서 기어코 대통령이 되고야 만 김영삼의 승부사적 기질에 대한 찬사가 있지만 그 굴은 호랑이 굴이 아니라 돼지 우리였는지도 모른다. 정치인 김영삼은 대통령으로서 누구도 하지 못할 업적을 쌓았다. 군대 사조직인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운 일 등은 그가 아니면 하지 못했을 일이다. 집권 초기 90%에 이르렀던 지지율은 그의 개혁정책이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하지만 3당 합당은 한국의 중도 세력의 우경화를 재촉했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김영삼의 ‘신뢰’이미지가 주는 장점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반공 정책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에게는 ‘빨갱이’이미지가  덧입혀지지 않았다. 또한 그에게는 ‘영남’과 ‘중산층’, 그리고 ‘기독교’라는 우호 세력이 있었다. 지금 정치적으로 회색지대에 머무는 중산층을 제외하고 ‘영남’과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우경화된 것은 3당 합당으로부터다.

오히려 지금 박정희가 산업화의 영웅으로 숭배되지만 사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그다지 영웅이 아니었다. 당시 신민당에서 발행하던 기관지인 <민주전선>을 시내에서 배포하는 신민당 당원들의 결의에 찬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검열에 걸려 곳곳에 시커먼 줄이 그어져 있고 인쇄도 조악했던 그 신문을 버스 승객들과 거리의 행인들은 거리낌 없이 받아 보았고 더러는 돈을 건네기도 했다. 요즘 말하는 자발적 유료 구독자였던 셈이다.

이처럼 김영삼은 박정희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대안이 될만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실제로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10대 총선에서 공화당보다 신민당이 더많은 득표수를 기록했다. 당시 야당의 간판 스타는 김영삼이었지만 당권은 행보가 투명하지 않았던 이철승이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공화당보다 10% 이상(야당합계) 득표했다는 사실은 지금 박정희의 신비화에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이 때 야당을 지지했던 많은 표들은 12년후 3당 합당으로 인해 대부분 김영삼과 함께 보수로 ‘전향’한다.

특히 기독교 세력의 변화를 눈여겨 봐야 하는데 김영삼은 보수적인 합동측 충현교회(당시 담임목사 김창인)의 장로였다. 기독교 세력은 김영삼의 이런 점을 높이 샀다. 기독교인 김영삼의 이미지는 이명박의 ‘종교팔이’와는 확실히 달랐다. 또한 서슬퍼런 박정희 치하에서 일어났던 부마항쟁도 영남 시민사회 세력의 저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런 인프라 역시 김영삼을 따라 갔다.

우경화한 중도 세력들들은 ‘민주화’의 역사까지도 독점한다. 김무성씨가 자신이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치적 양자라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해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도 세력들은 우경화한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반민주 세력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종북세력’이다. 적어도 박정희 정권때는 김영삼을 빨갱이로 몰지는 않았다.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시킨 인혁당 사건 같은 것들로 국민들을 협박하기는 했지만 겁은 먹었을지언정 인혁당 사건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지금처럼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시민을 종북으로 모는 일은 없었다. 도리어 ‘빨갱이’로 몰리지 않았던 김영삼은 박정희에게 그 점에 대해서 고마워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1990년 전향한 김영삼의 후예들은 오늘 김무성 서청원처럼 종북 몰이에 앞장 서고 있다.

정치인 김영삼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귀공자 타입의 부자집 아들인 그는 다양한 계층에서 신뢰를 받고 있었다. 지금 지리멸렬한 야당을 보면 그가 받은 ‘신뢰’는 분명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장점이었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가 곧 민주주의의 성취라고 일찍 단정해 버린 이들이 김영삼과 함께 ‘저쪽’으로 넘어간 것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애석한 부분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3당 합당이 없었더라면 지금 국정교과서 획책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시도도, 종북몰이와 같은 해방 공간에서나 보았음직한 일도, 개신교의 천박한 정치적 우경화도 없었을 것이다. 호랑이굴인지 돼지 우리 인지는 몰라도 김영삼의 투항이 없었다면 정치적인 개혁이 조금 더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세력, 진보적 양심 세력, 전라도라는 말이 종북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퇴행적 현실은 발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 남을 많은 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가 크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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