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에는 없고 레버넌트에는 있는 것
대호에는 없고 레버넌트에는 있는 것
  • 김기대
  • 승인 2016.01.26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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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느니라'

두 사냥꾼의 이야기가 한국과 미국에서 상영 중이다. 일제하 지리산에서의 호랑이 사냥을 소재로 삼은 <대호>와 미 서부의 광활한 산맥을 무대로 삼은 곰 사냥꾼들의 복수 이야기를 그린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는 눈 덮인 산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 영화 '대호'와 '레버넌트' 포스터

<대호>(박훈정 감독, 2015년) 는 사냥꾼 천만덕(최민식 분)과 산군이라 불리는 호랑이 사이의 애증을 기본 구조로 스토리를 전개한다. 1925년 일본군 고관 마에조노는 퇴임 기념으로 지리산의 영물 대호를 잡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본군과 조선 사냥꾼들을 고용한다. 도포수 구경이 조선 사냥꾼의 대장을 맡아 대호 포획에 나서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구경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일본측은 지역의 명포수 천만덕을 사냥에 끌어들이려는데 천만덕은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천만덕은 호랑이 사냥을 나섰다가 오발로 아내를 죽인 정신적 상처 때문에 아들 하나를 데리고 총을 놓은 채 약초 채취를 업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 몰래 호랑이 사냥꾼 대열에 합류했던 만덕의 아들이 호랑이의 공격으로 죽자 만덕은 질긴 인연을 끊기 위해 호랑이 사냥에 나선다. 만덕이 오래 전 대호의 어미를 사냥했을 때 새끼 호랑이들은 살려 두고 심지어는 먹이를 가져다 주기도 했던 일로 시작한 이 둘의 인연은 결국 대호를 잡으려다가 아내를 잃으면서 일단락 되었는데 이번에는 아들의 죽음이 둘을 다시 맞닥뜨리게 한 것이다. 만덕의 마음은 아들과 아내를 잃은 데 대한 복수 보다는 자신을 알아 봐주는 영물 대호를 직접 사냥함으로써 그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갖추려는데 맞추어져 있다. 미쳐 날뛰는 조선인 사냥꾼들과 일본군에게 대호를 죽게 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덕의 소망처럼 둘은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다.

박훈정 감독이 전작 <신세계>(2013년)에서 멋진 복수를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자연과의 교감', 뭐 이런 정도의 밋밋한 결론을 내려 버린다. 일본의 무지막지함, 그런 일본군만 골라 공격하는 대호의 행동을 카다르시스 제공용으로 슬쩍 짚어 넣은 듯 하나 카타르시스로는 약하고 영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데는 방해가 된다.

대호를 일본의 손에 넘겨주는 것을 막았다는 '민족 정기'(?), 호랑이 가족과 만덕의 가족 이야기, 산군이라 불리는 대호의 종교적 위상과 그 앞에선 만덕의 겸손함 등의 구도가 마구 나열되어 영화가 맥을 놓치고 말았다.

만덕은 호랑이 새끼를 살려 주었지만 그 호랑이로 인해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복수를 해야 할 시점에 만덕은 갑자기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칭송자가 되어 버렸다. 복수가 아니라면 용서라도 해야 할 터인데 용서도 없고 난데없이 그가 모든 갈등을 안고 호랑이와 함께 죽어 버린다.

대호와 만덕은 모두 사냥을 하지만 그들은 마에조노나 구경처럼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먹거리만 얻는다는 점에서 같다. 욕망을 향해 치닫는 자본주의의 모순도 하나의 주제로 삼다 보면 영화는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다가 해결이 안되니까 장렬한 죽음이라는 다소 허무한 결론으로 도피하는 듯 하다. 마치 갈등 구조를 너무 많이 꼬아버려 해결의 한계를 느낀 드라마의 극작가가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죽여 나가면서 드라마를 끝내는 것처럼 말이다.

   
▲ 영화 '대호'(좌)의 만덕과 '레버넌트'(우)의 휴 글래스

레버넌트<레버넌트>(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에서 사냥꾼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모피 회사의 사냥팀의 일원으로 눈 덮인 산에서 사냥감을 찾던 중 곰의 습격을 받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중상을 입는다. 게다가 원주민의 공격이 이어지자 사냥 팀은 혹한의 날씨에 철수를 결정한다. 말도 모두 빼앗긴 그들은 나름 정성을 다해 들것에 실어 휴 글래스를 옮기지만 악천후로 인해 도저히 옮길 수가 없게 된다. 사냥 팀의 대장인 앤드류 헨리는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 분)와 짐 브리저에게 죽기 전까지 그를 부탁한다며 먼저 떠난다.

피츠제럴드는 브리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함께 남은 글래스의 아들 후크를 죽이지만 꼼짝할 수 없는 상태의 글래스는 이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다. 피츠제럴드는 글래스를 생매장하고 떠나버린다.

질긴 생명력을 가진 글래스는 살아남아 생존을 위해 사냥팀의 베이스 캠프를 찾아 간다. 실제 이야기를 영화로 삼았는데 휴 글래스는 곰의 습격을 받고도 4천 킬로가 넘는 산을 걸어서 생존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실제와 달리 영화가 가공한 부분은 휴글래스의 가족 이야기다. 영화에서 글래스는 미국 원주민과 결혼했고 사이에 혼혈 아들을 두었다. 피츠제럴드가 글래스의 아들 호크아이를 못 마땅해하고 결국 살해까지 한 것도 그에게 인디언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에게 원주민은 야생동물과 다름 없는 존재였고 호크아이는 원주민과 공모가능성이 있는 내부의 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함께 숨쉬고 있는 무슬림들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바라보는 시각과 흡사하다.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견디고 마침내 캠프에 도착한 글래스는 팀의 대장인 앤드류 헨리의 돈을 훔쳐 달아난 피츠제럴드의 뒤를 다시 쫓는다. 다시 눈 덮인 계속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대결에서 피츠제럴드는 죽음을 맞는다.

<레버넌트>도 <대호>처럼 조금은 산만하다. <대호>가 일본 사람만 주로 공략하는 호랑이 에피소드를 삽입해서 주제를 산만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레버넌트>는 백인이라고 다 나쁜 사람이 아니고 원주민이라고 해서 모두 잔인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원주민을 다룬 영화에 항상 들어가는 클리셰가 이제는 조금 지겹다.

<대호>가 호랑이로부터 영성을 발견했듯이 <레버넌트>는 원주민의 영성을 부각시킨다. 마지막 글래스가 피츠제럴드의 목숨을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복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며 피츠제럴드를 물에 떠내려 보내자 기다리고 있던 원주민 부족이 피츠제럴드의 목숨을 끊어 버린다. 원주민이 신의 역할을 대행한 것이다. 원주민과 맞닥뜨린 글래스는 자신이 구해준 추장 딸의 도움으로 살아나는데 이 복선도 너무 뻔하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지만 <대호>에는 없고 <레버넌트>에만 있는 것은?

<레버넌트>를 소개하는 카피들이 ‘복수’를 부각시키지만 글래스를 지탱한 힘은 생존 의지였다. <대호>에서 만덕은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다 못해 함께 죽음을 택했다면(그것도 적이 아니라 닮은꼴끼리) <레버넌트>에서는 어떻게든 살아 남아(revenant 즉 망령이 되는 한이 있다할지라도) '악'과 대면한다.

이냐리투 감독은 <바벨>에서 여러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화엄’과 ‘초월’을 말했다면 이번 영화에서 이냐리투 감독은 인간의 의지를 더욱 강조한다.

세상은 아직도 부조리하다. 대한민국은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쓸 정도로 젊은 청춘들이 현실과 부딪히기 보다는 ‘죽음’을 택한다. 세월호를 비롯한 모든 사건들에서 음모는 현실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 교묘한 언론의 기획은 시민들의 정치 혐오증을 부추겨 헬조선의 문제를 외면하고 정치적 죽음(무관심)의 길로 내몬다. <대호>에서 만덕처럼 약초나 캐면서 도피하는 삶을 동양권에서는 높이 사 왔다. 그러다가 호랑이를 일본인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려했던 만덕은 역설적이게도 사무라이처럼 자기 죽음으로 도피를 완성한다. <대호>가 아쉬운 것은 이처럼 적은 놓아두고 억압받는 호모 사케르끼리 도피해 버린 부분이다.

현실이 쉽게 극복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글래스처럼 악의 결말을 볼 때까지 굳센 의지로 살아남아야 한다.

김기대 목사 / 평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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