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교회는 신도가 몇 명이나 되냐?"
"그 교회는 신도가 몇 명이나 되냐?"
  • 김대규
  • 승인 2009.10.31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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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아버지의 물음에 '사회적 진화론'이 떠올랐다

지난해 5월 말,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미국 소 수입 반대' 관련 집회에 온 가족이 참석했다가 그 일을 계기로 출석하던 교회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이 일은 '촛불 집회에 다녀온 후 교회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소개된 바 있다. 그 후에, 해당 기사를 읽은 독자의 초대를 받아들여 우리 가족은 교회 건물 대신 요가 센터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녹두교회라는 작은 평신도 교회 공동체에 출석하고 있다.

"신도가 적으면 은혜가 안 된다"는 아버지

▲ 교회의 성장 논리와 대형교회에 대한 신도들의 선망은 독점적 자본주의 단계에서 필연적인 전쟁에 대한 묵인과 미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소속의 은퇴 목사인 나의 부친은 우리 가족이 교회를 옮긴 것은 알고 있지만, 교회를 옮기게 된 배경은 잘 모르신다. 다만, 예장통합 교단에서 다른 교단 소속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으셨나 보다. 오랜만에 경기도 구리에 사는 동생네에 머무르고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뵌 어느 일요일 저녁, 아버지가 교회에 대해서 물으셨다.

"그 교회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신도가 얼마나 되냐?"
"약 10여 명 참석하였습니다."
"뭐 10여 명? …"

아버지는 비웃음인지 뭔지 모를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신도가 적으면 은혜가 안 된다, 그 교단 소속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등의 말씀을 하셨다. 그 떨떠름한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언사에 모순이 있다고 느꼈던 것인지 단정할 수 없었지만, 이 대목에서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고 작정하였다.

"도대체… 그 부흥의 기준이 뭡니까? 교회가 자장면 그릇 수로 맛을 판단하는 부흥 반점이 아닌 바에야 신도가 적다고 설마 은혜와 감동마저 없겠어요? 저희 교회는 그런 데가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말대꾸로 인해 아버지의 언사가 거칠어지셨고, 우리 가족은 그날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그날 일로 지난 추석 내내 아버지와 나는 서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지냈다.

은혜의 척도가 되어 가는 '교회의 규모'

하지만 이와 같이 차별적인 언사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걸 안다. 돌이켜 보니 학력고사를 치르고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았을 때의 모멸감부터, 믿지 않는 집안과 이루어진 나의 결혼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느낌들이 내 마음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나는 '그 교회는 신도가 몇 명인가?'라는 질문의 배경에는 어떤 생각이 깔려 있는지 대강은 짐작한다. 또한 한국 교회의 일정한 분위기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어느새 '교회의 규모나 재정'이 유일무이한 은혜의 척도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척도는 담임목사의 능력과 신도의 클래스(class)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몇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인가'?

'주일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 교회인가?' 신도를 평가할 때도 어느 교회에 나가느냐가 중요한 이해 수단이 된다. 알게 모르게 다수의 기독교인 가운데에는 대형교회 교인을 무의식적으로 선대(善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신도 자신이 대형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토로 이어진다. (김선주,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188면)

김선주 목사는 이러한 풍토가 기인한 그 이론적 뿌리를 진화론에서 찾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와 인간에 대해 적용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적 진화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스펜서의 사회적 진화론은 동식물과 같이 개인이나 민족, 인종도 진화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으며 결국 사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존 투쟁, 계급적인 생존 투쟁, 인종적, 문명적 수준에서의 생존 투쟁도 모두 이 원리에 의해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부자란 진화론적인 과정에 따라 자연적으로 선택된 존재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스펜서의 이러한 설명은 특히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후 금전적으로 혜택 받은 사람들을 모든 죄악감에서 해방시켰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생물학적 우수성을 드러내는 화신이라고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펜서는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의무감과 관심을 모두 제거했다. 빈곤한 사람의 도태가 아무리 잔혹할지라도 그것은 인류 전체의 개선이라고 하는 고차원적인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스펜서의 사회적 진화론은 인간과 사회를 계속되는 진화의 연속체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고전파 경제학과 함께 자유방임적 시장주의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특히 정치적·경제적 기득권층을 지지하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이념적 뿌리가 되었다. (갤브레이스, 경제학의 역사, 204면)

워드 비처 목사, "약탈한 부의 축적 역시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스펜서의 복음을 널리 전파한 미국인으로 다소 격정적인 설교로 유명한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1813~1887) 목사를 지목하고 있다. 경제학·사회학 ·신학을 뒤섞어 하나로 만드는 것이 미국인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자유주의적 회중 교회의 하나인 뉴욕 브루클린 플리머스 교회 담임목사였던 비처(Beecher)도 <진화와 종교>(Evolution and Religion)라는 저서에서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즉, 한쪽으로는 다윈과 스펜서의 진화론과 다른 한쪽으로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정통적인 성서 해석 사이의 외관상 메울 수 없을 것 같았던 간극을 연결한 것이다. 그가 채택한 방법은 신학과 종교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에 바탕을 둔 것이다. 즉, 신학은 그 성질상 진화하는 것이지만 종교는 창세기 신의 말로서 불변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이러한 구별을 이해했다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나 이것에 의해 다윈과 스펜서가 미국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비처는 한 가지 결정적인 점에서 명료했다. 즉, 스펜서가 한 일은 신의 의지에 대한 하나의 표현 형태를 제공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은 위대한 인물이 위대하도록, 소인이 소인이도록 미리 정할 것이다"라고. (갤브레이스, <경제학의 역사>, 204~207면) 그에 따르면, 부자는 진화론적으로 경쟁에서 이긴 생존 적자이지만, 이 또한 태초에 하느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설명된다.

이처럼 진화의 자연법칙 속에서 우수한 종(Species)임을 스스로 증명한 부자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부를 쌓았는지 묻지 않은 채, 비처 목사는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이 하느님의 예정의 선택이라는 종교적 해방감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남북전쟁과 서부 개발이라는 약탈 경제 하에서 독점적인 부를 모은 자들에게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복음(Good News)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약탈적 부를 쟁취한 자들이 자신의 소유와 영향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경쟁'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경쟁에는 최대한의 약탈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흔히 이러한 자유는 하느님이 신대륙에서 모든 사람에게 보장하는 절대적인 선으로 위장되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진 자들의 승리를 약속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진화론에서 말하는 핵심이다. 주어진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종(Species)이 더 많은 후손을 남기고 결국은 종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신도 수를 물으시면 뭐라 대답해야 할까

이와 같이 무제한의 약탈이 보장되는 경쟁과 그 과정 속에서 지속되는 진화는 '자유'와 '발전'이라는 명분을 확보하고 관철시킨다. 이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유'는 멈추지 않고 '발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졌고 '발전'은 더 많이 소유하며, 더 많이 누려야 한다는 '경쟁'의 논리로 합리화한다.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전쟁과 공황(Recession)으로 이어진다.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 <The Making of a Radical>, 329면)

그러나 이와 같은 사상은 신도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영성이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일관된 진리의 실존적 인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신앙의 본질보다 교회의 크기나 신도의 클래스와 같은 신앙의 외피를 강조한다. 예컨대, 화해와 용서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는 서부 유럽 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파시스트들을 지지하고 후원하였던 것을 기억해 보라.

오늘날에는 한국 교회가 이러한 '약탈적 자유'와 '정글 속의 경쟁'이라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사람의 노동으로 인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버는 데 있다. 교회의 성장도 일정한 기준점을 통과하면 이전에 비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원리 안에 있다. 그 교회의 영성이 어떻고 말씀이 어떤가에 대한 관심보다 좀 더 큰 사이즈를 선호하는 경향이 교인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선주,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187~189면)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성장 논리와 대형교회에 대한 신도들의 선망은 독점적 자본주의 단계에서 필연적인 전쟁에 대한 묵인과 미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는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약탈을 일삼는 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성실히 준행하며 땀 흘려 일하는 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진화론적으로 당연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일생 동안 큰 교회를 지향하셨지만, 평생 지방에서 100여 명 안팎의 작은 교회의 목사였다. 평생 지방에서 살았지만 서울을 바라보시고, 작은 나라에 살지만 큰 나라를 사모했던 분이었다. 이제 아버지가 나에게 다시 '그 교회는 신도가 몇 명이냐?'고 묻고 계신다. 진정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 <오마이뉴스>와 기사 제휴를 맺고 있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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