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목사가 되고 싶은 남성에게
좋은 목사가 되고 싶은 남성에게
  • 이계자
  • 승인 2016.02.18 03: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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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에게 시급한 자기 성찰, '나는 어떤 아버지인가'

작년 연말부터 대한민국의 매스컴을 쉴 새 없이 달군 '부모에 의한 자녀 학대 사건들'은 수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고 슬프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학교, 이웃, 지역사회, 경찰서 등 어떤 기관이나 어떤 어른들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지속적인 학대를 당해야 했고, 결국 부모에 의해 죽어야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그제야 교육부와 보건복지부는 전국 1만여 개의 초, 중, 고등학교에 장기(7일 이상)결석하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전수 조사를 지시했다. 지금까지 어두운 동굴 속에서 숨죽이며 고통당해야 했던, 죽어가야 했던 불쌍한 아이들의 슬픈 이야기들이 비로소 하나씩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엄청난 사건 하나가 보도되었다. 목사요, 박사요, 신학대학 교수인 친아버지 이 모 목사가 상처(喪妻) 후 재혼한 아내와 함께 13살짜리 딸을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아이의 시신을 11개월 동안이나 집 안에 숨겨놓았다가 발각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목회자들의 부도덕과 각종 비리로 인해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었고, 목사가 '먹사'로 불리며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니 하나님께는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부끄럽고 면목 없는 일인지 모른다.  
    

   
▲ 아직 바라던 전임 교수의 자리는 얻지 못했지만, 새 아내를 얻어 새 출발을 하였으니 아이들만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주면 자신에게도 머지않아 '행복한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존경받는 지도자의 자리에서 딸을 학대하여 죽게 한 살인자의 자리로 추락한 이 모 목사의 초라한 모습을 TV 화면을 통해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의 가정환경과 성장배경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오랜 세월 상처를 안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아마도 혼신을 다해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깟 상처쯤은 햇빛이 나오면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질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가난과 싸우며 유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큰 소원은 이뤘지만, 고생만 시켜 병이 든 아내를 낯선 이국땅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슬픔 또한 얼마나 컸을까? 자신과 함께 남겨진 어린 세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수없이 많은 날을 뒤척이며 잠 못 이루었을 것이다. 

이런 자기 상처에 매여 삼 남매 중 막내로 다섯 살 때 엄마를 잃어야 했던 열세 살 어린 딸의 아픔, 아니 세 자녀 모두의 아픔까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직 바라던 전임 교수의 자리는 얻지 못했지만, 새 아내를 얻어 새 출발을 하였으니 아이들만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주면 자신에게도 머지않아 '행복한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첫째(아들)는 여러 해 전 이미 가출했고, 둘째(딸)도 독일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갔으며, 셋째(딸)마저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도에 지나친 훈육을 한 결과 이런 비극으로 치달은 것은 아닐까? 그건 훈육의 수준을 넘은 엄연한 학대인데 말이다.  

   
▲ 고 박윤선 목사의 둘째 딸인 박혜란 목사가 쓴 <목사의 딸>(아가페북스). '역사에 길이 남을 신학자'가 아닌 '아내와 자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작년 3월, <목사의 딸>(아가페북스)이 출판되면서 기독교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장로교단 주경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는 고 박윤선 목사의 둘째 딸인 박혜란 목사가 쓴 책이었다. 내용은 책 표지 제목 밑에 쓰여 있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라는 부제에 걸맞았다. 그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신학자'가 아닌 '아내와 자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 준 남편과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민망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훌륭한 신학자로 후학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온 그였지만,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버지로 기억될 수 없었나 보다. 책의 내용에 대한 진위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목회자건, 성도건, 누구건 모두 나약한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었어도, 공부를 많이 하여 그럴듯한 직함을 얻었어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 해도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부모와 자녀 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상처를 얻었지만, 그것을 치유 받아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물론 평생 상처 속에 갇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친지, 이웃들까지 불행한 삶을 살게 할 수도 있다. 

목사든, 박사든, 교수든, 존경받는 위치에 오른 지도자이든 간에 가정으로 돌아오면 한 아내의 남편이고 자녀들의 아버지다.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남편, 아빠라면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 목사든, 박사든, 교수든, 존경받는 위치에 오른 지도자이든 간에 가정으로 돌아오면 한 아내의 남편이고 자녀들의 아버지다. 밖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포장된 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져 자신의 내면을 낱낱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면 지도자가 될 생각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통용되지만 언제나 옳은 말은 아니다. '인정받는 남편, 인정받는 아버지'가 되려면 그에 걸맞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어떤 남편이고, 어떤 아버지일까'를 늘 고민해야 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포장된 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져 자신의 내면을 낱낱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면 지도자가 될 생각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공자도 말했던 것처럼 자기 인생도, 자기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성도(교인)들의 인생과 가정사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관심받고자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마디로 '스펙에 열광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외모와 학벌(학위), 돈과 권력, 출세의 기회' 앞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이 교회의 지도자요,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할 목회자들 가운데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스펙을 쌓아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고자 하고, 섬기는 종이 아닌 섬김을 받는 왕으로 군림하려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왜 그리도 박사가 되고자 하는 지… 그것이 인생과 사역의 목표가 된 목사들이 많다. 

강단에서는 '구별된 삶을 살자'고 외치는 그들이 왜 그런 유혹 앞에 쉽게 굴복하고 마는 것일까? 영적인 아비들이 이런 지경인데 성도들이, 교인들이 잘못된 길을 간다고 해서 누가 감히 '말씀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을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자신의 강점 보다는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고 그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가족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가정이 흔들리는 것은 아버지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정 밖에서 존경 받는 지도자가 되려고 고군분투하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건강한 남편, 건강한 아버지'가 되기를 작정하라.

PK(Pastor-Kids, 목회자 자녀들)의 방황 속에서 우린 그들의 아버지의 감춰진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을 방황하게 한 것은 '목사의 자녀라는 굴레'가 아니라 '가정 안과 가정 밖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인격자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한 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가정 밖에서 존경 받는 지도자가 되려고 고군분투하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건강한 남편, 건강한 아버지'가 되기를 작정하라. 자신의 비전을 이루고, 성도들과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목회자가 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가정 안에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인정받는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은 고인이 된 팝 음악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살아있을 때 그렇게도 얼굴 성형에 집착했던 것은 죽어도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날이 갈수록 자신의 얼굴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발생한 이 모 목사의 '어린 딸 학대 사건'이 목회자들에게 자신의 내면 – 상처받아 울고 있는 어린 자아 – 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기 성찰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기름 부음 받은 거룩한 주의 종이니 당신(교인)들과는 차원이 달라'라는 권위주의적인 자만심에 빠져있지 말고,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 즉, '상처받은 자아'와 대면하기 바란다. 나의 과거, 나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감추기에 급급하지 말라. 

내가 태어난 환경, 불행한 가정사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내 잘못이 아니다. 상처를 인정하라. 상처로 인한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의 도움을 요청하라. 그리고 그것들이 쓴 뿌리와 견고한 진이 되어 내 인생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도록 복음의 능력으로 강력하게 물리치라. 

상처받고 보잘것없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복음으로 영혼을 살려내는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런 나의 변화를 통하여 많은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값진 사역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용기를 본받았으면 좋겠다. 

비록 아버지인 나는 좋은 환경과 좋은 부모 밑에서 양육 받지 못하여 상처가 있었더라도 내 자녀들과 후손들에게는 나의 상처를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상처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이 모 목사 사건과 같은 비극을 사전에 차단하는 길이다. 그렇게 해야 자녀들이 살고, 가정이 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역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 교회와 가정 밖에서는 '성격 좋고 덕망 있는 목사'라는 평을 받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밖에서의 스트레스를 핑계 삼아 폭군 남편이요, 아버지로 돌변해서 되겠는가?

아직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제2, 제3의 이 모 목사와 같은 아버지들이 어디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고, 아래로는 이웃(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돌보는 것이 사람의 제1되는 계명인데,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한 나머지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는 데는 소홀한 목회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균형을 잃은, 잘못된 신앙이다. 교회와 가정 밖에서는 '성격 좋고 덕망 있는 목사'라는 평을 받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밖에서의 스트레스를 핑계 삼아 폭군 남편이요, 아버지로 돌변해서 되겠는가? 

자신의 비전을 이루고, 성도들과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목회자가 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가정 안에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인정받는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가족과 성도들을 실족시키지 않는 길이며, 세상 많은 사람에게 본이 되는 목회자 본연의 모습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건강한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격이 아닐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

이계자 사모 / 뉴욕 광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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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2016-02-18 03:55:24
참 좋은 글을 사모님이 쓰셨네요. 아주 옳은 말씀이네요. 밖에서 너무 잘 하려 하고, 남에게 너무 인정받으려하는 것에 문제가 많이 생기지요. 외형주의에 가치를 너무 많이 두는지 스스로 잘 생각하여 후회없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밖에서 잘 하는 남자는 집에서 대개 문제가 많을 수 있습니다. 가정이 정말 중요하지요. 아내와 자녀에게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선배 목회자들이 교회를 위해 많이 희생한 것 좋은 태도요 감사한 일이지요. 이제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문화가 다릅니다. 가정을 돌아봅시다. 목회자들이 성공주의에 목숨 걸지 마시고 행복하게 목회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