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과 다르지 않은 칼뱅의 예정론 비판
운명론과 다르지 않은 칼뱅의 예정론 비판
  • 박창진
  • 승인 2009.10.31 14:1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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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경적인 예정론 정립을 위해

예정론에 있어서 '예정'과 '작정'은 칼뱅에게 동의어입니다. <기독교강요> 마지막 편에서 그는 구분하여 '작정'은 섭리론에서 다루고 '예정'은 구원론에서 다루고 있지만 동의어입니다.

칼뱅은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었다고 봅니다. 예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 우주 그 어디에도 없으며 그 무엇도 없다고 말합니다. 돌 하나가 어떤 지역에서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도 예정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절대 불변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그 사람이 영원한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이미 정해진 대로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쓰나미도, 태안반도의 기름 유출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뱅 작정론의 문제

▲ 칼빈의 <기독교강요>.
예정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신앙고백이겠지만 성경의 가르치는 바는 아닙니다. 그의 주장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을 임의로 무한대로 확장한 인간적인 사고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예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만을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예정한 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하지 않기를 원하셨는데, 아담이 자기 생각을 따라 살아서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예정하셔야만 우주 경영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에 매여 사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 있어서는 모든 것이 동시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경영에 있어서 특정한 영역에서 예정하셨지만 그 이외의 영역은 허용하신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언제 어떻게 땅으로 떨어지는가는 예정이 아니라 허용입니다. 예정과 허용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개념의 두 단어를 함께 붙여 사용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범죄의 경우에 대한 '허용적 작정'이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허용적 작정이란 신자나 사람의 범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신 바이긴 하지만 허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신자가 범죄하지 않기를 원하셔서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용적 작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범죄를 예정하시고서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길도 준비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범죄하도록 예정하시고 동시에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길도 만들어 두셨다는 말입니다. 모순입니다. 하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주장인 것입니다.

나름대로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한 집사님이 "목사님, 제가 지금 이 상태인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목사는 "집사님, 제가 지금 이 상태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하여 예수님을 더 온전히 닮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지난 삶에서 그 은혜를 언제나 온전히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 생각일까요? 목사의 생각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그 집사님의 질문은 예정론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에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예정론에 따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창세전에 정하셨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대로 지금 된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자신이 배운 바를 따라 생각하게 되는 것을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예정은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의 결과임에도 하나님께 그 책임을 넘기도록 길을 터놓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넘어서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전부터 지속된 하나님의 도우심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연약하여 넘어지거나 범죄의 경우에는 이미 피할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칼뱅식의 예정론은 그 내용에 있어서 숙명론, 운명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인생은 정해진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칼뱅의 예정론이 숙명론, 운명론과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그것이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나무 아래에서 입만 벌리고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명론, 운명론도 사람의 노력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떨어질 때까지 입만 벌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경우도 가능하고 사과를 따기 위해 사과나무를 올라가는 것도 가능합니다. 어떠하든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얻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칼뱅의 예정론도 마찬가지이며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차이는 칼뱅의 예정론은 하나님이 그 주체라고 하고 운명론, 숙명론은 그냥 하늘을 주체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정론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는 목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정론을 깊이 알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예정론을 말하고서는 그 안에서 생각하려고만 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자연재해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쉽게 운운하는 것의 배경에는 칼뱅식의 예정론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심판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전제가 있거나 아니면 언약의 백성과의 관계에서 부당한 핍박을 가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국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그러한 현상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시행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왜곡시키며 아주 나쁜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을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행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

예정이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하여 이전에 미리 정하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틀 안에 있는 우리와는 달리 동시적입니다. 영원에서 영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아십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일에 대해서는 정하셨습니다. 인간의 시간의 관점에서는 미래의 일이 정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일이 아니라.

예정에는 언제나 그 예정의 성취를 위한 섭리가 뒤따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기계적으로 성취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정이 인간과 관계되어 있는데,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자신들의 의지를 따라 삽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지를 따라 살기에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하여 예정하신 바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정하지 않으신 일들은 섭리가 뒤따르지 않습니다. 허용하신 일들인데 거기에는 섭리가 뒤따르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뜻이 그대로 반영되어 일이 진행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누리며 생활하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예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정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예정으로 제시되는 내용은 구속 역사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예정과 함께 이야기되는 성경의 내용을 살피면 이는 아주 분명합니다. (행 3:20, 행 4:28, 엡 1:5, 9, 11, 엡 3:11 등)

언약의 시대가 진전하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구속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이며 그 예정을 이루기 위한 섭리가 뒤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역사에 사람들이 악역을 담당하는데, 그것을 성경은 예정의 성취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사자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서 그러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섭리는 인간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도 예정된 것입니다. 이 땅의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복음을 듣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질 때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선택과 예정입니다.

구원받기 전의 상태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되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있어서의 예정은 반드시 구원을 얻은 이후에 그 구원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아직 구원을 얻은 자리에 나오지 못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원하심이 적용될 뿐입니다.

선택과 예정을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섭리는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 복음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인격적입니다.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합니다. 동시에 그 역사를 당사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반드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있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들에게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이후의 모든 삶이 예정되었다고 칼빈주의에서는 말합니다. 아침밥을 몇 숟가락으로 다 먹는가, 하루에 몇 번 화장실에 가는가도 예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받는 것도 예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을 임의로 확대한 것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앞뒤가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범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범죄하지 않도록 피할 길을 내신다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행하시면서 범죄를 예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은 예정하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이후의 삶은 예정이 아닙니다. 매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 곧 은혜로 바르게 받느냐 아니면 헛되이 받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고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깨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에 대해 죽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바르게 받는 삶입니다.

* 이 글은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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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2017-12-05 10:02:42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칼빈 사상에 대해서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알미니안과 대결하는 구도 속에서 칼빈의 사상을 재 이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래 댓글 남기신 분의 말처럼 칼빈의 예정론은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바울이 예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본문은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예정에 대하여 말할 때,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했다, 우리를 예정했다"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엄밀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무 세부적으로 개개인에게 나누어 적용하려 하는 것부터가 에베소서의 저작 목적을 저해할 수 있으며, 오류를 이해하도록 부추긴다고 생각합니다. 칼빈 신앙을 따르는 경우에도 보면,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쪼개어 이해하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러다보니 운명론적인 오류에 항상 빠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에 대하여서 교회를 예정하셨고, 사도행전에서 보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정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죠.
예정에 대해 기록이 있으니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너무 사변적으로 정의를 하려는 방식들이 오늘과 같은 오해를 낳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 자체 각권의 저작 목적과 문맥에 맞게끔 연구되어야 하며, 교리가 초대 중세 근대 교회사이긴 하나, 스콜라 신학처럼 너무 사변화 되어 있어 도리어 본문의 의미를 저해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김태길 2017-08-27 07:02:28
위의 글에 반박합니다. 칼빈의 예정신학은 숙명론과 운명론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의 글의 표현 중, “선택과 예정을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섭리는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 복음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인격적입니다.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주장에서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선택과 예정을 따라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 그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과, 또한 그와 동시에 둘째,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은 치명적인 모순입니다. “선택과 예정으로 구원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역사하기는 하는데,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야 가능하다”라는 말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모순입니다.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예정”이라는 성경적 단어(엡1:5, 11)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이며 불변하는 신적 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마치 개인에게 복음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하는 것까지만 역사하시고, 결국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야 가능하다”라는 주장은 성령님의 역사를 훼손할 뿐 아니라, 기독교 구원론을 이교도 진리로 전락시키는 꼴입니다.

김태길 2017-08-27 06:58:55
위의 글에 반박합니다. 칼빈의 예정신학은 숙명론과 운명론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의 글의 표현 중, “선택과 예정을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섭리는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 복음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인격적입니다.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주장에서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선택과 예정을 따라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 그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과, 또한 그와 동시에 둘째,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하다.” 치명적인 모순입니다. “선택과 예정으로 구원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역사하기는 하는데,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야 가능하다”라는 말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모순입니다.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예정”이라는 성경적 단어(엡1:5, 11)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이며 불변하는 신적 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마치 개인에게 복음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하는 것까지만 역사하시고,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야 가능하다”라는 주장은 성령님의 역사를 훼손할 뿐 아니라, 기독교 구원론을 이교도 진리로 전락시키는 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