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선생님의 밑구녁
교장 선생님의 밑구녁
  • 이계선
  • 승인 2016.03.08 05:4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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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한 박재필이사장은 헛기침으로 축사를 시작했다.

"에헴 에헴 에에헴... 친애하는 안중중학교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은 비가오나 눈이오나 3년 3개 성상을 형설의 공을 쌓으면서 아버지 같이 자애로우신 유세준 교장 선생님의 밑구녁 아래서 열심히 배우다가 이제 정든 학교를 떠나게..."

순간 웃음이 터졌다.

“호호호호 하하하하...”

울던 여학생들이 떼굴떼굴 굴면서 요절복통을 했다. 그러자 남학생 졸업생 축하객 할 것 없이 장내가 웃음바다가 됐다. “교장선생님의 밑구녁”소리에 놀란것이다. 하루도 아니고 3년 동안이나 교장선생님의 밑구녁 밑을 들락거리다가 이제 학교를 떠나게 됐다는 표현에 여학생들이 요절복통을 한것이다. 그야말로 맨붕이요 초토화였다.

“여러분, 이사장님의 표현이 그렇게 아주 틀린건 아닙니다. ‘아버님의 슬하를 떠나서’ 할때 ‘슬하’(膝下)를 순 한국말로 표현하면 ‘밑구녁 아래’ 와 비슷하니까요”

이종구 국어선생이 나서서 유권해석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안중중학교 다닐때 선배졸업식에서 있었던 해프닝이다. 우리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안중중학교 박재필이사장은 시골방앗간 주인아저씨다. 옛날 시골사람들처럼 욕과 사투리를 섞어 가면서 축사하면 효과가 더 할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 일 후로 이사장님은 두번 다시 밑구녁 축사를 안 했다. 대통령 연두교서 같은 근엄한 축사를 했다. 그런데 60년이 지나고 나니 이사장님의 밑구녁 축사가 그리워진다. 내가 다닌 안중중학교의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이다.

평택에서 서쪽 40리 안중에 일제시절 안중소학교가 있었다. 1.2등을 다투던 단짝 유세준 정시우는 서울로 올라가 나란히 경기중에 합격한다. 중학교 졸업이후 두 친구는 헤어져 진로를 달리한다. 유세준은 보성전문에 들어가 유진오의 애제자가 된다. 서울농업전문에 입학한 정시우는 여운형을 따라다니며 웅변과 정치를 배운다. 광복이 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정시우는 유세준을 찾았다.

“우리 서울에서 거창하게 구국운동할게 아니라 고향으로 내려갑시다. 안중에 중학교를 세우고 교육운동 농촌운동을 하는게 어떻소?”

“좋지”

고향으로 내려온 두친구는 안중에 천막을 치고 “안중고등공민학교”란 간판을 달았다. 둘은 단짝이지만 이복형제처럼 매사가 달랐다. 유세준은 은사 유진오를 닮아 깡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눈빛이 날카로운 학자풍이었다. 키가 큰 정시우는 타고난 웅변과 호방한 성품이 여운형을 빼어 닮은 영웅형이었다.

후에 안중중학교 교장과 교감이 된 두친구는 출근 방식도 달랐다. 아산만 바닷가에 사는 유세준 교장은 25리 먼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길이 사나워 반은 끌고 다녀야 했다. 중간 지점에 사는 나는 교장 선생님의 자전거가 나타나면 꽁무니를 따라 달렸다. 언덕배기를 만나면 밀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사는 정시우 교감은 걸어 다녀도 좋으련만 꼭 스즈끼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곤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 큰 키에 런던 포그를 걸쳐입은 멋쟁이 선생님. 삐까번쩍 거리는 스즈끼 오토바이를 몰고 안중 시내를 질주하면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러면 미장원 아가씨 다방 마담들이 문을 열고 뛰쳐나와 손을 흔들었다.

유세준 교장은 조랑말을 타고 다니는 제갈공명이다. 정시우 교감은 적토마를 타고 청룡연월도를 휘두르면서 천하를 호령하는 관운장이고. 그런데 두 사람은 평생 동지였다. 안중중학교의 교장과 교감으로 20년을 동행했다. 동기동창이니 교장과 교감을 좀 바꾸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고등학교가 생겨서 고등학교 교장으로 갈 때까지 정시우는 언제나 교감이었다.

   
▲ 방앗간 창고를 숲 속의 아카데미로 바꿔놓은 안중중학교 (이계선 목사 제공)

아무튼 안중고등공민학교 간판을 단 후 두사람은 지방 유지들을 찾아 나섰다. 현덕면 피우치의 이장헌, 검정굴의 이강헌, 포승면 살치미의 이민휘, 석정리의 최석화, 오성면 수촌의 박재필, 안중성공회의 박신부. 국회의원 군수 면장을 지낸 부자들이었다. 유세준의 논리와 정시우의 웅변에 감동한 그들은 열섬 스무섬 많게는 쌀 100섬을 내놓고 이사가 되어주었다. 그 돈으로 대지를 마련했다.

“어렵사리 학교 부지는 마련했지만 건물은 어림도 없군. 이제부터 그야말로 맨땅에 박치기야. 이사들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리는것도 염치없는 일인데 어떡하지?”

“유형, 내가 학생들을 이끌고 동냥을 다녀보겠소. 그냥 손 놓고 기다릴 수야 없지!”

시원시원한 정시우가 일어섰다. 정시우는 고등 공민학교 학생 70명 전교생을 모아놓고 교육 복음 전도(?)훈련을 시켰다. 4명이 한조를 만들어 4개면으로 내보냈다. 예수님이 복음 전도로 70문도를 보냈듯이. 정시우의 제자들은 4개면 120부락 3600세대를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교육 복음을 전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했다.

“안중에 중학교가 생기면 서부 4개 면의 문화가 발전합니다. 서울로 유학가지 않고도 싼 값에 공부할 수 있습니다. 교실을 짓는데 도와 주십시오”

덥석 쌀 한말을 퍼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겉보리 한되를 내놓기도 했다. 눈물겨운 사연이 이어졌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박재필 이사가 중대 결심을 한다. 안중 정미소를 내놓은 것이다. 안중 정미소는 보통 방앗간이 아니었다. 정부가 수곡수매한 벼를 찧는 정부미 방앗간이었다. 안중에서 제일 큰 기업이었다. 전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그러자 현대식 건물이 세워지고 중학교 인가를 받았다. 신바람이 난 선생님과 학생들은 매일 2시간씩 운동장 만들기에 매달렸다. 산비탈을 깎고 메꿔서 운동장을 만든다. 부르도저나 굴착기가 아니라 남녀 중학생들의 고사리손이 동원됐다. 삽과 곡갱이를 든채 정시우 교감 선생님의 명연설을 듣고 있으면 피가 솟아오르면서 사기충천 용기백배가 됐다. 우리는 백두산영봉에 태극기를 꽂는 용사들처럼 삽을 들고 담가를 멘채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운동장을 다 만들고 기념으로 아카시아 동산을 조성했다. 그때 나도 아카시아 한그루를 심었다. 60년이 됐으니 많이 컸을 게다. 박재필 이사장의 훈시를 듣고 깔깔 웃던 여학생들은 지금도 예쁘겠지? “밑구녁” 훈시를 생각하면 몰래 웃음이 나온다. 

등촌 이계선 목사 / 제1회 광양 신인문학상 소설 등단,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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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6-03-12 22:38:49
훈훈하고 정겹고 순수한 사람들의 얘기 잘 읽었습니다. 박재필 유세준 정시우... 이런 분들이 교회도 세우고 학교도 세우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kim5459 2016-03-12 22:33:05
훈훈하고 정겹고 순수한 사람들의 얘기 잘 읽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런 분들이 세웠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