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란 자기애를 뿌리째 뽑아낸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애를 뿌리째 뽑아낸 사람이다
  • 최태선
  • 승인 2009.11.04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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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평화의 사람들 ⑩ 자기 부인

악의 화신인 히틀러를 패망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독일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원자탄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원자탄 실험이 성공하자 '오 하나님 우리가 지옥을 만들었습니다'며 탄식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히틀러는 원자탄을 맞지 않은 반면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주민 10만여 명이 원자탄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 뒤 원자탄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그는 제 자식격인 원자폭탄과 부자의 인연을 끊고 열렬한 핵무기 반대 운동가로 변신했습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때로 인간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일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전혀 딴판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위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정부에서 하는 일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 오히려 약자들을 더욱 힘들고 어렵게 합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더 큰 다른 문제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다각도로 진단하여 또 다른 시도를 해보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위로를 받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을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만족함이 자신의 실패를 잊게 해줍니다. 특히 신앙인에게는 그 만족함이 순례의 여정에서 벗어난 자신을 까맣게 잊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단순히 '일중독'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보다 더 깊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그것을 줄곧 당연한 것이라 여겼기에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그 자아 위에 자연스럽게 삶의 토대를 세우게 됩니다. 인생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이유를 심사숙고하지만 자아라는 토대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란 드뭅니다. 아마도 그래서 역사는 반복되고 개인의 삶 또한 성숙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자아는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면서 개인의 성장을 가로막고 진정한 인격형성에 장애물이 됩니다. 이 자아의 문제를 해결할 때에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 부활에 이르는 온전한 변화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품으신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당신의 보혈을 통해 새생명을 얻게 될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이었다.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 고통 중에 피를 흘리시며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자기애'를 뿌리 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심는 것이었다. 자기를 향한 사랑이 줄어들 때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월터 제이 첸트리 <자기부인> P.25-

그리스도인이란 '자기애'를 뿌리째 뽑아낸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을 심은 자입니다. 때문에 영적 전쟁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영적 진보를 방해하는 섬뜩한 옛 원수는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 괴물은 자기를 섬기라고 날마다 소리를 지릅니다. 이 괴물은 그리스도께 도전하고 주님께 시간과 에너지와 사랑을 바치는 것에 저항합니다. 이 괴물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길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에게 가하는 결정적 타격뿐입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27:42)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처참한 예수님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조롱하며 던진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던진 말은 그 말 그대로 인류를 위한 예언입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18:19)이라는 조롱의 푯말이 그분의 진정한 신분을 말해 주었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비웃는 그 말에 진정 인류를 위한 예언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제 몸 하나 구하지 못하고 매달린 십자가에 남을 살리는 삶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남을 살리기 위해선 이처럼 자기 몸을 죽여야 한다고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소리 없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도 바울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5)라고 하였습니다. '다시는'이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와 닿습니다. 그렇게 단단히 마음  먹었지만 그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고전9:27) 여기서 사용된 '친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관자놀이와 같은 급소에 결정타를 날린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케이오 펀치를 날린다는 의미입니다. 날마다 자신에게 케이오 펀치를 날려야 살 수 있는 삶이 바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신앙의 삶입니다.

오늘날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위해 여러 방안들이 제시됩니다. 어떤 이들은 '꿈을 가진 자'(Visionary)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물론 개인들에게도 비전선언문을 작성하게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모두가 단기적, 중장기적인 목적을 설정합니다. 다 좋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의 논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삶을 낭비하지 않고 효율적인 시간 관리는 물론 가시적 성취가 용이해집니다. 그런 현상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같은 일들이 이 시대 자기를 숭배하는 풍조에 부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애'를 뿌리 뽑고,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냄으로 말미암아 자기만족의 길을 걷게 되기 십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기독교가 자기숭배의 종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선각자 자크 엘룰은 그런 사실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악한 것보다 자기의 선 때문에 더 악해질 수 있다.' 비전문을 작성하고 목적을 정하는 것이 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비전, 우리의 목적이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선 때문에 더 악해질 수 있는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기심은 죄악된 삶의 동력입니다. 이기심이라는 동력이 인간의 선천적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죄를 이기심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온통 지배하는 이 이기심을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실체를 완전히 파악한다고 해도 자신의 이기심을 이길 수 있는 장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자기부인'이라는 극단의 처방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펜하이머처럼 너무 늦기 전에, 인간이 자기의 선 때문에 더 악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4:2) 그 내용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랐던 사도 바울의 마음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요? 거듭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말씀이 주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자기부인의 힘든 대가를 치루고 날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진심으로,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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