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교회의 본을 쫓아
성경적 교회의 본을 쫓아
  • 강만원
  • 승인 2016.03.19 06:1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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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아르케처치' 설립 즈음에...
강만원 ⓒ <뉴스 M>

신약시대의 '교회'는 옛 성전과 구별해서 '새 성전'이나 '새 예루살렘' 같은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신약의 성경 원어 '에클레시아'라는 이름이 지지하듯이 교회가 더 이상 구약시대의 '돌 성전'과 달리 '부름 받은 성도'를 가리킨다는 말에는 한 치의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신약시대에도 물리적인 예배처소로서 예배당이 필요했지만, 영적이며 원형적인 관점에서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인 예배당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사실인즉, 오늘날 교회와 예배당을 일치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거룩한 성도'인 교회를 세속적인 외형주의로 타락하게 하는 빌미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진정한 교회는 과연 무엇인가? 신학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 가운데 어떤 정의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모름지기 교회를 정확히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께서 그 같은 믿음의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이에 대해 베드로만의 특별한 신앙고백으로 한정하는 것은 성경 해석의 명백한 오류다. 마르다, 도마, 세례 요한, 심지어 '귀신'까지 동일한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사람들, 예컨대 사도나 특별한 제자들, 또는 현대 교회의 성직자나 종교지도자가 아닌 예수께서 친히 '내가' 세우겠다고 하셨다는 중요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예수는 "교회를 세우겠다"며 일반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 교회'를 세우겠다며 단수인 동시에 '고유명사'로서 특별한 교회를 말씀하셨다. 종교적인 교회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교회로서 예수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물론 개(별)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회들'과 달리 가톨릭(catholic)은 공교회로서 하나의 교회를 주장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공교회는 무늬만 동일한 하나의 교회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고 성경적인 의미에서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의 교회'가 아니다. 가톨릭의 공교회는 '예수 교회'로서 '불변의 상수'가 아니라, 교회 권력을 장악한 교황 개인의 종교적인 이념이나 성향에 따라 성격이나 종교이념이 달라지는, 사실상 '교황의 교회'로서 '종속 변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무엇보다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I will build my Church)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선언에 주목한다. 예수는 누군가에게 교회를 세우라(let build)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세우겠다(will build)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는 교회가 본질상 '예수 교회'이며, 어떤 경우에도 교황이나 사제의 교회, 또는 목사 교회일 수 없다는 명백한 선언이다.

덧붙여, '내 교회'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하시면서 네 양(your lambs, your sheep)이 아니라 My lambs, my sheep, 이를테면 예수의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사제나 목사의 양이 아니라 분명히 '예수의 양'이라면 오늘날 기존 교회에서 –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상관없이 - 흔히 보듯이 사제나 목사 같은 이른바 성직자들이 교회와 양의 주인이 아니라 오직 예수만이 교회와 양의 주인이시라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성경적인 원형 교회'로서 아르케처치를 주창하는 우리는 예수가, 오직 예수만이 '교회의 머리'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는 더 이상 육신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구체적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그리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예수를 대신해서 교회를 세워야 하는가? 역사적인 사실이 가리키듯이 사제나 목사 같은 성직자가 교회를 세워야 하는가? 나는 이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사제나 목사가 세운 '권위적인' 교회는 특정한 교리에 따른 종교적인 교회일 수는 있어도 결코 성경적인 교회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성속이원론에 근거하는 - 성속이원론은 비단 세상과 교회의 구별만이 아니다. 성에 속하는 성직자와 속에 속하는 평신도의 차별이 성속이원론의 핵심이다 - 사제나 목사 성직주의는 지금까지 예수 교회로서 '내 교회'(my church)를 세운 것이 아니라, 사제교회나 목사교회로서 종교적인 '내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며, 교회의 타락이 여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숨김없이 고백하는 타락한(?) 세리가 오히려 '구원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묵상하라. 교회는 이른바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이며, 예수는 사제나 목사가 아니라 성도가 교회의 운영주체라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이는 성도가 교회라는 말씀이며, 성도가 교회의 운영주체로서 그리스도의 몸(교회)를 움직이는 '살아있는 지체'라는 말씀이며, 지체인 그리스도인은 같은 지체에 지나지 않는 사제나 목사가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닌가.

이처럼 성경적인 교회, 예수가 머리이시며 성도가 운영주체인 교회, '너희가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리리라'(마18:18~20)며 예수께서 구원의 열쇠를 주신 교회는 결코 사제 교회나 목사 교회일 수 없다. 그것은 예수 교회이며, 성도 교회이며, 성경적인 원형 교회이다.

과연 이런 교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며 구원의 소망을 가슴 가득 품고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참 교회가 이 세상에 세워질 수 있을까? 종교적인 타성과 육체적인 신앙에 물든 자에게는 그것이 허황된 꿈이지만, 가슴과 영혼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품은 자에게는 구체적인 현실이며 찬란한 소망이다.

   
▲ 미주 강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가장 큰 결실이며 가슴 뿌듯한 기쁨은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 드디어 '피닉스 아르케처치'가 세워진 것이다. 피닉스 아르케처치 야외예배 모습. (강만원 선생 페이스북 갈무리)

미주 강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결실이 있었지만 가장 큰 결실이며 가슴 뿌듯한 기쁨은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 드디어 '피닉스 아르케처치'가 세워진 것이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을 기존 교회와 목사에게 충성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형제, 자매들이 마침내 주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목사 교회를 떠나 성경적인 교회, '아르케처치'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로 모였다.

피닉스 아르케처치는 지금까지 보았던 기존 교회들처럼 성직자가 '계급'으로 지배하는 종교적인 교회가 아니다. 성경을 통해 오롯이 계시하신 주의 가르침에 따라, 성도가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서로 섬기는 교회이며, 예수가 머리 되시는 성경적인 교회이다. 아르케처치에서 목사는 말씀 사역자로 설교와 교육에 전념하며, 재정·인사·행정의 일반 사역에 관여하지 않는다.

기존 교회에서 흔히 보듯이, 자기가 선택한 장로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합법을 빌미 삼아 목사가 교회의 제반 권력을 장악하는 '직분 중심'의 권위적인 당회가 없으며, '사역 중심'의 실무적인 운영위원회가 있다. 나아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운영위원회의 독주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위원장은 장로들 가운데 한 명이 교대로 임직하며,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의 의견에 따라 위원장을 선출한다. 모든 의결권은 교인들의 전체회의인 공동의회에 주어지며, 운영위원회는 안건을 심의하고, 사역부서는 의결된 사항을 집행하면서 '역할 분담'을 원칙으로 한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교인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십일조'와 헌금을 폐지하며, 신약시대의 성경적인 가르침에 따라 가난한 형제들을 돕기 위한 연보로 대체한다. 그리고 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구제에 먼저 사용하는 것은 지금까지 기존 교회들이 감히 실천하지 못했던 아르케처치의 중요한 강령이다.

교회의 타락이 성직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집중된 권력과 영적 교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목사 권력의 타파만으로 권력에 관한 모든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 일부 교회에서 보듯이 소위 '힘 있는 장로'나 '돈 많은 집사'도 목사 권력에 못지않게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케처치는 목사뿐 아니라 특정한 개인의 독재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런 모든 규범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하지만, 기존 교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교회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또는 효율적인 운영이라는 구실로 기존 교회는 소수의 교회 지도자(?)에게 은연중에 전적인 권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케처치는 성경에서 벗어난, 교회의 인위적인 권력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권력이 교회를 지배하는 순간, 권력의 속성상 소수의 집권자에 의해 교회가 타락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피닉스 아르케처치'는 교회의 권력 타파에 앞장서며, 비성경적인 요소들의 제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아르케처치의 강령들이 실천하기에 결코 간단하지 않겠지만, 피닉스 아르케처치의 '준비된' 형제, 자매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그들의 믿음과 순종의 결단을 지켜보면서 아르케처치가 추구하는 가치는 더 이상 '추상'이 아니라 '사실'이며, 허황된 꿈이 아니라 가슴 벅찬 소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이역 멀리 피닉스에 '아르케처치'를 세우신 주를 찬양하며, 피닉스 아르케처치의 자랑스러운 형제·자매들에게 열렬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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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 2016-03-19 08:38:43
공동체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파괴되고, 형제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생긴다."-장 바니에

다 맞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옳고 바르다는 자의식이 사라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모쪼록 강 선생님이 두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이끄는대로 갈 수 있는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려 2016-03-19 08:34:45
"공동체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파괴되고, 형제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생긴다."-장 바니에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항상 느껴지는 건 선생님의 강력한 힘과 주장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의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옳고 바르다는 자의식이 사라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모쪼록 강 선생님이 두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이끄는대로 갈 수 있는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