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야한 이야기
중년의 야한 이야기
  • 박일준
  • 승인 2016.03.24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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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동대 - 환상 속의 그녀]
   
▲ 이미지 출처 : http://arisolchan.tistory.com/

우리는 주디스 버틀러의 도발적인 책 『젠더 트러블』을 통해 성(sex)이 젠더(gender)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가 성을 결정한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우리는 20세기의 문화를 통해 ‘성’(sex)은 sexuality의 근원이며, 이는 본능적이어서 결코 인간의 의식적 힘으로 제어되지 않는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버틀러의 도발적 논제는 우리가 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이 상식이 사실은 문화적으로 꾸며진 것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문제는 이 버틀러의 논제를 이성으로 수긍한다 해도, 우리의 몸의 경험은 버틀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길을 걷는다. 나의 눈은 끊임없이 나의 동성인 존재들보다 이성인 존재들에게 먼저 향한다. 그런 나의 눈을 의식하고는 속 깊이 부끄러워 얼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거나 냉정하게 대하거나 혹은 쳐다봐야 하는 명분을 찾는다. 눈은 마치 내 의식 너머에 의식의 힘을 압도하는 그 무언가가 본능처럼 명령을 내린다는 듯이 이성(異性)의 대상을 향하고, 나의 의식 혹은 정신은 그에 대한 변명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이런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통상 프로이트 이래로 상식적으로 용인된 진실, 인간의 무의식은 성적이라는 말을 입증하는 듯이 보인다.

진화심리학에서는 남자들이 어린 여성을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여성의 최적 가임연령은 25세 전후인데, 유전자의 목적은 자신을 복제해서 다음세대로 전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자동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연령 대의 여성들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도록 뇌가 배선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의 성 전략은 서로 다른데, 여성은 남성과 달리 임신 기간이 무척 길다. 특별히 인간의 경우 거의 1년 가까운 장시간 동안 무거운 몸으로 다녀야 하기 때문에 성적 상대를 정하는 것은 여성에게 무척 신중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본능’은 그렇게 우리의 의식을 억누르고 주인이 되는 것인가? 프로이트의 이론을 따른다면 그렇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충실한 계승자로 스스로를 자처하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리비도 혹은 성적 욕구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desire)이다. 욕망은 ‘지금 내게 없는 것을 욕망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의 리비도로부터 라캉의 욕망 이론으로의 전환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서는 모든 문제가 개인의 본능과 욕구 조절이 문제이고, 그것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성장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일어난다. 그래서 환자의 사회적 상황이나 처지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성장과정을 되집어,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야기된 원인을 찾는다.

반면 남성은 임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최적의 성 전략은 가급적 많은 이성들과 관계해서 자신의 후손을 낳을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여기서 ‘가급적’이란 조건이 붙은 이유는 성적 활동에만 전적으로 자원과 에너지를 사용할 경우, 정작 생존에는 무능한 개체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은 여기서 묘하게도 중년들의 소위 ‘영계’ 환상을 두둔하는 듯하다.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고. 물론 나는 그렇게 믿지는 않는다. 본능적이라는 것이 그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성애적 본능의 남성은 이성을 향한 성적 본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본능을 표현하는 것이 어느 상황 어느 시점에서나 정당하거나 괜찮은 것은 전혀 아니다. 성 폭행 범죄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상습적인 범죄에 대한 변명은 그것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캉의 욕망 이론은 우리의 ‘주체’가 언제나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형성된 것임을 일러준다. 그래서 주체는 일관성있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주변 시선들과 기대들에 따라 단속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진다. 이 욕망의 주체, 즉 타자의 주체는 환상(fantasy)을 먹고 산다. 물론 자기만의 환상이다. 그 환상 속에서 나는 언제나 그들의 기대어린 시선을 충족한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매우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즉 내 환상 속의 그녀는 나의 이상형 그 이상인 것이다. 그녀만이 나를 바라보고 만족한다. 나는 그 환상 속의 그녀에게 이상적인 남자인 것이다.

라캉의 환상의 구조 속에서 ‘본능’은 욕망의 구조 안에서 작동한다. 환상은 본래부터 본능에 기반하여 창조된 나의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환상은 나에게 결여된 것을 뒤집어 보여준다. 환상 속에서 나의 그녀가 20대인 이유는 나의 생각 속에서 내가 언제나 20대이기 때문이다. 임사체험 즉 죽다 살아난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 임사체험 속에서 당신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는 동일하지 않다. 아동기의 내 모습과 청소년기의 내 모습과 청년기의 내 모습 그리고 이제 중년기의 내 모습 혹은 노년의 내 모습이 모두 다르다. 그것들 중 ‘임사체험’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재미있게도 임사체험을 하는 당사자의 생물학적 나이가 어떻게 되든지, 체험 주체가 인생의 절정기라고 생각하는 시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대개는 20대의 모습이다. 내 환상 속의 그녀가 20대인 이유이다.

   
▲ 철학자 자크 라캉

진화심리학은 그 환상 속의 그녀가 20대인 것은 그때가 최적의 가임기이고, 그래서 우리 속의 유전자는 그 연령대 이성을 보고 성적인 매력을 최고로 느끼도록 우리 두뇌를 회로화시켰다고 대답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사체험자들의 증언은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이미지는 언제나 자신의 전성기 즉 20대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임사체험의 증언은 진화심리학적인 설명이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왜 나는 나를 그렇게 절정의 멋진 모습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것인가?

욕망의 구조로 돌아가 보자. 욕망이란 지금 내게 결여된 것을 욕망하도록 한다. 즉 나는 내가 지금 현재 갖고 있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내가 20대의 멋진 모습을 욕망하며, 그런 모습으로 나의 이미지를 간직한다는 것은 곧 그것이 내게 “결여”(lack)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이런 말이 있다: ‘50대의 권력 욕은 20대의 성욕과 같다.’ 말하자면 사람 특별히 남자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욕망하는 것이 바뀐다는 것이다. 20대는 성, 30대는 돈, 40대는 명예, 50대는 권력 등.

오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예쁜 여자들을 따라가는 나의 시선은 어쩌면 ‘성욕’이 아니라, 나의 삶이 지금 가장 결여하고 있는 것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전성기, 나의 젊은 시절은 이미 갔다는 것을. 어느 순간 삶의 순간에서 나는 내 삶이 매우 헛된 것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노력들과 수고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다. 학위를 마치기 전까지 나는 학문이라는 것이 내 삶에 진리와 진실을 드러낼 것이라는 종말론적 기대가 있었다.

박사 과정 학위논문심사가 통과되고 나서, 졸업식까지 나는 거의 8-9개월이 시간이 있었다. 통상은 졸업식을 기다리지 않는다. 귀국해서 먼저 무언가를 시작하지만, 난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다. 논문이 끝났는데, 내게는 ‘심봤다’는 경험 혹은 진리가 계시되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나는 꽃집에서 배달 일을 하면서 막 석사공부를 시작한 아내 대신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기 시작했다. 졸업식이 끝났지만, 나의 삶의 진리의 계시같은 거창하고 특별한 경험은 없었다. 귀국해서 모교에서 강사로 일을 시작했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가정의 경제를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찾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참 정신없이 산다. 직업적 특성 상, 정해진 출근 시간은 없다. 하지만 같은 동전의 반대 면으로 보자면, 퇴근도 없다. 모든 것은 결과로 평가받을 뿐. 어떤 일이나 강의를 요청받았을 때, 내 사전에 절대로 거절은 없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지금 요청 들어올 때 벌어두지 않으면, 다음에는 강의나 일이 부족해 가정의 경제가 곤혹스러워질 때를 염려하는 탓이다. 이렇게 적고 있으니 내가 나의 삶을 참 ‘불쌍한 모습으로’ 기술하는 듯 하다. 그럴 생각으로 적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난 참 열심히 살았고, 성실히 일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 삶에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느덧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칠한 피부, 희끗한 머리칼, 피곤에 찌들은 눈가, 자신 없는 자세. 난 이런 모습의 나를 본 적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선을 다해 이루어내는 멋쟁이였지, 이런 후줄그레한 중년 아저씨가 아니었다.

이제 내게 20대는 없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강아지들(내 자녀들을 부르는 애칭이다), 귀엽고 대견하고 예쁜 나의 자식들과 수고하는 아내를 위한 것이다. 내 것은 없다. 괜찮다. 세상의 모든 평범한 아빠처럼 난 가족을 위해 일하는 가장일 뿐이다. 그 귀여운 강아지들을 위해서 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중년의 아빠일 뿐이다. 내 것은 없어도 좋다. 그 녀석들에게 풍족하지는 못해도,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몫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의 가장 큰 자부심이다.

그런데 문득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 찾아왔다. 뭐지? 난? 내 인생은? 아무 것도 내 것이 없었다. 난 그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는 생각? 아마 나의 아내는 나의 이런 생각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게 나지 당신이야?’라며 버럭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난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나는 그런 결여와 공백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우리 중년의 남자들은 푼수짓을 잘하고, 이상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 공백과 결여를 다루는 법을 모르니,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듯, 욕망이 가리키는 공백을 채우려고 무작정 달려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매매 종사여성의 숫자가 세계 2위란다. 1위가 어디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소위 ‘섹스 관광’으로 유명하다는 나라들이 모두 우리보다 아래다. 이건 무얼 의미할까? 대한민국의 중년들이 자신의 공백과 결여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훈계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성의 소비를 추구하는 주 소비계층이 난 20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대는 사실 경제력이 없다. 성을 소비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비할 만한 경제력이 있는 계층들에게나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중년이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못난 자화상이 바로 그 세계 2위의 성매매 종사자 숫자에 걸려 있는 것이다.

   
▲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내부자>에는 중년 노년 남성의 성 소비 행태가 가장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연출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을 수도 있겠고, 그런 일이 권력자들에게 일어날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영화의 장면들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런 일을 벌이는 이들을 체포하거나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바라보는 이들 즉 그렇게 성적 욕망을 만족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런 장면을 보여주었다는 것, 바로 이게 내가 주목하는 점이다. 그 영화는 그런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척 하지만, 사실 그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그런 욕망을 자극한다. 마치 포르노처럼 말이다. 왜 이 시대 중년 남성들은 그렇게 자극 받아야 할까? 그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 구조가 소비를 부추기는 욕망을 끝없이 자극하는 방식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히 우리가 결여한 것을 환상의 구조 속에서 치환시켜 욕망의 대상으로 보여주고, 갖고 싶도록 만든다. 우리 시대 중년 남성은 그렇게 구조화 되었고, 그렇게 구조에 길들여져 왔다.

내 ‘환상 속의 그녀’를 바라보는 서로 엇갈린 시선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내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나의 본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는 시선. 그와는 달리,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나에게 결여된 것을 뒤집어서 가리킨다는 시선.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언급했다. ‘성’(sex)가 젠더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가 우리의 ‘성’을 결정한다는 그녀의 혁명적인 발언 말이다. 우리의 이야기에 버틀러의 말을 적용하자면, 환상 속의 그녀는 성의 산물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자본주의적 소비구조의 젠더 경계가 창출한 것이고, 우리는 그를 통해 ‘성’(性)을 신체화시키고 있다.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세계2위의 성매매 산업은 성이라는 본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본주의적 소비구조가 창출하는 이성애에 기반한 젠더 개념 즉 성 역할 개념에 근거하여 (일종의 사회 무의식과 같은 차원에서) 유래하는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통해 성적 만족과 유희를 추구하는 그대들은 당신 내면의 본래적인 그 어떤 것에 따라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소비구조가 만들어낸 허위의 성을 당신이 결여한 진정한 것으로 믿으며 소비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구조에 의해 조종되고 조작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현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공’(空)이라고 불교는 말하지 않던가?

당신이 불끈 갖고 있는 성적 욕망은 당신이 갖고 싶은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은폐한다: 당신 자신.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제는 후줄그레하고 쭈글쭈글하고 구부정한 당신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내 의식의 경계를 침범해 오는 나의 진상(眞相),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는 또 ‘환상 속의 그녀’를 만들고 찾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사라져갈 것이다. 사라진다는 것이 슬픈 것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져간다. 어떻게 사라져가는지가 중요할 뿐. 내 환상 속의 그녀를 쫓다가 사라져 갈 수도 있다. 내 소중한 강아지들을 위해 살다 소진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 어떤 사라짐을 선택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자. 생명의 과정은 누군가 사라지고, 누군가 태어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누군가는 사라져야 하고, 언젠가 나도 그 사라져야 할 사람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니 그대 서러워 말라. 내가 남겨두고 갈 다음 세대가 바로 다음 시절에 당신을 구현할테니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고백하는 개신교인들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객관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을 이야기한다. 불멸하는 것은 오직 객관적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으로 죽지 않고 이어져 가지만, 내 자신의 주체로 보자면, 나는 다음 세대를 살아남지 못한다. 생물학의 진리이다. 우리에게 젊은 날 ‘성’(性)이 작동하는 것은 본능일 것이다. 중년의 우리에게는 그 환상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바꿀 줄을 모른다. 라캉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모든 주체는 타인의 시선과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아주는지가 그렇게 중요하다. 하지만 대다수는 우리가 사라지고 난 후,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지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그래서 타인들의 시선 앞에서 자꾸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헛발질을 한다.

힘이 있는 내 앞에 머리를 숙이는 그들을 보면서, 나의 환상 속의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멋져 오빠!  그건 당신만의 착각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당신이 부재할 때,’ ‘당신이 이 삶으로부터 결여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당신을 기억할까? 대부분의 우리들은 다음 세대의 기억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살면서 그들이 우리를 기억할만한 일들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 ‘객관적 불멸성’을 ‘하나님 나라의 심판’이라고 했다.

나는 나로 살아남지 않는다. 나를 기억하는 타인들의 기억 속에 불멸할 뿐이다. ‘환상 속의 그녀’는 우리에게 그 지혜를 가르쳐 줄 뿐이다.

박일준 교수 /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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