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뉴욕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 유영
  • 승인 2016.04.1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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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2주기 추모 집회, 후러싱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열려
집회를 마치고 참가자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참가자들은 절대 잊지 않겠다고,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 <뉴스 M> 유영 기자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 유영 기자] 뉴욕에서도 4.16 추모 행사가 열렸다. '세월호를 잊지 않는 뉴욕 뉴저지 사람들의 모임'(세사모)은 세월호 추모 집회를 뉴욕에 있는 후러싱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진실이 인양되기를 바라는 교민 1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추모 집회는 지난 2년을 돌아보며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은 물론 진실이 인양되고 더 안전한 세상이 되는 희망을 나누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9명과 희생자 304명을 위한 묵념의 시간으로 집회를 열었다. 많은 참석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애도했다. 

묵념을 마치고 참석자들은 추모 집회에 함께 참석하지 못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격려 메시지를 들었다. 세월호 유가족 '건우 아빠' 김정윤 씨가 뉴욕·뉴저지 지역 추모 집회 참석자들에게 전하는 인사 편지를 시작으로 영상 편지가 이어졌다.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를 숭배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이 사회에서 부유층은 모든 부분에서 강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약자로만 살아야 합니다. 강자가 되기 원하는 다수의 서민은 재산 축적에 집착하고, 우리 사회는 그렇게 윤리와 도덕을 잃어갑니다. 이 사회는 자정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을 잃은 부모는 단식하며 싸웠습니다.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가 유일한 요구 사항이었습니다. 같은 목소리로 같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변화는 없었습니다. 특별법과 시행령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진상 규명을 시작도 못 한 채 진실은 여전히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부모들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꼭 진실을 밝히겠다고 아들 건우와 아들 친구들에게 약속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는 세월호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고 부모들은 이야기합니다. 진실의 강이 흐르는 세상이 되도록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잊지 말고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유경근 위원장은 미국에서 계속해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2주기 행사에 참석해 준 교민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한국에서 함께해 주는 사람들만 아니라 교민들이 함께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큰 힘을 얻는다고 강조했다. 

"미국에 계신 교민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입니다. 저희도 열심히 싸웠지만, 교민 여러분도 싸워주셔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점점 대한민국은 암울한 사회가 되어가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 간다면, 세월호 진실을 밝히고 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꼭 집적 만나고 싶습니다. 멀리 있지만,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것을 기억합니다. 많은 일정과 행사를 준비하면서 언제나 웃으면서 기쁘게 하십시오. 그럼 우리 유가족들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함께해 주십시오." 

유경근 위원장 외에도 승묵 학생 엄마 은인숙 씨 등 6명의 영상 편지가 이어졌다. 유가족들은 모두 해외에서 함께 진실을 인양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더불어 이러한 시간을 통해 더 안전한 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버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업사이드 다운'의 감독 김동빈 감독과 집회 사회를 맡은 세사모 집행부 김대종 씨가 영화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뉴스 M> 유영 기자

세월호 참사 후, 2년의 시간과 현재를 돌아보는 1부 마지막 순서는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업사이드 다운' 김동빈 감독과 대화의 시간이었다. 재미교포인 김 감독은 세월호 사건 보도를 보고 지난 2014년 7월 한국에 왔다. 이후 유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녀를 잃은 아버지들의 목소리, 아이들의 목소리, 사건을 바라보는 언론, 해양, 정치 분야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담아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인터뷰 확인)

진실이 인양되고, 안전한 나라가 되는 소망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아픔의 시간을 함께 이겨내려면 희망이 필요하다. 더불어 예술은 아직 보지 못한 희망을 함께 보고 기다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번 추모 집회 2부는 희망을 기다리며 준비한 예술 행사로 진행했다. 추모 집회 참석자들은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 낭송을 들으며 진실이 이뤄낼 승리를 기다리는 희망을 잃지 말자는 마음을 나누었다. 

예술 집단 '크리에이트'가 세월호 2주기를 맞아 그린 그림. 크리에이트 작가들은 그림을 들고 타임스퀘어를 걸으며,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렸다. ⓒ <뉴스 M> 유영 기자
크리에이트를 대표해 캔디 고 씨가 단체를 소개했다. ⓒ <뉴스 M> 경소영 기자

한국에서 온 직장인들이 모인 예술 집단, 크리에이트(K/REATE)는 그림을 통해 세월호를 계속 기억하고 알리는 작업으로 이번 추모 행사에 동참했다. 크리에이트를 대표해 캔디 고 씨가 단체를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직장인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주로 한국을 알리는 기획으로 행사를 진행한다. 얼마 전에는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가 커서 온라인 전시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세월호 2주기를 위해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자고 했는데, 법적으로 문제가 돼서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서 움직이는 담을 만들자고 생각했는데, 실현이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캔버스에 그려서 이동식 전시를 기획했다. 지난 일요일에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 타임스퀘어에서 행진하며, 사람들에게 알렸다."

희망을 나누는 노래를 준비한 이들도 있었다. 뮤지컬 배우 공에스더 씨와 음악감독 서혜선 씨는 '내 영혼 바람되어'와 'over the rainbow'로 위로와 희망을 함께 노래했다. 엄마와 딸이 CCM으로 하나님 나라 소망을 노래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정인영 씨와 하예은 양은 '그가 다스리는 그의 나라에서'를 부르며,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원했다. 

엄마와 딸이 CCM으로 하나님 나라 소망을 노래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정인영 씨와 하예은 양은 '그가 다스리는 그의 나라에서'를 부르며,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원했다. ⓒ <뉴스 M> 유영 기자

김동빈 감독과 관객의 일문일답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하게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하다.

사건이 일어나고 언론의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건 다음 날 종편에서 유가족 보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시민들이 소식을 듣는 통로는 미디어다. 언론이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된다. 바로 다음 날 돈 이야기가 나오면 시민들은 사건을 돈과 연계해 생각한다. 이 장면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가 모이고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몇 명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유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는 많이 나왔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조명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크게 세 가지를 다룬다. 부모의 이야기, 아이들의 이야기, 전문가들의 지적. 세계에서 저명한 해양 관련 교수, 언론인, 정치인 등의 이야기를 모았다. 

영화를 촬영한 기간은 1달 반 정도다. 지난 2014년 7월에 갔다가 잠시 돌아왔고, 그해 12월에 한국에 가서 지금까지 살았다. 영화는 모두 재능 기부로 만들었다. 작가와 카메라 감독 등 몇 명만 빼고, 모두 영화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자진해서 돕겠다고 나섰다. 80여 명이 함께 도와주었다. 

영화에 나온 아버지 네 분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유가족이 국회에 농성하러 간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함께 머물렀다. 국회에 있을 때, 언론이 취재를 정말 많이 왔다. 자기들이 쓰고 싶은 기사를 머리에 넣고 온 기자들이 부모들 멘트를 기사에 끼워 넣는다. 그건 교감이 아니다. 

김동빈 감독은 세월호 참사를 보며, 한국 사회 부조리가 그대로 담겼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재미교포인 김 감독은 세월호 사건 보도를 보고 지난 2014년 7월 한국에 왔다. 이후 유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녀를 잃은 아버지들의 목소리, 아이들의 목소리, 사건을 바라보는 언론, 해양, 정치 분야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담아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 <뉴스 M> 유영 기자

우리 다큐멘터리 팀은 유가족과 함께 생활하는데 집중했다. 함께 지냈다. 그러면서 유가족이 우리를 많이 신뢰해 주셨다. 아버지들 촬영은 미국에 바로 돌아오기 전에 촬영했다. 만약에 처음 만났을 때 인터뷰했다면 영화에 담긴 자연스러움은 없었을 것 같다.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신나하신다. 살아 있는 것처럼 말한다. 

아버지를 다루고 싶었다. 기획을 하면서 어머니들 인터뷰는 많이 본 것 같은데, 아버지들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국회에 갔을 때, 아버지들 이야기를 담자고 팀원들에게 말했다. 아픔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잠을 못 자고, 아프고, 힘들다. 그건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감독의 시각으로 본 한국 사회는 어떤가.

자료를 모으러 한국에 갔을 때 너무 많은 게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로 한국 사회 병폐가 드러났다. 언론과 안전 인식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사건 초기, 정부가 탑승객 수를 계속 바꿨다. 처음은 실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바뀐다면 왜 바뀌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언론은 그러지 않았다. 그대로 받아 적기만 했다. 

공감하고, 상처를 치유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상처가 나면 못 본 척하고, 옷으로 바로 상처를 가려야 하는 분위기라고 느껴졌다. 한국 사회는 유가족에게 그만하라고 말한다. 교통사고와 다를 바 없다는 의식이 여전하다. 미국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부모가 받을 보상금 관련 정부 발표문을 보았다.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지내온 과거 사건들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지난 보상 문제가 드러났을 때, 삭발식을 했다. 강행해야만 하는 사회적 분위기였나.

한국 사회는 피해자를 피해자로 놔두지 않는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 세월호 참사는 언론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면서 유가족을 가해자 취급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런 목소리가 높다. 내가 느끼기에 그동안 한국 사회가 경험한 많은 참사에서 같은 모습이었다. 이전에 있었던 많은 사고의 피해자 유가족들은 세월호보다도 못했다.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고 끝난 일이 너무 많다. 

바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영화 마지막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 일어난 메르스 사태 당시, 뉴스 멘트를 모아서 보여준다. 메르스는 질병인데, 경제부처에 해결하라고 청와대에서 이야기한다. 관광객이 떨어지니 어떻게 하라는 말이다. 정확히 정부에서 말한 건 경제가 악화되니 경제부가 컨트롤타워가 되어서 마치라고 말하고 영화를 끝냈다. 

세월호 희생자 세희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전경으로 병역을 마쳤다. 당시에도 사회적 파장이 컷던 여객선 침몰 사고가 있었다. 그때도 유가족은 항의했고 정부는 덮으려고만 했다. 세희 아버지가 당시 유가족을 막는 전경이었다. 그런데 그 전경이 이제는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전혀 변한 게 없다. 

영화 촬영하면서 힘들 일이 많았을 것이라고 보는데, 가장 힘들었던 일과 좋았던 일은.

'업사이드 다운' 김동빈 감독 ⓒ <뉴스 M> 유영 기자

영화 제작비용을 시민들이 모아주셨다. 모금을 했다. 소중한 영화고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당시를 돌아보면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시간과 재능을 많은 사람의 투자가 있었다. 기억에 남는 재능 기부가 있다. 아르바이트 두 개를 해야 생계가 유지되는 분이 하나를 포기하고 자료를 조사해 주었다. 그런 부분이 모여 만들어진 영화라는 게 감사하다. 

유가족 부모 옆에서 지내면서 함께 비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유가족들과 서명을 받기 위해 전국 행진을 할 때였다. 뒤에서 오 분간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사람도 있었고, 경찰이 통제하는데도 사람을 칠 기세로 우회전해서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정부 부처 관계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힘들었다. 행정부 누군가를 취재하러 가면 해외연수를 갔다고 한다. 갈 때마다 그랬다. 그래서 매일 해외연수를 가시는구나 싶었다.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정부 관계자들의 태도가 무척 아쉬웠다. 

왜 중국 인양 업체를 선정했다고 생각하는가.

중국 업체를 선정한 과정도 모호하다. 처음에는 언딘에서 인양하려고 했는데, 여론의 반발이 심했다. 입찰로 변경했는데 중국 업체가 선정됐다. 영국 업체가 입찰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고 들었다. 정보 공개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유가족들은 생각하고 있다. 중국 업체는 일체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동참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이라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하지만 팀원들은 영화인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동참해 주었다. 이곳에서도 직업과 여러 상황에서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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