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권사가 되기 싫다고 하셨어!!
어머니는 권사가 되기 싫다고 하셨어!!
  • 유영
  • 승인 2016.05.10 02: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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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온 지 몇 개월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머니가 무척 그립다.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란 특별한 존재일 터이다. 당연히 나에게도 그렇다. 미국에서 첫 어머니의 날을 보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을 보며,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섬겼을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제 권사 안수를 받은 지 11개월이 지났을 어머니의 고군분투 교회 생활이 눈물겹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넘어지고 힘겨워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고, 불의에 맞서고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는 참 신앙도 보았다. 어머니의 날을 맞아 어머니와 신앙생활하며 느끼고 생각했던 점을 몇 주간 연재하려고 한다. 1년 전 어머니가 권사 안수받던 날 편지처럼 썼던, 하지만 어머니는 보지 못했던 글로 시작하려고 한다.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 유영 기자] 지난 2015년 6월, 어머니가 권사 안수를 받았다.(어머니는 예장 통합 교단에서만 신앙생활을 했다.) 30년 가까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회 직분자가 되는 행사에 부정적인 생각이 커졌는데, 어머니의 임직식은 느낌이 달랐다. 감동이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그동안 교회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많은 일이 떠올라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40년 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머니는 임직을 거부하던 분이었다. 가장 가까운 경험은 10년 넘게 분쟁한 이전 교회에서 있었다. 교회 부목사는 어머니에게 권사 임직을 줄기차게 제의했다. 물론 어머니는 줄기차게 거부했다. 임직 특별 헌금을 강요하는 분위기와 권위적인 임직자들의 자세에 큰 거부감을 느끼셨던 탓이다.

한 번은 아들이 신대원생이라는 사실을 건드리며 임직을 요청했다. 아들이 목사가 될 때 어머니가 서리 집사면 이상해 보이지 않겠냐고 교구 목사가 말했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감정은 동요했다. 몇 주를 기도하며 고민한 어머니는 임직을 거부하기로 했다. 아들을 위해 신앙의 양심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어머니가 다른 교회로 떠난 계기 중 하나도 임직이었다. 당시 교회는 분쟁이 한창 심화하고 있었다. 원로목사와 원로목사가 불법으로 앉힌 담임목사가 교회 권력을 두고 싸움을 시작했다. 담임목사 측 부목사들이 몇백 명의 교인이 임직하도록 유도했다. 300명이 안수를 받은 화려했던 그해 임직식은 입금행사로 전락했다. 임직식이 싸움의 도구, 분란의 돈줄이 될 입금 행사로 보였던 어머니는 교구 목사의 마지막 권유마저 뿌리치고 교회를 떠났다. 

어머니는 분란의 중심에 있던 담임목사를 찾아가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강단이 있었다. 덕분에 15년 이상 몸담았던 구역이 사라지고 일터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집 근처 구역으로 강제 이동됐지만, 어머니는 할 말은 하는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임직을 한다고 했을 땐 놀랍기 그지없었다.

교회를 떠나고 어머니는 가나안 성도로 1년 넘게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녔다. 50 중반을 바라보던 시기에 교회를 옮기는 일도 쉽지 않았다. 예배 문화, 교회 분위기, 사람들에 익숙해지는 일은 고통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어려움이 컸다. 찬양 예배는 너무 시끄러웠고, 예식이 충실하면 삶으로 실천할 메시지가 약하게 느껴졌다. 신앙생활이 아닌 생활신앙을 강조하던 어머니에게 교회 생활만 강조하는 교회는 교회 답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몇 년 전, 다시 교회에 정착했다고 말했을 때 참으로 기뻤다. 예배 예식과 교회 정관, 설교가 모두 적응을 돕는다고 했다. 담임목사 및 부교역자 임기 제도는 물론 임직자도 모두 임기가 있었다. 임직자를 선출하는 교인 투표가 그나마 잘 작동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선출하는 임직자도 교인 추천과 투표로 결정되고, 후보에 올라도 일정 비율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임직할 수 없다. 후보에 5년간 올랐는데도 임직하지 못한 교인도 있었다. 교회에서 받는 특별 헌금도 없다.

어머니가 나가는 교회를 나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건조하게 듣기만 했던 임직 제도가 어머니의 임직으로 새롭게 보였다. 어머니가 임직을 원하지 않았는데 교인들이 후보로 추천하고, 투표로 선출해 준 것이 감사했다. 교인들의 지지로 권사가 된 어머니도 임직을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말도 정확하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아들 부부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어머니는 내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몸소 보여준 유일한 분이었고 인생의 스승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어머니만 보일 수 있는 모습의 권사로 남아 주면 좋겠다. 한국교회에 흔하디흔한 권사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아들이 존경할 신앙인이자 임직자로 남아, 언젠가 은퇴 권사가 되는 날, 이날의 감격을 떠올리며 어떠한 임직 기간을 보내었나 되짚어 보면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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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사랑 2016-05-10 02:42:42
그런 좋은 교회는 교회 이름을 알리시면 더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