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설교...!
뻔한 설교...!
  • 강만원
  • 승인 2016.05.12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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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원  (<뉴스 M> 자료 사진)

어떤 교회이든 목사는 주일에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한다. 경우에 따라서 한두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고, 문단을 통째로 인용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눈치 빠른 교인들은 주일예배의 설교 제목과 인용 구절을 보는 순간 설교를 듣기도 전에 어떤 내용인지 대부분 감을 잡는다. 이미 목사들의 진부한 설교 패턴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인용하는 설교는 교인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교회에 바치라”는 내용으로 전해지고, ‘과부의 두 렙돈’을 인용하는 설교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남김없이 교회에 바치라”는 주제로 둔갑한다. 결국 부자는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고, 가난한 자는 가진 게 없다고 뒤로 빼지 말고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처럼 있는 것을 박박 긁어서 모두 바치라는 말이다. 

해서, 어떤 교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충성이며 순종’이라며 ‘재산목록 1호’를 주저 없이 쾌척(?)한다. 그래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은, 세상에 사는 동안 삼십, 육십, 백배의 보상이 있고 죽어서는 영생의 축복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가난한 교인들이다.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처지일망정 신실한 교인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자기와 가족이 굶는 일이 있어도 ‘헌금’만큼은 반드시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겪고 있는 가난의 고통도 견디기 힘든데, 헌금을 바치지 않아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영혼을 엄습하기 때문이다. 

그런 설교를 듣고 나면 가난한 교인들은 애써 주머니를 뒤지기 바쁘다. 그나마 얼마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가진 게 없으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없어서 바치지 못한다는 것은 변명이며,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는 준엄한 설교(?)를 듣는 순간, 어디서 빌려서라도 헌금을 내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어떤 교인은 집을 저당 잡혀 대출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교인은 ‘카드깡’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할 수 없는 교인은 홀로 탄식하며, 깊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설마...’라고 생각하는가? 맹신에 사로잡힌 교인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헌금을 요구하실까?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절대 계명’은 오직 하나,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라’는 하나님이 고작 “자기 배를 채우시기 위해서” 돈을 요구하신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믿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불신앙이며 가증스런 배역이다. 예수는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를 (물질로) 공경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화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자들이여!”라며 무섭게 질타하셨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바치는 고르반이 우선이라는 유대 장로들의 전통을 예수께서 ‘외식’이라며 저주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의 ‘중심’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이 “너희들이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는 척 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에 있는 거짓과 탐욕을 속속들이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라면서 사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헌금을 빙자해서 돈을 갈취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는 “돈을 사랑하는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말씀하셨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면, 십일조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신 구절에서도 심각한 해석의 오류가 있다. 흔히들 “너나없이 십일조를 바치라”는 뜻으로 해석하지만, 성경의 본래 의미는 ‘바치라’가 아니라 ‘나눠주라’이다. 문맥적인 해석을 하면 본문은, 십일조로 거둬들인 재물을 몰래 착복한 부자 제사장들에게, “내 것을 도둑질하지 말고 가난한 레위 지파에게 공정하게 나눠주라”고 엄히 명령하신 것이다. 분깃이 없는 가난한 레위 지파, 그리고 재산이 없는 과부, 고아 나그네에게 나눠주는 것, 그것이 바로 십일조를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준엄한 명령이었다. 

요즘 목사들이 십일조를 비롯한 가지가지 헌금을 거둬들이면서 정작 헌금의 목적인 구제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해외여행이나 쏘다니고 고급 차에 고급 주택에서 희희낙락하며 ‘자기 배를 불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면, 한 치의 오차 없이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스러운 얼굴 그대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헌금에 관한 내용만이 아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비판하지 말라’는 성경구절을 들이대는 목사의 속셈은, 교인들에게 감히 교회나 목사를 비판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모이기에 힘쓰라’는 구절을 주제로 선택한 목사는 세상만사 제쳐두고 교회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라고 선동하는 것이다. 설교시간에 느닷없이 솔로몬의 성전을 언급하는 목사는 “내가 솔로몬처럼 교회당을 멋지게 건축할 테니 교인들이 앞장서서 헌금을 많이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리석은 교인들은 목사가 강단에서, 심지어 사석에서조차 무슨 말을 하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양 ‘아멘’으로 화답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복 받는다는데,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목사가 의도하는 속셈과 실제로 같은지,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할 일이다. 사실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고, 사실이 아니라면 무조건 거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목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라면, 목사의 말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탄도 예수를 유혹하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지만, 예수는 사탄의 말이 거짓임을 즉각 깨닫고 사탄의 유혹을 뿌리친다. 

설교의 오류를 지적한다. 우선, ‘과부의 두 렙돈’의 메시지가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교인들이 자신과 가족은 굶고 헐벗을망정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치라는 말씀인가.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 돈을 요구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나눔, 그것이 바로 절대 계명인 하나님의 사랑이며 십일조의 기본정신이다. 

마리아의 향유 옥합이 과연 자신의 소유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을 교회에 바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듯이, 마리아의 향유는 예수의 장례를 위해서 ‘특별히 예정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의 향유’는 예수의 장례를 위한 하나님의 예정이었고, 예수를 지극히 사랑한 마리아가 아름다운 향유를 예수의 머리와 발에 부으며 사랑을 고백한 감동적인 사건이다. 잘난 교회당을 지으라고 바친 예물이 아니며, 목사의 음음한 탐욕을 충족시켜 주면서 속내는 자신의 복을 구하는 ‘미끼’가 아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히’ 예정하신 일을 제멋대로 일반화시키면서 ‘말씀’을 왜곡하지 말라는 말이다. 자신이 소유한 가장 비싼 것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라는 말에 하릴없이 속는 어리석은 교인들 덕분에 ‘빤쓰 목사’로 명성이 자자한 전광훈이 강단에서 거리낌 없이, “남자 교인이라면 자기 집문서를 들고 목사에게 주저 없이 건네주고, 여자 교인이라면 목사가 요구할 때 스스럼없이 빤쓰를 벗어야 진정한 교인이다”라는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에 근거하는 ‘이신칭의’, 이것이 기독교의 제일 공리가 아닌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독교 신앙의 근원이라면 말씀을 전하는 자, 그리고 듣는 자는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말, 이른바 ‘탐욕의 자기 언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히 둔갑시키지 말라는 말이다.  

‘바른 설교’를 위해서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목사가 혼자 생각하고 결정한 설교, 이를테면 일방적인 ‘주제설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설교에 전권을 쥐고 있는 목사는 ‘자기 말’을 하고 싶은 욕망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더욱이 교회에 특별한 일이 있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목사는 발등의 불을 먼저 꺼야 되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닥친 일에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이다. 그 순간, 목사의 머릿속에는 주일에 강단에서, 그리고 전체 교인들 앞에서 전할 설교주제가 이미 정해진다. 아직 남은 것은, 외형상 설교의 틀을 갖추기 위해서 성경에서 그럴듯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뿐이다. 결국 하나님 말씀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목사 생각이 먼저라는 말이다. 

반면에 목사가 임의대로 주제를 정하지 않고 ‘사전에 정해진 순서대로’ 강해 설교를 하면, 목사는 <상황에 따라> 오가는 설교를 하지 않고, <성경 말씀에 따라> 설교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가 말씀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목사를 주도해야 한다. 덧붙여, - 대형교회에서는 문제가 있겠지만 - 설교 시간에, 또는 설교를 마치고 교인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Q&A 방식으로 진행하면, 목사들이 지금처럼 설교를 빌미 삼아 자기 생각을 전하는 ‘연설’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인들과 소통하는 진정한 나눔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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