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와 암호
구호와 암호
  • 지성수
  • 승인 2016.05.19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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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수 목사

TV 뉴스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 장면을 자주 본다. 구호는 혼자 외치는 것이 아니고 군중과 함께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구호에는 강자의 구호와 약자의 구호가 있다. 예를 들어 나치 시대나 지금 북한처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대중을 선전 선동시키기 위해서 만들어 내는 구호는 강자의 구호이다. 한국의 역대 정권이 만들었던 관변단체들의 무순한 구호들을 생각해 보면 알만하다. 강자의 구호는 강요지만 약자의 구호는 호소이다. 하지만 어떤 구호이든 구호는 부르짖는 사람은 나름대로 절박하지만 반드시 반대편은 듣기 싫은 것이다.

지금 기독교계에는 유치환의 ‘깃발’에 나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니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아우성’ 이 대단하다. 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은 지금까지의 경이로운 한국 교회의 성장이 기독교가 들어온 지 1 세기만에 신자가 감소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독교의 부흥은 그야말로 유구한 민족사의 안목으로 볼 때 반짝 경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의 전도방식은 강자가 구호를 위치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구호의 반대는 암호다. 구호는 외쳐야 하는 것이지만 암호는 풀어야 하는 것이다. 암호는 함부로 떠드는 것이 아니고 비밀스럽게 간직하는 것이다. 요즘은 password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 나는 삶의 숙제를 푸는 암호로 예수를 받아들였다. 암호로서의 예수를 생각하던 중에 최근에 슬라보예 지젝의 책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읽었다. 

지젝은 동구 공산권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란 우리로서는 전혀 접할 수 없던 내용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스탈린 체제는 엄격한 중앙집권적 체제로서 스탈린으로부터 밑바닥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인류역사상 가장 무서운 통치체제였다. 그런데 여기에 수수께끼가 있는데 주요 정책을 집행할 때 “무엇을 하라”는 정확한 명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29-30년 국유화 운동에서 국유화 방식에 대한 상세한 지침은 한 번도 하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지침을 요구한 지방 관리들은 견책을 당했단다. 실제로 하달된 것은 1929년 12월에 스탈린이 공산주의 아카데미에서 행한 연설이었다. 그러니까 그 연설을 듣고 읽고 감동 받은 대로 알아서 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지방에서 부농에 대한 박해가 좀 가혹하다 싶으면 스탈린이 좀 부드러운 교서를 발표해서 책임은 지방 관료들의 과잉충성으로 돌리고 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스탈린 치하에서 중대한 정책상의 변화는 명확한 지침이 아니라 추상적인 ‘암호’로 전해졌다. 왜냐하면 공개적인 정책 선언과는 달리 암호는 공식적 언급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불리하게 되면 언제든지 부인하거나 재해석하기가 훨씬 쉬운 것이다. 이런 방식은 스탈린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권에서는 통용되는 방법론이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 때 ’百花齊放‘론도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하려 할 때도 ’黑猫白描’(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기만 하면 된다)론도 마찬가지였다. 방향만 철학적으로 제시하면 그것을 해석해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일이 잘못되면 해석을 잘못한 편이 책임을 지는 것이지 발표한 사람은 책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정책을 발표할 때 간략한 법조문 보다는 긴 논문을 발표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남한의 선거에 대하여 김정은 동무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현 단계 정세에서 민족의 통일에 관하여 남한 선거가 미치는 영향을 북조선 인민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이유에 대하여”식의 긴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래에서는 그 논문을 놓고 밤샘 토론해서 머리를 짜서 실천에 옮기고 결과가 잘못 되면 ‘지도자 동지의 뜻’을 잘못 해석했다고 숙청당하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제도가 아닌가? 

하나님의 예수를 보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암호와 같은 방식이 아닐까? 그 속에는 우리가 풀어야할 수많은 단계별 암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기독교 시장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져서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셔서 죽은 다음 천국으로 인도한다’라는 가장 단순한 해석이 독점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전에 예수를 한번 면회도 해보지 못한 바울이 유대교의 입장을 가지고 유대교를 상대로 설명하려 애썼던 노력을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우리가 더 깊이 풀어내야 할 암호가 많이 남아있고 이런 것들을 풀어내야 하는 것이 바로 신학의 역할인 것이다. 20 세기 중반 사해문서의 발견으로 숨겨진 있던 암호를 풀 새로운 단서가 발견되었지만 다시 사해문서는 가톨릭의 손으로 넘어가 문서에 대한 정보를 가톨릭이 독점해서 자기들 편에서 필요한 정보만 공개하고 있는 사정이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라서 시간이 흐르면서 정보가 살살 새어나가 새로운 암호 풀이가 시작되고 있다. 기대하시라! 숙청당할 자는 누구일까? 

스탈린 치하에서 중대한 정책상의 변화는 명확한 지침이 아니라 추상적인 ‘암호’로 전해졌다. 공개적인 정책 선언과는 달리 암호는 공식적 언급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불리하게 되면 언제든지 부인하거나 재해석하기가 훨씬 쉬웠다. 하나님의 예수를 보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암호와 같은 방식이 아닐까? 예수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우리가 더 깊이 풀어내야 할 암호가 많이 남아있고 이런 것들을 풀어내야 하는 것이 바로 신학의 역할인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라서 시간이 흐르면서 정보가 살살 새어나가 새로운 암호 풀이가 시작되고 있다. 기대하시라! 숙청당할 자는 누구일까?

64개 민족이 산다는 호주에서 기독교인인 내 입장에서 좋은 일은 이 세계의 모든 종교들을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평생 믿어온 기독교 중에도 듣도 보도 못한 것이 있더라는 것이다. 교회사에서나 존재하는 네스토리안(경교)도 있고 삼위일체 신학논쟁을 불러일으킨 유니테리언도 있어서 기독교가 정말로 다양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시리안 정교회에 갔더니 아랍어로 미사를 드리는데 십자가가 있는 것만 빼면 도무지 기독교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박해를 2000년 동안이나 받아 오면서 생존해 온 이집트의 콥틱교도 있다. 그들은 비록 로마 교황청에 비하면 땅거지 수준이지만 현재도 그들 나름의 교황제도도 보존 하고 있다. 오히려 로마 교황청은 짝퉁이라고 우습게 여기면서……. 

우리 집 아이들은 주일 학교와 학생회를 다니지 않고 자랐다. 내가 일반 목회를 할 때는 별 수 없이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소위 길거리 목회로 나서고서는 반드시 소속된 교회가 없어서 교회를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주일에 집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면 “그러려면 교회라도(?) 다녀라”고 강력하게 권하기는 했었다.

마지못해 몇 번 교회에 가보기는 했지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쩐지 재미없고, 어쩐지 좀팽이 같고 등등 하여간 닮고 싶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가 싫으면 성당에라도 가라고 여러 번 권유를 해서 성당도 몇 번 갔었지만 그곳에서도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연유로 우리 아이들은 전혀 전형적인(?) 목사집 아들답게 자라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원래부터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방해하는 학교 교육 보다도 더 주입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육을 찬성하지 않았다. 단편적이고 편파적인 성경지식을 어렸을 적부터 주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균형 잡힌 사고를 결여한 단세포 동물처럼 될 수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은 오히려 이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암호를 푸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퍼즐 게임 같은 교회 안에서 성행하는 대게의 성경공부라는 것들에 관심이 없다. 퍼즐 맞추기는 답은 하나 밖에 없고 처음에는 어렵다가 하면 할수록 쉬워지는, 즉 답이 이미 다 나와 있는 게임이다. 진정한 성경 공부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근원적인 질문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질문을 제한시키고, 질문을 그렇고 그런 스테레오타입의 질문들로 환원시켜 버린다. 즉 사람을 앵무새로 만든다. 

지성수 목사 / 군종, 교목, 원목, 빈민 목회, 산업 목회, 개척 교회, 이민 목회등을 거쳐서 지금은 현장 목회를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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