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의 변질과 부활
십일조의 변질과 부활
  • 신성남
  • 승인 2016.06.05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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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 (2)
신성남 집사 (<미주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바리새인과 랍비들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한 십일조는 로마 제국 시대와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변절되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잘 내면, 악한 자가 지옥에서 받는 열두 달 동안의 형벌에서 면제된다"고까지 황당하게 부추겼다고 합니다. 이런 엽기적인 선동은 "십일조 안 내는 자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큰 소리 치는 한국의 어느 목사님을 연상케 합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이 멸망한 후인 신약 초대교회 시기에는 십일조를 잘해야 한다거나, 또는 잘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박해 시대를 거쳐 황제에 의해 공인되기 전인 4 세기 초가 될 때까지도 십일조가 헌금의 일종으로 바쳐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십일조를 안 가르쳤다는 실제적 증거입니다. 특히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일조라는 것은 할례보다도 구속력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세가 확장되고 교권력이 강화되면서 십일조 복원이 시도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암브로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십일조를 거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들은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고, 서방 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심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밀고 당기다가 결국 한참 후대인 AD 585 년에 가서야 마콘(Macon) 교부회의에서 십일조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십일조는 점차로 강제성을 지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교부 회의들도 십일조를 속속 채택하였고, 결국은 AD 800 년 경 ‘샤를레망(Charlemagne)’ 대제 때 비로소 십일조가 정식 법령으로 공포되었습니다.

그런데 13 세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십일조의 대상이 구약의 가르침 그대로 주로 '토지 소산물'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일조 창고'를 따로 만들어 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3 세기에 이를 즈음, 십일조의 대상이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교세가 커지고 교권과 이권이 거대해질 때 십일조가 머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즉 십일조가 하나의 엄청난 기득권이나 치부의 수단으로 자리 잡는 곳에서는, 반드시 종교 지도자들이 십일조를 강요하여 교묘하게 가로채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시대, 신구약 중간 시대, 중세 시대, 그리고 오늘날에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1 세기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에 의해 폐지되었던 십일조 제도는 한참 후대의 중세 가톨릭 시대에 슬며시 나타났다가, 종교개혁 이 후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면서 다시 대부분의 유럽 교회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과정을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몽둥이를 맞고 비실거리다가 19 세기를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 세기에 들어서 교회 부흥이 일어나, 교세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머리를 들게 된 것이다"고 평했습니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 동안 막대한 십일조 수입으로 온갖 비리를 저질렀던 가톨릭조차도 이제는 그 십일조 제도를 버리고 자율적인 헌금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을 개혁한 루터와 칼뱅을 지지한다는 한국의 개신교가 이제 와서 오히려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오직 한국교회와 미국의 극히 일부 교단 교회들을 제외하면 의무적 십일조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명확히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 준 외국 여러 나라의 교회들도 거의 하지 않는 십일조를 한국교회가 목소리 높여 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모습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치 십일조 강요가 바리새인들이나 중세 가톨릭 주교 등 교권주 의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변절 역시 교회 내의 막강한 교권과 기득권을 지닌 귀족 목사들에 의하여 자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 강요와 한국교회의 변절은 모두 교권 남용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꼴입니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변절된 시대에는 반드시 십일조 강요가 왜 나타나는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에서 왜 유독 한국교회만이 십일조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즉 동서양을

합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국교회만큼 단기간에 교세가 급격히 성장한 곳도 매우 드물고, 동시에 이처럼 빠르게 예수 따르는 길을 벗어나 변절된 교회도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만일 필자의 말에 동의를 못하시겠다면, 지금이라도 한국의 일부 귀족 목사들만큼 사치스러운 목회자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직접 확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처럼 대부분의 교단 선거에서 돈을 주고받는, 더럽고 타락한 목회자들이 많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 보십시요.

아울러 한국교회처럼 세습이 많은 나라가 있는지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한국처럼 교회가 세력과 이권을 키우기 위해 서로 큰 교회당을 짓겠다고 단체로 몸부림치는 나라도 있는지 둘러보십시요. 이들은 목자의 얼굴로 양들을 속이고, 그저 먹기를 탐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신성남 집사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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