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목사님들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십일조를 만고의 진리처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으므로, 그 시점에서는 구약의 십일조가 아직 유효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당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다른 율법인 할례와 안식일도 지키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명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즉 율법의 마침이 되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다른 율법들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에 의하여 십일조가 폐지될 것임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십일조는 성전에서 드려져야 하는데,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드릴 방법을 하나님이 스스로 제거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전이 제거되면 레위 지파의 임무도 종결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기서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킬 성전이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전도, 안식일도, 할례도, 제물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따라서 율법에 의한 십일조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또한 신약성경 속의 초대교회를 보면, 일반 헌금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즉 '십일조의 정신'인 '사랑'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인 연보'는 했지만, '율법적이며 강제적인 십일조'를 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당시에 할례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할례당'은 있었으나, '십일조당'은 결코 없었다는 점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 및 관례는 전적으로 폐지하면서, 오로지 돈줄이 되는 십일조만은 예외로 적용시켜 강요함은 상식에 어긋나는 논리입니다.
바울 사도도 '연보'에 대하여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당시에 십일조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구제를 위한 연보를 그토록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십일조의 본래 목적이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성직자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분의 지적처럼, 기타 다른 신약성경 어디에도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고 꾸지람을 받은 교회가 없고, 반대로 십일조를 잘 했다고 칭찬을 받은 교회도 없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완고한 주장을 고려해 볼 때 십일조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바울의 서신들 속에서 한두 번이라도 꼭 언급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책망 하는 부분에서도 십일조를 도적질했다는 책망이 반드시 나왔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전하여 준 가르침에는 이 십일조란 단어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십일조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들과 함께 폐지된 것을 당연시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그토록 중요했다면, 사도 바울을 비롯한 다른 사도들이 이를 경시했을 리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구태여 밝히자면, 앞서 언급한 '십일조의 정신'은 살아 있으나 '율법의 십일조'의 시효는 다른 율법에 명시된 성전, 제사, 안식일, 할례 등과 함께 동시에 종료된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기록된 말씀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사도들에 의해 전파된 기독교는 결코 유대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가 유대교 율법의 하나였던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십자가를 거스르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헤롯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라 확신합니다. 또한 안식일도 지키고, 성전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고, 할례도 하자는 억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구나 신정 국가 시대가 아닌 현대를 사는 신도들은 이미 국가에 상당 수준의 세금을 내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획일적인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이중과세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거기에 별도로 주일헌금, 감사헌금, 건축헌금, 그리고 선교헌금 등 일일이 다 외우기도 힘든 수십 종의 헌금 명목을 만들어 자의반타의반으로 강요하며 전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온통 돈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묘하게 경제적인 착취를 하는 행위이며, 비판자들로부터 '현대판 농노 제도'라는 비난을 들어도 떳떳하게 반박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미국 교회들의 몇 대형 교회들이 진행하는 90일 십일조 운동 웹 자보. |
십일조의 정신
그러나 사실 원칙을 따지자면,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생명, 가족, 친구, 재산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단순한 '십분의 일'이 아닌, 우리 자신 전부를 '산제사'로 주님께 드리는 '경건한 삶'이 신약 시대의 '온전한 십일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신 말씀이 참조가 될 것입니다.
즉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의 '문자적인 율법'은 폐지되었으나, 그 '율법의 정신'은 오히려 더욱 완성된 의미로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강요적인 십일조'를 폐지하고, 율법의 정신에 따른 자발적인 '사랑의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율법의 정신이란 요약을 하면,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십일조가 없으면 교회 재정 수입이 줄어 교회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변명을 하시는데, 진리가 아니라면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강요적인 십일조'가 꼭 있어야 하고 '자발적인 헌금'만으로는 운영을 못할 교회라면, 그런 교회는 그냥 문을 닫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주님의 사업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헌금을 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우리에게 이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가 또 다시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입이 너무 적어 생활이 매우 어려운 분들은 백분의 일을 헌금해도 상관이 없고, 때로는 헌금을 못 하셔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필요하면 교회가 이 분들을 경제적으로 도와드려야 합니다.
반면에 1 년에 10 억 원이나 벌면서 1 억을 떼어 헌금하고,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주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은사이든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은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왜곡하며 십일조와 수십 종류의 헌금을 강요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간판만 개혁 교회이지, 실제로 하는 행동은 루터와 칼뱅을 벗어나 중세 가톨릭만도 못한 행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귀족 목사들이 마치 제사장이라도 된 듯 자신들의 권위를 치장하며, 스스로 중세 성직자 행세를 하는 것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헌금은 흰 봉투 하나면 족하다
아울러 교인들의 주머니는 한정되어 있는데, 이런 저런 잡다한 이유와 이름을 붙인 수십 가지나 되는 헌금 항목들도 모조리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매주일 자신의 능력과 여건에 따라 정성껏 주일헌금을 하면 되는 것이지, 도대체 왜 이런 복잡한 분류가 필요한지요.
예를 들어 생일 감사는 꼭 감사 헌금 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따로 구별해서 헌금해야만 하나님께서 알아보신다는 말인가요. 그냥 무기명으로 주일헌금에 합쳐 넣으면, 무슨 복잡한 문제라도 생깁니까. 헌금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하는가요.
신약 초대교회에서도 이렇게 세분화한 헌금 분류를 사용했다는 말은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또한 이런저런 구실로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공개한다거나, 예배시 감사 헌금자를 호명하며 별도로 기도를 해 준다거나 하는 행동은 지극히 세속적인 처사라고 분명히 경고하고 싶습니다.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이런 행위는 개혁 교회답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이런 행태들은 그저 돈을 더 뜯어내려는 극히 인위적이며 세속적인 잔 수로밖에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튼 한국교회 귀족 목사님들은 잔머리를 굴리며 쓸데없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데는 올림픽 금메달 감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헌금을 무기명으로 하여 앞으로 순결해야 할 주님의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냈다고 어깨에 힘주거나, 반대로 헌금을 많이 못해서 위축되는 일이 없어져야 합니다. 목회자가 헌금자를 은근히 공개하여, 돈 많이 낸 사람들이 득세한다거나 더 좋은 대접을 받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있을 수 있는 저질적인 행태입니다.
이상으로 한국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율법적 십일조'에 대한 반론을 간단히 요약해 보았습니다. 만일 십일조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명백히 오류라는 것을 다른 분들이 구체적으로 잘 지적해
주시고 설명해 주신다면, 이 후에 언제라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도 아울러 밝혀 두고자 합니다.
신성남 집사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