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많은 영화 '아가씨', 우리는 이렇게 봤다
논란 많은 영화 '아가씨', 우리는 이렇게 봤다
  • 이은혜
  • 승인 2016.07.05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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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언니들이 본 수위 높은 섹스 신, 동성애·여성주의 묘사
영화 '아가씨'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왼쪽부터 백작(하정우), 숙희(김태리), 히데코(김민희), 이모부(조진웅)이다. 백작은 귀족 가문 아가씨 히데코와 결혼해 그의 재산을 가로챌 계획을 세운다. ⓒCJ E&M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가 관객 400만 명을 돌파했다. '곡성'만큼은 아니지만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만으로도 많은 영화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네이버에 소개된 아가씨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조진웅)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그녀에게 백작(하정우)이 추천한 새로운 하녀 숙희(김태리)가 찾아온다.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외로운 아가씨는 순박해 보이는 하녀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한다.

간략한 줄거리만으로는 영화 '아가씨'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사랑에 빠진다.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억압하고 많은 남성들 앞에서 야한 소설을 낭독하는 성 노리개로 삼았던 이모부, 자신과 결혼해 재산을 가로채려는 가짜 백작 사이에서 히데코 아가씨는 숙희를 만나 자신을 발견하고 주체적으로 성장한다.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신에 대해 눈을 뜨는 영화. '동성애 코드'가 포함돼 있다. 두 여성의 정사 장면이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등 수위도 높다. 그런데 한국 교계는 이상하리만큼 반응이 없다. 과거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나 '커피 프린스'에 보였던 반응에 비하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평범한 30대 여성, 게다가 모태 신앙 기독교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6월 30일 명동 롯데시네마에서 노랑조아, 프시(SNS 활동명)를 만나 영화 '아가씨'를 봤다. 노랑조아는 기독교 단체 간사로 일하다 현재 한 신학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프시는 목회자 자녀로 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에서 인지과학을 연구 중이다. 

프시(왼쪽)과 노랑조아가 만나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눴다. 꾹꾹 억눌렸던 두 여성이 들판을 달리면서 해방감을 느끼는 장면, 남성 중심적으로 묘사됐다는 평을 받고 있는 수위 높은 섹스 신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영화를 본 후 조용한 카페로 옮겨 영화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웠다. 특히 논란 많은 장면인 히데코와 숙희의 섹스 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 '동성애 코드'가 담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가감 없이 나눴다.

아가씨... 어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타고나셨나 봐요...

프시 / 섹스 신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영화 보기 전에 두 사람의 섹스 신이 남성 시선으로 묘사된다는 지적을 읽었다. 나는 영화를 두 번 봤는데 처음 봤을 때는 그 장면에서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장면은 굉장히 야한데 역설적으로 아무 느낌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두 번 보니까 왜 이걸 남성이 엿보는 듯한, 관음적인 시선이라고 하는지 알겠더라. 두 사람의 감정선은 빠져 있고 미적인 부분, 시각적인 부분, 대칭만 신경을 쓴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이 변태처럼 대칭을 묘사하는데 굉장히 신경 썼다. 마지막 섹스 신도 굉장히 대칭적이고 두 사람이 섹스하는 장면도 사실 다 대칭이다. 시각적 미에 신경을 많이 썼더라.

노랑조아 / 나는 그 장면들이 좀 억지로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꼭 감독이 "이것 봐. 예쁘지? 예쁘지. 이게 얼마나 예쁘냐. 이렇게 몸매 좋은 두 여자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데 너도 와서 봐라" 이런 걸 강요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내 눈에도 두 사람이 참 아름다웠다. 풍경도 너무 아름답고 좋았다.

두 여성이 사랑에 빠지는 또 다른 영화 '캐롤'에도 섹스 신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좀 절제된 느낌으로 표현된다. 섹스는 서로 감정을 나누고 사랑한다는 걸 표현하고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의 몸을 전체 앵글에 담지 않고 윗부분만 잡아 주거나, 화면을 흐리게 하는 방식으로. 절제된 표현이 들어가도 "아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는데 여기는 그게 아니라 멀찌감치 서서 "살아 숨쉬는 이 육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프시 / 맞다. 두 번 보니까 섹스 신에서 서로의 감정선이 쏙 빠져 있어 별로 야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노랑조아 / 마지막 섹스 신은 정말 남성의 시각으로 묘사한 것 같다. 히데코가 남녀의 성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을 낭독할 때는 굉장히 차분하다. 다른 낭독에서는 굉장히 차분한데 유독 여성끼리 성관계를 묘사하는 부분 즉 방울 소리 나는 부분을 읽을 때 혼자 흥분하는 게 보였다. 심지어 정전이 돼서 글이 보이지 않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불이 켜진 후 얼굴이 빨개지고 식은땀을 닦는 모습은 낭독하면서 정말 숙희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날 밤에 아가씨가 숙희를 유혹했다. 책 내용에 나오는 것들을 두 여성이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굉장히 관음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불편했다. 여성주의 영화였으면 앵글을 그렇게 안 했을 것 같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은유적이고 절제된 앵글로 담았으면 훨씬 더 자극적이지 않았을까.

프시 / 마지막 섹스 신에서 두 여성이 정물처럼 느껴졌다. 해방감을 맛본 여성들이 마지막에 다시 정물이 됐다.

노랑조아 / 두 사람이 사랑하고 잔디밭을 뛰어가면서 해방감을 느꼈는데 다시 마지막 섹스 신으로 정물이 됐다. 남성 시선 안에서 남성을 만족시키는 섹스를 하는, 이건 남성을 위한 섹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히데코와 숙희는 이 장면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다. 히데코는 분명 자신과 사랑을 나눴음에도 '백작님과 결혼하게 되실 것'이라고 말하는 숙희에게 배신감을 느껴 뺨을 때리고 방에서 내쫓는다. 이후 자살을 결심하고 밧줄을 가지고 마당에 나가 나무에 목을 맨다. ⓒCJ E&M

그동안 이런 책을 읽었던 거예요?

프시 / 섹스 신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전체적으로 해방감을 느끼는 장면도 많았다. 숙희와 히데코 두 여성은 완전 다른 캐릭터다. 히데코는 오랫동안 남성에게 훈육돼 무기력하고 나른하다. 성 노리개로 자라 왔기 때문에 행동 반경도 좁고 굉장히 절제돼 있다. 반면 숙희는 야생적이고 강하고 직설적이다. 대비되는 둘의 캐릭터가 오히려 합을 좋게 만든 것 같다.

나는 서책을 찢는 장면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히데코는 숙희가 울부짖으면서 책을 찢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후 들판으로 뛰어가는 장면이 나오기 전, 히데코는 낮은 담벼락인데도 넘지 못한다. 숙희가 가방을 포개서 발판을 만들어 준 후에야 그 낮은 담벼락을 넘는다. 숙희라는 캐릭터가 히데코의 성장과 해방을 대리만족시켜 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자기가 느끼고 싶었던 걸 숙희가 대신 실현시켜 주면서 주체성을 조금씩 찾아가게 하는 히데코 성장 영화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들어서 서책 찢는 장면은 정말 좋았다. 사실 이 영화가 여성주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장면만큼은 여성주의적이라고 생각했다.

노랑조아 / 여성주의라기 보다는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여성주의 '풍'이 아닐까. 나도 책 찢는 장면에서 정말 해방감을 느꼈다. 숙희가 울분에 차서 "여태까지 이런 것 읽었던 거야" 이러니까 히데코가 눈물을 또르륵 흘린다. 그 모습을 본 숙희는 열 받아 온갖 욕을 하며 이모부가 보물처럼 여기는 야한 소설을 찢는다. 나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히데코는 이모부가 시키는 대로 서책을 읽어야만 하는 노리개가 된 여성이다. 이모부의 원래 부인 사사키도 각본을 위해서 삶을 농락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어마어마한 세계를 숙희가 진짜 분노에 차서 찢어발기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서화에 잉크를 뿌리고 발로 밟고 이러는 장면은 이전으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 장면이 제일 후련했다.

프시는 학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현재 인지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숙희가 서책을 찢는 장면을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로 꼽았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프시 / 이 영화를 여성주의로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순간순간 여성주의가 담긴 장면이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초야(첫날밤) 장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초야 때 히데코가 백작과 잠자리를 거부하고 자위를 한다. 하기 전에 은장도를 뽑는다. 한국 전통문화에서 은장도는 순결의 상징이다. 그 순결이 숙희를 위한 순결 상징이었다.

영화를 두 번째 보니까 은장도를 뺀 다음에 이불 안으로 집어넣더라. 그걸로 자위를 한 게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영화에서 구슬이 처음에는 훈육과 억압의 상징이었는데 나중에는 쾌락의 도구로 쓰인다. 이것처럼 은장도로 남성 없이도 충분히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주체성이 엿보여서 좋았다. 히데코가 혼자 자위하는 장면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득하는 장면처럼 느껴져서. 그런데 백작은 그 장면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그동안 남자들이 히데코를 지켜볼 때는 히데코가 낭독회에서 성 노리개로 활용당하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히데코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쾌락을 느끼는 모습을 지켜봤다. 절정에 이르고 나서 다시 절도 있게 기모노를 입고 칼을 탁 닫았던 장면이 되게 멋있었다.

노랑조아 / 그 모든 장면이 내가 즐겁기 위해 너는 딱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사회에서 가장 큰 편견 중 하나가 여성은 남성이 있어야만 혹은 남성에게 사랑받아야만 즐거울 수 있고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걸 깨는 장면이어서 정말 좋았다.

프시 / 백작 즉 남성은 어떻게 보면 병풍처럼 하는 일 없이 앉아서 히데코를 지켜본다. 히데코가 백작 없이도 절정에 이를 수 있고, 숙희와 달아나기 위해 연극을 하려고 손을 스스로 베어 피까지 낼 수도 있다는 점이 히데코가 그만큼 주체적으로 변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백작은 히데코를 꼬셔 결혼할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히데코에게 자유를 주고 그 댓가로 히데코가 상속받는 재산 일부를 나눠 갖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CJ E&M

네 이놈! 히데코는 내 아내야

노랑조아 / 감독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남자들은 다 뭘 잘 모르는 소위 '찌질이'로 그려진다. 여성에 대해 잘 모르는데 아는 척하고. 시종일관 찌질하고 못나고 멍청하게 그려진다. 물론 백작이 히데코를 꼬실 수 없겠다고 판단한 후 작전을 바꾸는 건 기민했다. 영화 속 두 남성에게 '이 여성의 내면을 어떻게 내가 가질 수 있을까' 혹은 '이 사람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나' 같은 질문은 없다.

"여자들은 억지로 할 때 희열을 느낀다"고 한 백작의 대사가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남자들은 억지로 성관계할 때 여자들이 즐거워한다고 믿는 건가? (프시 / 그런 판타지가 있다더라)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마지막에 백작이 이모부의 지하실로 끌려가서 손가락이 잘리고 고문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조금 불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프시 / 난 그래서 더 좋았다. 고통스러워 하는 두 남자와 행복한 두 여자를 계속 대비시켜 보여 주지 않나. 손가락이 다 잘리고 죽어 가면서도 백작이 "그래도...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성기에 집착하는 것을 알려 주면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 와중에 이모부는 계속 백작과 히데코의 첫날밤이 어땠는지 자세하게 변태적으로 물어본다. 중간중간에 여성들은 자유분방하게 섹스하면서 행복하게 보내는 장면을 편집했다. 그 자체로 재밌었고 또 다른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일부러 장면을 그렇게 배치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 중에는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을 각색하면서 원작과 다르게 남자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는 의견이 있더라.

노랑조아 / 나도 이걸 줄여야 한다면 마지막 두 남자의 지하실 신을 들어내면 좋겠다. 이모부가 백작에게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끝냈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남성들의 변태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 대신 여성들이 얼마나 더 행복해지는지 다루면 좋지 않았을까.

이모부는 히데코에게 변태적인 내용이 담긴 소설을 낭독하게 했다. 히데코는 여러 귀족 앞에서 이모부가 소중하게 모은 서책을 한 권씩 낭독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숙희는 분노하며 모든 서책을 찢어 버린다. ⓒCJ E&M

뱀! 뱀! 뱀은 무지의 경계선이다

프시 / 영화에서 여러가지 상징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낭독회하는 장소까지 걸어 들어가는 긴 복도 바로 앞에 뱀 동상이 있다. 남자 성기 상징하는 거 아니겠나. 이모부와 히데코가 낭독을 연습하고 있는데 숙희가 낭독회 장소로 들어오려 하니 "뱀! 뱀! 뱀은 무지의 경계다"라고 외친다. 무지가 뭘까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건 내 의견이다.

많은 남성은 여성들이 그냥 모르길 바란다. 성적으로도 그렇고 무지하고 수동적으로 내 말 듣고, 내가 모든 걸 리드하고 훈계하길 바라는 경향이 있지 않나. 그런 무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볼 때 든 생각인데 그게 남성 성기 모양과 비슷한데 숙희가 칼로 확 잘라 버린다. 그런 상징도 깨알같이 재밌는 상징 아닌가.

노랑조아 / 나는 또 다른 상징에 대해 말하고 싶다. 3부에서 히데코와 숙희가 백작을 속이고 배를 타고 상해로 떠난다. 배 위에서 둘이 바라보고 행복해 하는 신이 있다. 거기 보면 히데코의 결혼 반지를 끼고 있던 장갑에 끼워서 버린다.

장갑은 영화 처음부터 등장했다. 히데코는 늘 장갑을 끼고 있었다. 바꿔 가면서 장갑을 끼거나. 숙희와 밤을 보내거나 백작과 초야를 치루는 척할 때만 잠깐 벗지 웬만해서는 벗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내 모습 그대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 아니었을까.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은 진정한 히데코의 삶이 아니었고 강압에 의한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아가씨 처음 보고 리뷰를 찾아봤는데 누가 여성 동성애자는 손을 보호하는 게 중요하다고 썼더라. 누가 막 손 잡거나 키스하는 것도 싫어하고. 나는 모르는 영역이긴 한데, 어쨌든 영화에서 손이라는 게 내면적이고 마음이 담긴 것으로 나온다. 저택을 떠나 도망쳐 배를 타고 갈 때 카메라는 노 젓는 백작을 계속 아웃포커스로 잡고 숙희와 히데코가 깍지 낀 손을 클로즈업한다. 보통 우리 문화에서 연인들이나 깍지를 끼지 않나. 손이 마음을 내포한다. 배 위에서 장갑에 반지를 끼워 바다로 던지고 난 후에는 계속 맨손으로 간다. 그게 변화를 상징하는 거 아닌가.

노랑조아는 과거 기독교 선교 단체에서 간사로 일했다. 지금은 신학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다. 노랑조아는 '아가씨'를 세 번 보고 대화에 임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퀴어 영화를 퀴어 영화라 부르지 못하고...

노랑조아 / 어느 웹진은 '아가씨'를 레즈비언 영화라 부르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나는 굳이 퀴어 영화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나 생각한다. 분명 퀴어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억압받는 상황 안에서 상대를 괴롭히지 않는 사람끼리 사랑이 싹트고, 연애하고, 사랑하고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같다. 여성들끼리 돌봐 주면서 사는 것. 그래서 거부감이 좀 덜하지 않았을까.

프시 / 나는 여성과 여성의 사랑을 지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오류와 같은 종류인 것 같다. 그냥 퀴어들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굳이 사람과 사람이라고 희석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노랑조아 / 맞다. 퀴어 영화라고 하는데 별 이의 없다. 숙희가 여자라서 좋은 게 아니라 숙희여서 좋아한 거니까.

프시 / 히데코와 숙희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영화들에서는 일부러 동성애 요소를 지우거나 희석시키는 노력이 있는 것 같다.

노랑조아 / 이 영화는 드라마 '커피 프린스' 같은 것과는 좀 다르다. 공유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인 줄 모르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안 받아들이려고 하다가 결국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는 그런 게 없다. 그냥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고 가까워지고 그런 부분이 묘사가 잘 돼 있다. '내가 왜 여성을 좋아하지?' 이런 고민이 없다. 히데코가 자신은 숙희를 사랑하고 숙희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숙희가 백작과 결혼하라고 하니까 숙희 뺨을 막 친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감정을 담아서. 분명 애정 싸움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인데 물 흐르듯 넘어가니까 그냥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보였다.

프시 / <핑거스미스>라는 소설 자체가 레즈비언 소설의 바이블이라고 하더라. 흐름이 자연스러운 건 당연하다.

노랑조아 / 히데코와 숙희가 '왜 여성을 사랑하지' 고민하지 않는 부분이 좋았다.

프시 / 아까도 얘기했지만 두 사람의 섹스가 동성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동성애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섹스 신 자체에 드러나는 감정선이 별로 없어서였다. 동성을 사랑하는 두 여성의 사랑 같지 않았고. 좀 불필요해 보였는데 함께 본 레즈비언 지인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냥 장면 그대로 너무 좋았다고. 그 친구가 보기에 히데코와 숙희의 정사 장면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건 레즈비언이라 해도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갈리는 것처럼.

영화 '아가씨'는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숙희 시점, 2부는 아가씨 시점, 3부는 모든 비밀이 드러나고 두 사람의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와 가장 다른 것도 3부 내용이다. ⓒCJ E&M

동성끼리 아주 수위 높은 섹스 장면이 나오는데 기독교는 조용하다

프시 / 남성과 남성이었으면 반발이 심했을 것 같다. 반동성애 진영에서 레즈비언은 대상으로 치지도 않으니까. 물론 영화에서 사람과 사람의 사랑으로 보이는 것도 있지만 만약 주인공이 남남 커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조용했을까 싶다. 남성 성기가 없었다는 것 자체가 별 도움이 안 된 것 같다. 그냥 남성들이 자주 보는 야한 동영상 느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노랑조아 / 난 사실 영화에서 남성들끼리 섹스 장면이 나오면 아직도 많이 불편하다. 못 보겠더라. 여성이 벗은 몸은 익숙하고 많이 나오는데. 남성은 대상화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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