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복음’이 아닙니다. ‘전략’입니다.
‘혐오’는 ‘복음’이 아닙니다. ‘전략’입니다.
  • 양재영
  • 승인 2016.08.18 04: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취재수첩] 이슬람포비아 확산과 언론의 역할

1920년에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아기 앨버트 실험'이라는 유명한 실험이 이뤄졌다.

연구진은 앨버트라는 아기가 하얀 쥐를 보면 이유없이 겁을 먹도록 훈련을 했다. 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망치로 쇠막대기를 때려서 끔찍하고 무서운 소리를 내는 동안 쥐를 아기 옆에 두는 작업을 반복한 것이다.

실험이 끝나갈 때 쯤에는 아기는 쥐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물체에 대해서도 겁을 먹기 시작했다. 하얀 털이 달린 코트라든지 심지어 흰 수염이 난 산타클로스가 나타나도 겁에 질렸다.

지금도 이 실험의 결과는 공포증, 중독 등의 연구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혐오는 사랑을 이긴다(?)”

지난 4·13 총선에 출사표를 던지 두 기독교 정당의 지지율이 3%를 넘었다. 이 수치는 역대 기독교정당이 얻은 표 가운데 가장 많은 득표율로, 일부에선 조만간 원내 진출도 가능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기독교정당이 내세운 공약들을 보면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되는 ‘혐오'로 가득했다. 특별히 ‘이슬람 특혜 철회' 등의 ‘이슬람포비아'(무슬림 혐오) 공약은 선거현장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아이러니한 건 ‘혐오’가 강할수록 ‘지지율'은 올라갔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랑이 언제나 이긴다'(Love always wins)라는 미국인의 신념에 빗대어, ‘혐오는 언제나 이긴다'(Hatred always wins)라며 한국을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도 ‘혐오 조장'을 통해 조직의  승리를 추구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해 12월 이후 “무슬림들의 미국 입국을 아예 막아라”라는 등의 ‘혐오'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이러한 트럼프의 ‘혐오' 발언에 프랭클린 그래이엄 목사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복음주의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프랭클린 그래이엄 목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무슬림 입국금지는 이슬람 포비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며, 이 포스트는 9만에 가까운 사람이 ‘좋아요'를 눌렀으며, 6만여명이 ‘공유’해 갔다.

지난 5월 영국의 무슬림 인권단체인 IHRC가 ‘올해 최악의 이슬람포비아'로 트럼프를 선정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의 유권자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지적은 개신교 복음주의권을 겨냥한 언급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한국과 미국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이슬람포비아의 확산에는 이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근본주의 리더와 언론들, 반복 재생되는 혐오 발언으로 ‘아기 앨버트'가 되어버린 기독교인들의 합작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진실를 위해 격렬하게 의심하자!”

최근 한 교계 언론이 다룬 <‘충격’ 기독교 국가 레바논은 어떻게 이슬람화 됐나?>란 기사는 이러한 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 글은 가브리엘이라는 한 간증자의 10분짜리 동영상을 빌려 ‘이슬람포비아'를 가득 담아낸 기사였다. 하지만, 이 글이 개인의 주장과 고백이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기사의 문제점을 SNS를 통해 지적한 김동문 선교사는 “한 사람의 개인적 경험과 고정관념이 객관에 뿌리를 둔 사실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인 가운데에도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하고, 두둔하고 옹호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레바논에도 프랑스 지배 시절 기득권을 누려온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확신있는 목소리에 주목하더라도, 우리는 이들이 미처 인정하지 않는 진실에도 눈길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선교사는 “지식은 많으나 무지(無知)한 사람, 경험은 많으나 막지(莫知)한 이들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라며 “남의 말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이들은 조심하여야 한다. 진실을 믿기 위해 격렬하게 의심하자”고 제안했다.

사회 현상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의무이다. 하지만, 그 현상의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지않고,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이 권장된다면 우리는 잘못된 편견과 적대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상식과 이성의 조명 아래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풍토가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