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게 바꿀 수 없으면 건들지 말라"
“선하게 바꿀 수 없으면 건들지 말라"
  • 양재영
  • 승인 2016.08.20 0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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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민족 이웃과 더불어 살기] 이태훈, 김동문 선교사 인터뷰 -1
LA기독교윤리실천운동 (사무국장 오경석 목사)과 ReconsiliAsian(대표 허현 목사) 주관으로 ‘한국교회, 어떻게 다민족 이웃과 더불어 살것인가?’라는 기획이 진행중이다. 이슬람 지역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태훈(북아프리카), 김동문(요르단) 목사와 함께 ‘어떻게 무슬림을 좋은 이웃으로 더불어 살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소개한다 - 편집자 주

 

김동문 선교사(좌)와 이태훈 선교사(우) © <미주 뉴스앤조이>

허현 목사(사회자, 이하 허 목사): 현재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고 있고, 2050년에는 미국에서 제 2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무슬림과 좋은 이웃으로 더불어 살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싶다.

이슬람 지역에서 선교를 하신 두 분의 개인적인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열고 도전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먼저, 선교사로 사역하기 이전의 성장 배경과 무슬림을 향해 가졌던 태도 등을 말해주시면 좋겠다.

이태훈 선교사(이하, 이 선교사): 저는 주로 통합측 장로교회를 다니다 나중에 합동으로  옮기게 됐다. 중 3때 이민와서 주로 한인 장로교회를 다녔다. 안수는 미국장로교(PCUSA)에서 받았지만, 선교훈련은 보수적인 배경의 단체에서 받았다.

어려선 무슬림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없었다. 솔직히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얼바나 선교대회를 통해 무슬림과 복음을 나눠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렇다고 내가 북아프리카에서 사역하게 될 줄은 몰랐다.

김동문 선교사(이하 김 선교사): 저는 줄곧 장로교 합동 측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현재는 장자교단인 합동측 대 경기노회 소속이다.(웃음) 그래서인지 저의 신학은 보수적이다. 어떤 이슈에 대해 진보진영과 달리 쿨하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했다. 관심없는 과목이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내가 왜 여기에?’라는 기독학생들의 소명을 생각했다. ‘내일 이곳을 떠날지라도 오늘 여기에서 충실하자’라는 마음으로 아랍어를 공부하게 됐고, 그 계기로 아랍어와 조금은 가까워졌던 것 같다.

"선교의 대상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허 목사: 두 분다 무슬림 선교사로 헌신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이 선교사: 얼바나 선교대회에서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선교대회를 가지 전부터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것을 보여주시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기왕에 복음을 나누는 삶을 살거면 교회가 거의 없는, 복음이 소외된 지역으로 가는게 맞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중동쪽으로 가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북아프리카였다. 단기선교를 갔는데, 그 지역이 ‘선교사의 필요는 많고, 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나는 가능하다'라는 생각에 결론을 내렸다.  

김 선교사: 88올림픽 때 TV와 길거리에서 아랍 사람들을 보니 괜히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먼나라가 아니라는 나쁘지 않은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다 80년대 말에 한 선배로부터 권유를 받고 갔던 나라가 이집트였다.

이집트에 가기 전 선교훈련과정이나 기도모임 등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평소 ‘지금 있는 곳에서 내가 할 것을 한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대학 시절에도 동아리연합회 회장도 하고 총학생회 운영위원도 했다. 소위 학생 운동권 안에 있었지만, ‘복음은 나와 함께 사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했다. 그래서, 모든 동아리를 심방다니며 신입생부터 간사까지 모두와 함께 복음을 나눴고, 경실련, 야학교사 등을 하면서 지금 있는 곳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려고 했다. 그게 이집트로 바뀐 것 뿐이었다.

허 목사: 특별한 계기 없이 떠나게 됐다는 말인가?  

김 선교사: 선교사가 되는 과정에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단지 아랍인이 지나가면 눈길이 갔다. 가서 말을 걸어 신상파악이 안되면 힘들어 하는 것이 몸에 있었다. 특별한 당위성도 없었는데, 몸이 반응하는 상태였다.

무슬림 사회 속에 살아도 무슬림을 안보고 살 수 있다. 같은 곳에 있을 뿐 함께 살지 않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 산다고 해서 무슬림과 이웃이 되어 사는 것과는 별계의 문제이다.

20여년 만에 후배를 만났는데, 제가 현지인과 욕하고 싸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하더라. 경찰을 붙잡고 경찰서로 끌고 가려했던 기억도 있다. 말 같지 않은 놈들을 보면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바탕 퍼부었는 데 그걸 충격적으로 본 사람이 있었다. 싸울 건 싸우고, 아닌 건 아니다. 무슬림들을 맹목적으로 두둔하거나 비하할 생각은 없다.

김동문 선교사 © <미주 뉴스앤조이>

허 목사: 많은 한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무슬림이나 이슬람에 대해 폭력적인 집단으로 경고하는 것을 자주 본다. 두 분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슬림 선교를 나가고 난 다음에 특별한 변화의 경험이 있었나?

이 선교사: 많이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예전과 비교해 변화가 많이 있긴 했다. 친분이 있는 선교사님이 제가 북아프리카를 떠날 때 “처음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고 하더라.

처음 갈때는 흔히 다른 선교사들처럼 ‘영적 전쟁' 이라든지, ‘전도의 대상으로서 무슬림'이라는 일차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슬림은 선교의 대상이지 같이 삶을 더불어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선교를 하면서 저를 돌봐주시고, 지도해주셨던 선배 선교사가 계셨다. 부활주일 때 외국인 교회를 지키는 경찰이 있었다. 당시 저는 ‘경찰은 나를 잡아다 쫓아낼 사람’ 정도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 선배가 경찰과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분 말로는 “이 경찰이 노는 날인데, 부활주일에 많은 외국사람이 오니 신변보호를 위해 파견근무 나왔다”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분의 관점이 저를 많이 변화시켰다.  

김 선교사: 99년 즈음에 요르단에 갔을 때 한국교회가 언론의 영향으로 중동에 대한 잘못된, 편파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외신기자로 등록해 현지인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특파원으로 내부자 시선을 보니 ‘그동안 내가 거짓말을 했구나' 싶을 정도로 다른 세계를 봤다. 그동안 내가 본 중동은 중동이 아니었다는 충격을 받았다. 나그네가 보는 농촌의 풍경은 낭만적이지만, 농부는 그냥 일상일 뿐이다. 관찰만 했지, 일상의 자리에 발을 담구지 못했다는 충격과 반성을 했다.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서 배운 중동은 중동이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나누는 언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였다. 괴리감이 컸다. 모로코에서 7시간 반 동안 심야기차를 탔는데, 한마디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들의 모로칸 프렌치는 걸프 쪽의 아랍어와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배운 데로 이 사람들을 규정지을 것인가? 아니면 다 내려놓고 나를 리셋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요르단에서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허상 속에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나는 그들의 삶의 자리에 깊숙히 들어와 있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 왜 왔있나?”

이 선교사: 또 한분은 초기에 아랍어를 개인교습해주신 맹인학교 교사였다. 그 분은 평화를 사랑하고, 다양하고 넓은 관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경을 읽어봤고, 기독교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면서 마음이 잘 통하는 존경하는 분이었다. 무슬림이라는 게 전혀 장벽이 되지 않았다.

안타까웠던 것은 특정 단체 소속의 미국의 한 선교사가 이분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 몇년동안 공략한 후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결론내렸다. 그런데, 이 분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 친하게 지낸 사람이 복음을 강요하니, 강팍하게 믿지 않는다고 할 수 없어 엉겁결에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 미국선교사는 ‘영접기도’를 했다고 믿은 것이다.  

무슬림 사회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많이 있다. 하지만, 선교사가 밀어붙여서 믿은 사람은 없다. 물론 믿음의 기초는 되었겠지만. 저도 그런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밀어부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내가 기분좋고, 내가 성과를 내 기도편지에 쓸 거리를 만들기 위해, 내 이익을 위한 도구로 만드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별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금도 그런 고민이 많다. 그런 과정을 통해 관점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이태훈 선교사 © <미주 뉴스앤조이>

김 선교사: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이곳에 복음이 닫혔다'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말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선교사를 만난 적도 없는데, 이미 그 안엔 복음에 노출된 사람이 있었다. 계시와 환상, 이적 등의 단어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선교의 주체’의 문제였던 것 같다.

내가 전하지 안으면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는데, 내가 아무것을 안해도 복음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됐다. 선교사 없어도 선교는 잘되고 있더라. 선교의 주체는 교회나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선교사가 선교한다는 전략적 선교때문에 오히려 부작용이 많았다.그런면에서 여행자의 격언이 생각났다.

“선하게 바꿀 수 없으면 건들지 말라. 그대로 나둬라.”

선량한 마음이라도 더럽힐 수 있다. 진짜 좋게 바꿀 수 없으면 아예 건드리지 말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게 미덕이다. 선교사도 여행자이다. 선하게 도울 수 없으면, 가벼운 동정심으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는 전달자가 아니라 목격자가 되야 한다. 현장에 가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만 전달하는 것이지, 자기의 사소한  이야기를 보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또한 보도자라고 했을 때 내가 전달해야 할 것은 이곳에서 내가 본 것과, 들은 것과, 알게 된 것을 전달하는 역할이라는 사역적 고민이 있었다.

이 선교사: 공감이 된다. 가서 몇년 있으면서 현실을 파악하다보니 내가 비현실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됐다. 10년정도 준비해서 갔는데, 가서 3-4년 지나다보니 내면적 갈등이 생겼다. 그동안 생각했던 현실과 피부에 와닿는 현실이 격차가 있었어.

처음 선교를 떠날 때는 '교회 개척'하고, '제자 양육'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더라. 그러면서 들었던 갈등은 ‘선교의 주체는 선교사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그럼 나는 여기에 왜 와 있지?”라는 질문이 해결이 잘 안되더라. 방금 말하신 ‘선교사는 하나님이 하신일을 증거하시는 것’이라는 명쾌한 설명을 이전에 들었다면 좀 더 갈등이 덜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는 스스로를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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