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교회에 필요한 것은 웅장한 센터가 아니다
사랑의교회에 필요한 것은 웅장한 센터가 아니다
  • 김근주
  • 승인 2009.12.24 1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오늘을 사는 제자가 무엇인지, 무엇이 헌신된 평신도인지 보여 달라

사랑의교회 건축에는 한국 교회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랑의교회가 이제껏 심혈을 기울인 제자 훈련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극히 익숙한 '일반 헌금'이니 '특별 헌금'이니 하는 용어들, 건축을 위해 구입한 대지 위에서 행해지는 '땅 밟기', 그리고 '세계 교회를 위한 사명'과 같은 표현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의 신학적·신앙적 방식들이 총집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의교회 건축은 단지 자신들만의 새로운 예배당 건축 정도가 아닌,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어 버렸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에서 이루어져 온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규모의 예배당 건축의 본질에 우리 안에 있는 성취욕과 과시욕이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그럴 듯한 신앙의 말로 치장한 미사여구들의 난무가 곁들여져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사랑의교회 새 예배당 건축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이렇게 초현대식으로 지어진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이 내가 다니는 교회라는 것을 내세우고 누리기 위해, 다시 말해 그 브랜드 가치를 만끽하기 위해 교인들은 얼마든지 힘이 되는 만큼 헌금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의 사랑의교회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사랑의교회가 이제껏 역점을 두어 진행해 온 제자 훈련과 그리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일단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이 사랑의교회에 속한 개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랑의교회 교인들은 신실하고 헌신적인 분들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신실함'과 그 개인들이 모인 '전체의 신실함'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글을 위해 사랑의교회에서 새 건물 건축을 위해 마련한 홈페이지 내용을 참고하였음을 밝혀 둔다.

무엇이 다음 세대를 위하는 길인가?

사랑의교회 건축은 단지 좁아서 넓은 곳을 마련하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건축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사실 이 이유 말고는 건물을 새로 크게 지을 아무런 이유가 없기에, 교회 측은 언제나 이 이유를 가장 전면에 내세우고 이동 중에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거론한다. 그리고 곧바로 새 건물 건축이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의 역사를 펼치는 디딤돌이요 토대가 될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간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네 부모 된 이들의 자식을 향한 가장 원초적인 감정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묻고 싶다. 그러면 그렇게 크고 넓고 잘 확보된 공간 확보가 다음 세대를 위한 디딤돌이요 토대라면, 그렇게 하지 못한,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작은 교회들은 다음 세대에 대해 아무런 디딤돌도 토대도 놓지 못한 무책임한 교회들인가? 그래서 이 작은 교회들도 언제나 우리도 사랑의교회처럼 그렇게 다음 세대를 위해 디딤돌과 토대를 놓을 수 있는 날을 소망하며 그날만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무엇이 우리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 아이들로 하나님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게 하는가? 최고의 교육 환경인가? '유비쿼터스룸'과 같은 첨단의 공간인가? 힘이 닿으면 얼마라도 투자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 좋은 공간을 만들어 주자는 논리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모든 힘을 동원해서 좋은 유치원에 보내고 좋은 초등학교에 보내고 좋은 특목고, 좋은 대학 보내려고 애쓰는 세상의 논리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수차례의 위장 전입도 애교가 되어 버린 이 이기적인 세상과 사랑의교회의 건축 논리는 얼마나 다른가?

사랑의교회의 논리는 도무지 아이들에게 그러한 환경을 갖추어 줄 수 없지만, 힘을 다해 복음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고 자라가는 작은 교회 교사들과 전도사님들을 맥 빠지게 만들고 열등감에 시달리게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것은 최고의 교육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의 삶을 사는 사역자들의 헌신과 사랑의 본이며, 그렇기에 그 점에 있어서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무엇이 제자인가? 가난한 이웃을 돕자면 1,000억 원이 넘는 헌금을 내지 않을 터인데,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받을 환경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내는 것이 제자인가?

나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교회 관계자들이 내세우는 다음 세대를 위한 건축이 자기 아이 사랑에 극진한 지극히 세상적인 이기적 논리와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내 주위에도 사랑의교회 주일학교가 너무 좋아서 자신은 교회가 마음에 안 들어도 아이들을 위해 계속 다니는 분들이 꽤 많이 있다.

참으로 사랑의교회가 제자 양육에 힘쓰는 교회라면 좋은 시설 좋은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주일학교 교육이 아니라, 시설에 무관하게 환경에 무관하게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덜 이기적으로, 세상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지 않게 할지를 모색해 주길 부탁하고 싶다. 그래야 모두를 위한 섬김이 된다. 그래야 한국 교회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피조물이 탄식하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우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작은 교회이든 큰 교회이든 상관없이 우리 아이들이 입시와 성공의 무한 경쟁에서 벗어나 참다운 주님의 제자로 자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세계 교회를 섬기게 하는가?

이것은 단지 아이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한국 교회 안의 전형적인 논리 중 하나가 큰 교회는 큰 교회의 사명이 있다는 말이다. 교인 수가 1천 명, 1만 명을 넘어가면서부터 여지없이 큰 교회의 사명 어쩌고 하는 말들이 나오고, 거기에 연달아 '큰 목회하시는 목사님'이라는 식의 황당한 표현이 등장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큰 목회' '작은 목회' 따위는 없다. 다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제자가 있을 뿐이다. 이사야서 49장 1~7절은 여호와께 복중에서부터 부름 받은 한 종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 종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이방의 빛'으로서의 사명까지 받은 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헛되이 수고한 것 같은 사역이요, 무익하게 공연히 힘을 다한 것 같은 사역이었다. 그의 사역으로 인해 열방이 들락날락하고 세상이 떠들썩하다고 해서 이방의 빛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사역은 실패하여 헛수고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이방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종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또 다른 본문인 이사야 42장 1~4절에서는 이 종의 사역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하는 사역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정의를 시행하는 사역이기에 그의 사역은 헛수고처럼 보이고 실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종이 열방의 빛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세계를 섬기는 교회는 그 규모에 달려 있지 않고, 본 예배당의 크기나 시설이 얼마나 잘 갖추어져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정말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무슨 무슨 센터 같은 것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의 회복이며 참된 제자의 회복이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제자, 고난 가득하고 헛수고처럼 보이지만 한결같이 그 길을 걸어가는 제자가 필요하다.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센터가 아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매는 목자에게 필요한 것은 웅장한 환경이 결코 아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복음의 본질과 제자 됨의 본질은 잃어버린 채 이러한 웅장한 센터를 건립하는 것이 복음 전파의 초석이라고 여긴다는 데에 비극이 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이 이번에 짓는 사랑의교회 대형 건물 같은 '거룩한 인프라의 구축'에 달려 있다고 보는 사고야말로 비극이다.

복음이 세계를 섬기는 것은 그런 인프라에 달려 있지 않다. 복음을 위해 일상 속에서 복음에 철저히 순종하며 고난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 그래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 간 구름 같은 신앙의 선배들, 그들이야말로 세계를 위한 복음의 본이다.

무엇이 제자를 제자답게 하는가?

그래서 사랑의교회가 추진하는 수천억 원대 건물 건축은 한국 교회의 수준과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커야 사명을 감당한다는 논리, 아이들을 위해서 널찍한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다음 세대를 위한 초석이 된다는 사고, 웅장한 센터가 자리해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반이 된다는 인식이 새 건물 건축의 밑바닥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고가 몇 십 년에 걸친 제자 양육 중심의 교회에서 버젓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더더욱 놀라울 뿐이다. 이것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제자 훈련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사랑의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받았고 건축이 못마땅한 교인들 가운데 많은 수는 교회를 나와서 강남과 분당의 다른 교회를 찾아 떠돌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교회에 찾아오면서 나도 사랑의교회 교인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제자 양육인가? 그래서 교인들 전체가 제대로 논의도 하지 않은 일을 진행하면서 95퍼센트의 찬성을 끌어낸 것이 제자 훈련의 결과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교회는 목회자가 하는 일에 순종하여 따라오는 것이 제자라고 가르칠 것인가? 언제까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그렇게 길들일 것인가?

일상의 신앙

바벨탑을 짓는 동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높은 건물을 지어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흩어지지 말자였다. 흩어지면 힘이 약해지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숫자를 모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어 버리셨다. 모아서 힘을 결집하고 그 이름을 내려는 이들의 모든 시도를 하나님께서는 무산시키셨다.

흩어지는 것이 교회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여 있으려고 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사랑의교회 관계자들은 주일에 수많은 인파가 이동하고 움직이느라 사고의 위험이 있고 주차 문제가 있다는 점도 거론한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말들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주일 하루의 문제일 뿐이다. 교회의 건물은 대개의 경우 주일 하루를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우리의 삶은 엿새 동안의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주일 하루를 위한 건물을 짓고 또 짓고 더 크게 더 높게 더 넓게 짓는다. 여기에서 주중의 삶보다 주일 하루의 삶을 더 중히 여기는 사고가 있다. 물론 주중에도 교회 공간이 활용되지만, 또 다른 예배 또 다른 성경 공부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용기 있고 담대하게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록 격려하는 것이 주일의 모임인데, 교회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교회로 나오도록 요구한다. 싸움터는 세상인데, 자꾸 교회로 피신하게 하고 교회로 도망치게 한다. 세상에서 무기력할수록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이 더 은혜롭고 영원히 그렇게 찬양만 하고 살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그래서 주일이 중심이 된 예배당 건물 확장은 엿새 동안의 삶보다 주일 하루를 더 중히 여기는 사고와 연관된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의 제자이다.

좁아서 건물을 늘리겠다는 데에 교계 여기저기에서 발언하고 포럼이 열리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사랑의교회 교인들이나 관계자들로서는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건축을 위해 만들어진 홈페이지를 보면 볼수록, 이것은 단지 건물의 확장에 그치지 않고 이제까지 우리네 교회의 목표와 그토록 성행하던 제자 훈련 전체가 결부되어 있는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단지 현 담임목사님께 대한 문제 제기에서 그치지 않고, 은퇴하신 목사님이 그렇게 강조하셨고 모두들 큰 인상과 도전을 받았던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 훈련'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미 한국 사회 내에서 교회는 그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이다. 다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몸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의교회를 향해 간절히 당부하며 외칠 뿐이다. 부디 흩어지시길. 그렇게 모이려고만 들지 말고 흩어져서 일상으로 들어가시길. 우리네 가난한 이웃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믿음과 기도로 맞붙어 나가시길. 그래서 오늘의 시대를 사는 제자가 무엇인지, 무엇이 헌신된 평신도인지를 보여 주고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는 사랑의교회이기를 간절히 요청할 뿐이다.

김근주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푸른뜻교회 목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