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지배하는 더 무서운 주인
세계를 지배하는 더 무서운 주인
  • 최태선
  • 승인 2016.09.03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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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어떤 분

50대 후반의 잘 아는 여성분이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수입이 거의 없고, 70만 원이라는 월세가 부담이 되어 일자리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전에는 집도 있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로 오래도록 적잖은 수입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로 집이 경매로 넘어가 팔리고, 유체동산 압류와 같은  합법적이지만 비인간적인 폭력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간신히 정착해서 안정을 찾으면 그 지역의 전세가가 오르고, 싼 집을 찾아 변두리로 점점 밀려나다 마침내 전세금이 너무 올라 더는 전세를 얻지 못하고 월세를 부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공장 등을 찾아다니며 아르바이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그런 일을 하지 않던 사람이 고된 일을 하는 것이 녹녹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겨우 이틀이나 사흘을 일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면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느껴질 정도로 힘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아주 많은 일자리를 경험했습니다.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최저 시급도 부담스럽지만 받는 이의 입장에서는 정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그분이 구인 광고에서 시급이 다른 곳보다 훨씬 높은 일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대박 난 설렁탕집이었습니다. 하루 세 시간, 한 시간에 9천 원이라는 광고 문구에 이끌려  전화를 걸고 오라는 말을 듣고 가게 되었습니다. 가서 보니 해야 하는 일이 물수건을 빠는 일이었습니다. 세 시간 동안 허리 한 번 못 펴고 어마어마한 양의 물수건을 빨아야 했습니다. 손톱이 빠지려고 하고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다리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는데, 그날 일당 2만 7천 원을 받으면서 들은 말은 내일부터 나올 필요가 없다는 해고통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서툴러 일을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는 원래 그런 자리였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심한 일을 하루 이상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는 하루살이 일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잔인한 세상을  그곳에서 확인했습니다. 그곳 주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제 경험에 의하면 그런 집 주인이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주변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있었지만 그분의 그런 삶에 관심을 갖는 분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개인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교회 안에서도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교회 안에서 형제애라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교인들 중에도 사람들을 구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들이 구하는 사람은 더 젊고, 더 일 잘하고, 더 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구인의 기준을  더 가난한 사람으로 삼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세상에 사랑이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냉정한 것은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가난한 자, 고통 중에 있는 자, 소외된 자와 같은 작은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은 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의 자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어려움에 처한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의사결정 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성서를 읽다 크게 다가오는 깨달음이 있어 '포도원인 교회'라는 제목의 글을 하나 쓰게 되었습니다

낭만에 초 처먹는 이야기

말기 암환자들의 죽기 전 4가지 후회가 다음 네 가지라는 것을 어떤 글에서 읽었습니다.

1.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더 많이 했더라면.
2.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3.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4. 좀 더 친절을 베풀었다면.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법정 스님의 책에 대한 서평 글에서 이런 내용도 읽었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살고 있고, 더 많이 가지려 애쓰는 모습은 도처에 널려 있어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보인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시대의 조류를 따라 비판 의식 없이 두루뭉술하게 살아가기가 쉽다. 그 틈에서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아웃사이더를 자초하는 일로 인식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조류를 따라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 아웃사이더가 되는 편이 더 행복하다면 굳이 저울질을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향기로운 차 한 잔에서, 길가에 피어난 꽃 한 송이를 통해서,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법정스님은 전한다. 과연 우리도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그런 여유가 현대인들에게 있기는 할까? 의구심이 들지만 행복은 그런 사소한 것들에 분명 깃들어 있다. 다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용기를 내서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른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의 주제는 '낭만에 초 처먹는 이야기'입니다. 위의 글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위의 네 가지 후회를 전할 수 있는 말기 암환자는 최소한 그런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말기 암으로 죽어 가는데 주변에서 자신을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도 과연 그런 후회를 할까요? 돈이 없어 치료를 중단하거나, 온 가족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힘들어 하며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말기 암환자도 같은 후회를 말할까요? 그런 분들의 머릿속에는 어서 이 삶이 끝나 고통에서 해방되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입니다.

'빨리 죽고 싶다.'

두 번째 글은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우리의 결정이 평범하게 사는 것과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 사이의 결정일까요? 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스님들처럼 속세를 떠날 수 있었던 분들과 용기 있게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자유를 가진 분들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 자체에 허덕이며 사는 사람들도 과연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까요?  결국 방향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라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의식주의 해결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낭만에 초 처먹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소원을 말하라는 알렉산더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말하는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도 헬조선을 살아가는 막장 인생들에게는 가당치 않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도덕적 해이

이 지점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도덕적 해이입니다. 막장 인생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야기를 전개하려 할 때 사람들이 들고 나오는 '전가의 보도'는 '도덕적 해이'입니다. 모두가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것이고, 더 노력하지 않아서이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도덕적 해이'라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면서 들었던 가장 지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돌도 안 지난 갓난아이에게 3억이라는 빚이 상속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상속 포기' 공증을 안 해주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빚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갓난아이에게 3억이라는 빚이 주어졌다면 그 아이의 삶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만일 그 아이의 빚을 탕감해준다면, 채권자의 권리는 어떻게 보호되느냐는 반응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가 바로 '도덕적 해이'였습니다.

갓난아이에게 도덕적 해이를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런 경우 도덕적 해이라는 말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 탐욕에 길들여진 잔인함의 표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대기업들과 관련됩니다.

호황을 누리던 조선 산업이 내리막을 치닫게 되어 구조조정의 과정에 접어들었습니다. 회사를 살려 종업원들을 보호하겠다는 숭고한 목적을 전면에 내세워 정부는 수조 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였습니다. 하지만 보호되는 것은 대주주인 재벌들과 임원들뿐입니다. 이미 30%가 넘는 근로자들이 해고되었고,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더 많은 근로자들이 해고될 것입니다. 무려 4조 원이라는 돈이 국책은행을 통해 투입되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금액이 투입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해고된 근로자들을 위해 책정된 돈은 180억이라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정말 껌값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보도에 접하고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람입니다.

몇 년 전 미국의 리먼 브라더즈의 예를 보면, 구조조정 대상 은행들에 정부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자마자 임원들은 자신들의 보너스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먼저 챙겼습니다. 우리나라 대기업 임원들이 미국의 대기업 임원들보다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적자금이 투입되면 정부와 은행관계자들 역시 챙길 것 다 챙길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구조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정작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지 않고 열심히 일한 근로자들만이 모든 걸 떠안아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뿐입니까? 공적 자금으로 투입되는 돈이 누구의 돈입니까? 국민들의 혈세입니다. 조선업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국민들이 대대손손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사의 소유주처럼 군림하던 재벌가들은 자자손손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던 근로자들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게 되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과 후손들이 모든 빚을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 해이는 바로 이런 자리에서 냉정하게 헤아려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해고된 근로자들의 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인간다운 삶에서 벗어나 생존의 기로에서 허덕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빚을 지고, 깊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적 해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됩니다. 

포퓰리즘과 국가

오늘날 정치가들은 부자들을 돕는데 어마어마한 나랏돈을 투입하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시행하려 하면 포퓰리즘이라고 하고 그에 대한 비용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의 말에 일리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똑같이 공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보호망을 구축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역량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 티브이에서 노인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반영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빵을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은퇴한 후 17년이 되었는데 처음으로 다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었노라고 말하면서 활짝 웃는 그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보였습니다. 새롭게 기술을 배우고, 자신의 일자리가 있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권리이며 국가가 최우선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 역시 종북이며, 빨갱이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근본적으로 제도이며, 제도는 언제나 희생양과 허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포퓰리즘에 따라도 따르지 않아도 소외된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아무리 사회의 안전망이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어도 그 안전망이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사회 안전망이 되어야 합니다.

포도원인 교회

며칠 전 성경을 읽다가 때리듯 머릿속으로 다가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마 20:6-7)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기 때문에 일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일하지 않는 그들을 향해 '도덕적 해이'를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일자리가 없거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서 일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들의 현실을 파악하고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이 구절을 수십 번도 더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일자리와 관련하여 묵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관심은 언제나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 주인의 처분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자리와 관련해 이 포도원의 비유를 전체적으로 생각해보니 포도원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의 교회가 만일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라면 이 포도원 비유에서 말하는 내용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직업보도는 초기 교회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는 사도 바울의 말은 단순히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빈둥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일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의 능력과 효율과 상관없이 누구나 함께 일할 수 있는 포도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늦게 들어와서 한 시간을 일한 사람에게도 하루치의 품삯을 지불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누구든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토대가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기 교회는 바로 포도원이었습니다.

황제와 자본

초기 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황제가 주님이시다'라는 당시 사회의 인삿말을 하지 않고 '주님이 주인이시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모든 권력과 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고 주인이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날 자본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로마 시대의 황제보다 더 큰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는 더 무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황제가 주님이시라는 엄청난 권세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지신들의 믿음과 신념을 버리는 대가로 황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초기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고 박해를 당했고, 갖가지 방식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10번의 박해가 이어졌지만 기독교는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고 그들의 교회는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존엄성을 잃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엘리트들에게도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차례입니다. 자본이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를 통해 복음의 복음 됨을 세상에 드러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포도원인 교회는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말기 암 환자들의 후회가 더 이상 낭만에 초 처먹는 이야기가 아닌 사회, 용기 있게 세상의 아웃사이더가 되어 행복을 선택한 사람들의 기쁨을 드러내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포도원인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지기를 소망해봅니다.

(여기까지가 글의 내용입니다.)

가나안 성도님들에게

신앙생활이 오로지 구원의 문제이며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내용이 낯선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 전체가 신앙이며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웃,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내 삶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삶보다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보를 드립니다. 그런데 사실 마케도니아 성도들 역시 극한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돈을 모아 연보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 일 자체를 특권으로 여기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연보를 위해 금식까지 했습니다. 그들에게 누가 더 가난하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우선시하였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이 우리 시대라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우리의 신앙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복음에서 멀어진 까닭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젊은이들도 노인들도 삶이 여의치 않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만 도무지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가진 자들 역시 자신의 기득권과 삶의 질을 유지하려면 더 냉혹해지고, 무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냉랭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될수록 복음의 빛은 더욱 환하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일을 가나안 성도들이 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렵게 교회를 떠나게 된 가나안 성도님들의 사유가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본래의 복음을 회복하고,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더 깊게 알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이제는 제대로 된 신앙인,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분들이 성령에 이끌려 공동체를 이룬다면 바로 그 공동체는 포도원인 교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가나안 성도들은 자신의 교회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주님께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감사와 감격 속에서 부르는 새 노래는 사랑이 식어버린 교회를 따뜻이 데우고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둡고 혼란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뜻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께 돌아오는 가나안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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