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현, 라이즈업무브먼트, 오륜교회...
이동현, 라이즈업무브먼트, 오륜교회...
  • 천정근
  • 승인 2016.09.0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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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함이 더 나쁘다

나는 본래 남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 살이만으로도 벅찬데 옳으니 그르니 남의 살이 참견이 가당치 않다. 더욱이 그것이 내게도 해당되는 일이어서 내 연약과 죄를 생각나게 하는 일임에랴.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요, 공연히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는 일 아닌가.

1998년 미합중국 대통령 클린턴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인턴 여비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폭로돼 난리가 났었다. 그는 탄핵 직전까지 몰렸다.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한 공화당과 보수 우파 기독교계가 이 부도덕한 ‘케네디’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미국은 대단한 나라긴 했다. 특별검사가 청문회에서 대통령의 섹스 스타일을 까발리고 체액을 검사하는 대망신까지 주었으니.

그때였다. 노벨상 수상 작가들이 연명으로 미국사회의 성적 매카시즘에 자중을 요청했다. 그 선언 중 기억에 남는 한마디가 이것이다. “사람을 모욕 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때 미국 청교도의 아들이며 기독교 도덕의 화신을 자처하며 모욕의 한계를 돌파했던 청문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는 훗날 세계 최대 침례교대학인 베일러대의 성추문 사건을 축소하려다 총장직에서 해임된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세상살이의 넌센스와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나는 노벨상 작가들의 선언에 비로소 양심의 가책을 덜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래, 나 역시 성적 욕망의 곤혹스러움과 고뇌를 안고 사는 남자로서 클린턴을 정죄하긴 어렵다.’ 내게 더 중요하게 보인 문제는 그의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라 모욕의 한계였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던가. 모든 일은 절정에 도달하면 반전이 일어난다. 이를 성경적으로 번역해 본다면 ‘가증스러워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클린턴이 비록 성적 부도덕을 저질렀을망정 그를 망신 주는 행위도 도에 지나치면 가증한 일이 되고 만다. 힐러리는 케네스 스타의 지나친 까발림에 분노해 오히려 클린턴을 용서하게 됐다고 말했다. 요컨대 나는 누군가의 죄행이 아니라 정도에서 지나친 가증함에 대해서라면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가증의 죄성이 죄행의 죄성보다 더 나쁘다고 보는 것이다. 거기엔 죄에 대한 후회와 반성, 성찰과 회개, 거기서 나오는 생의 전반에 관한 검토로서의 겸손이 없기 때문이다.

‘전도’된 전도사들

신학교 시절 존경하는 구약학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은 원체 건강이 안 좋으셔 언제나 고저장단이 전혀 없는 일정한 톤으로 강의를 하셨다. 느리고 장중한 강의를 따라가려면 온 신경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듣는 시편이나 전도서 강의는 얼마나 황홀했던지. 너무 좋은 책의 문장이 벅차 몇 문장 읽고는 책을 덮듯이,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날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분의 구약 강의는 단지 구약성서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었다. 성서 읽는 법. 성서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 현실 가운데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되어야만 하는, 될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곧 성서적 앎과 삶의 일관성. 노력도 아니고 이해도 아니고 이미 하나가 된 로고스와의 일체. 그 신비를 일깨워 주셨던 것이다.

그 수업 중 잊지 못할 한 장면이 있다. 강의 중 어느 중년의 여전도사님이 질문을 드렸다. “교수님,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인데 왜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랑으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 않으신 거죠?” 그 질문을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망설였을까? 마침내 질문을 하려고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그러나 교수님은 그리 친절한 스승은 아니셨다. 수준 미달의 질문에는 대답을 안 하시고 ‘후~’ 하는 한숨을 쉬시곤 그냥 강의를 이어가셨다. 나는 그 전도사님의 질문을 듣고 ‘아뿔싸,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교수님은 어떤 대답을 하실까?

교수님은 지금까지는 결코 들어본 적 없는 격렬한 어조로 그 전도사님을 꾸짖었다. “지금 세상이 다 암에 걸려서 죽게 됐는데 고약이나 발라 주면서 ‘사랑합니다’ 그러면, 환자가 사나? 그게 자네가 아는 기독교인가? 그게 예수님의 사랑인가? 도대체 여러분들은 왜 사는지를 몰라.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몰라. 그러면서도 뭔가를 아는 척 사역이라는 걸 하지. 차라리 그만두게. 그게 여러분과 성도들을 위해 더 나은 행동일지도 몰라.” 그 전도사님은 물론 우리 모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날 교수님의 격렬한 꾸짖음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내가, 왜 사는지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그러면서 모든 것을 아는 척 사역이라는 걸 하는 전도(顚倒)된 관성의 전도사일 뿐이라면? 나는 지금이라도 목사를 그만두는 게 나와 성도들을 위해 나은 행동일 것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전도(傳道)의 메시지 아닌가.

이동현 목사

바보야, 문제는 신학이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단체 라이즈업무브먼트의 대표로 그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역을 이끌어온 이동현 목사의 성범죄가 언론에 공개되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를 향한 욕과 비난에 한마디 보탤 마음은 없다. 그건 이미 넘치고도 충분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이동현 목사 한 사람뿐 아니라 라이즈업무브먼트와 그들의 사역을 지지·참여·후원해온 모든 이들과 단체들, 교회들을 예외없이 비판하려고 한다.

내 질문은 이것이다. 왜 그들의 신학은 그 자신의 행위와 연결되지 못할까? 다른 말로 바꾸면, 왜 그들의 신학은 그러한 귀결로 끝날 수밖에 없는가? 이에 대해 내 친한 벗이고 현재 감리교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청소년 담당 사역자인 이현우 전도사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글쓰기가 조심스럽다. 부디 피해를 당한 분들에게 하나님의 도움과 위로가 있기를 빈다. 아울러 죄를 진 사람들의 법적 책임도 충분히 다뤄지길 바란다. 슬프다. 정치가 어수선한 시국에, 종교마저 이렇게 무력해도 되나 싶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저 두 사람이 윤리적으로 깨끗했다면 나에게 그들은 ‘좋은 목사님’으로 남았을까? 이 생각이 드는 이유는 성적 문제와 관련 없이 저들의 신학과 복음이 애당초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전병욱 씨의 책을 더러 읽었지만 돌아보면 내 삶에 무의미한 내용뿐이었다. 단순히 틀렸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내게는 와 닿지 않는 뜬구름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저들의 삶에 실망한 모양이나(물론 실망해야 옳다), 나는 저들의 신학에 대해 이미 마음을 닫았기에, 그들의 삶이 무너진 사실에 크게 신경이 쓰이질 않는다. 신경이 쓰인다면 그들이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쓰인다. 그리고 외롭다. ‘유명 목사님’들의 신학은 현실에 가 닿지 않는데, 그래도 제도권 안에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모습들.
- “전병욱, 이동현 사건을 생각하며”(2016.8.4.)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도 분노하고 개탄하고 탄식했다. 또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대안을 내놓았다. 그 골자를 정리하면 교회 권력의 (폭력성) 문제와 여성에 대한 잘못된 성의식(혐오) 그리고 목회자의 인격적 자질 같은 말단(末端)들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현우 전도사님의 외로움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현장의 청소년 사역자다. 나는 빌 클린턴이 조지 부시 시니어와 맞붙었을 때 그를 KO패 시켰다는 한마디를 변용해 이 전도사님의 논지를 강조하고 싶다.

“바보야, 문제는 신학이야.”

왜 신학이 문제인가

이동현 목사의 성폭력 문제(과거 삼일교회 전병욱이나 요한동경교회 김규동 목사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는 단지 개인의 인격적 사역적 실패가 아니라고 본다. 더더욱이 이런 ‘지속적이고 질 나쁜’ 범행을 실수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내 강조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개인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진리가 그렇듯 총체적인 진리 부재 곧 신학 실종의 증거다. 아니 실종이 아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듯(막 13:14) 처음부터 신학이 부재했고 혼합되고 오염된 세속적 가치가 그 자리에 있었다. 신학의 문제란 그들 사이사이 호황과 번영을 누리며 범람해온 사상과 행태의 문제라는 말이다. 그것이 어찌 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권력이나 변태성이나 자질의 문제일 수 있겠는가. 즉 신학이 문제라는 내 진단의 증거는 그들이 그간 혼자 사역해온 게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우리 목사들은 세 가지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첫째, 설교할 준비. 둘째, 짐 쌀 준비. 셋째, 죽을 준비. 그러나 이 셋은 사실 하나이고 각각 다른 둘을 포함하는 기재태세다. 열에 아홉을 감하여 셋째는 어쩔 수 없대도 첫째와 둘째는 준비돼야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이번 라이즈업무브먼트의 서울광장 집회 대회장을 맡았던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를 대표적으로 거론하고 싶다. 언론을 통해 그가 대회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론하는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다. 그는 설교를 맡았다가 집회가 취소되자 언론의 관심에서 빠졌다. 오륜교회와 라이즈업무브먼트의 관계, 김은호 목사와 이동현 목사의 동역 관계 같은 일들은 알려지지도 않았다.(이동현 목사와 라이즈업무브먼트는 그동안 오륜교회 청소년 사역을 전담해왔다.) 김은호 목사는 ‘대회를 진행하는 것보다 자체적으로 회개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대회장으로서 혹시 이 사실을 모르고 참석하는 학생들 때문에 진행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취소 결정을 잘한 것 같다’고 밝혔다. 철저히 자기 보신의 모양만을 보인 유체이탈의 화법이다. 대회장으로서, 설교자로서, 동역의 책임자로서 일말의 책임감도, 반성도, 고뇌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목사들은 말을 하고 사는 자들이다. 말로써 설교가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말이고 설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정직한 말도 아니고 설교는 더더욱 못되었다. 애초 그는 어떻게 대회장을 맡았을까? 청소년들을 향하여 어떤 설교를 준비했었을까? 그 설교는 어떤 신학을 근거로 한 것이었을까? (지금 인터넷에는 오륜교회에서 행해지는 신사도운동 치유집회의 해괴한 영상들이 떠돌고 있다.)

만일 그가 제대로 된 설교를 준비했었더라면 그는 당연히 사태가 어떻든 준비된 설교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설교를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월호의 선장처럼 제일 먼저 도망갔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폭로 이후 처리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그 상태로 무슨 논의들이 벌어질까? 어떻게 하면 별 탈 없이 잡음들을 소거하고 기왕의 매진해온 일을 계속해 나갈까 그 궁리를 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실패한 설교자 그룹에 이동현 목사를 섬긴 동역자들과 후원해온 사람들, 역대의 대회장들, 그들의 성공에 일조하고 연합하고 연대해온 사람들까지, 그들 모두가 연합해서 이러한 사태와 스캔들을 만들어 낸 것이라 주장한다. 그 증거가 이동현 목사의 저지른 짓이고 그것이 폭로됐을 때 그의 비루한 말과 행동이다. 또한 같은 맥락의 김은호 목사의 말과 행동이고 후속 조치를 하겠다는 라이즈업무브먼트의 말과 행동이다. 그리고 폭로된 범죄로 인한 공동 피해자겠지만 어느 면으로는 이동현 목사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도 소위 청소년 사역이란 것을 함께 해온 비겁한 방조자요 묵인자인 모든 관련자들의 말과 행동들. 거기엔 도대체 신학이 없다. 이 모든 게 우리들의 설교요 전도요 기독교라는 신학적 인식이 없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학이 없는데 무슨 놈의 해결이며 책임이며 재발의 방지며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 대표를 바꾸고 성교육을 시키고 사역자가 개인적으로 여학생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매뉴얼을 만드는 것으로 청소년 사역을 계속하겠다는 것인가? 어찌 그렇게 담대한가.

언제나 처음처럼

예수님의 설교에 영향을 미쳤을 유대교 랍비 힐렐은 ‘죽는 날까지 네 자신을 믿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의 처음과 끝은 오직 이 한마디 ‘자기를 믿지 말라’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해 하나님께 귀의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그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이유였고 내용이었고 결과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칭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는 방언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고 오로지 ‘자기부인’, 이 한 가지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철저한 자기부인으로 출발한 우리가 어느덧 자기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자기를 믿지 말라’가 어느새 자아도취 ‘나를 따르라’로 바뀌었다. 그리곤 스스로를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 기드온과 다윗과 사무엘과 예언자들, 사도들의 반열과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권위의 자리까지 끌어올렸다. 이들 영적 멘토들에겐 만인제사장주의나 대의민주주의 따위는 해당되지 않는다. 도스또옙스끼의 《까라마조프가(家)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변설’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우리는 그 무한한 자유를 향유할 용기가 없어 그것을 영적 지도자들에게 반납해버렸다. 이제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다시 오신대도 빼앗을 수 없는 그들의 기득권이 되었다. 알겠는가. 이것이 세습의 신학인 것을. 그들이 무슨 짓을 하건 법적 권리를 상실한 성도들에겐 발언권이 없다는 것을.

그들의 메시지는 본래 처음 가졌던 자기를 믿을 수 없고, 믿어선 안 되고, 믿지 말라던 가르침과 어떤 관계일까? 그것은 과연 동일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모두가(나를 포함하여) ‘자기를 믿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믿음이다’라는 사역자 복음의 신학적 차이. 여기서부터 어그러진 신학의 필연적 귀결은 자아의 몰락, 자아의 부패, 그런 실패와 패착일밖에 다른 끝이 있을 수 없다. 모모한 교회의 담임목사들. 모모한 선교단체 대표들. 모모한 찬양팀의 리더들. 모모한 교계 기관의 대표들. 모모한 상담가와 영적 멘토들. 도무지 자기부인을 모르는 그들의 신학은 무엇에 기초해 있는 것인가? 그들의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 왜 그들은 그런 괴물들이 되었을까? 그들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제안은 근원적이고 전면적 재검토 외엔 없다. 도마뱀 꼬리 자르기로 적당히 끝내고 여전히 하던 일은 계속해 나가자는 정신으로는 안 된다. 거기선 제2, 제3의 이동현 전병욱 오정현들이 대기하고 있다. 더럽혀지고 비루해지고 추해져 가며 남은 설교를 오로지 자기변명에 바치는 설교자들은 이미 넘치고 넘친다. 우리에겐 세 가지 준비를 말과 삶으로 보여줄 설교자들이 필요하다. 가령 Rise Up이든 Down이든, 또 무슨 Movement든 Performance든, 오래된 교회든 새교회든, 모두들 각자의 집으로 가정으로 교회로 개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동현 전병욱 오정현에게만 요구하지 말고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누가 남아서 수습하고 사역을 계속해 나갈 거냐고? 내가 추천하겠다. 내 친구 이현우 전도사 같은 이에게 맡기라. 그가 청소년들과 고뇌하며 쓴 글과 설교와 삶을 보라. 그에겐 자격이 충분하다. 무엇보다 오늘날 좀처럼 찾기 어려운 신학 사상이 그에겐 있다.

회개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왜 사역이라는 길에 뛰어들었나. 여기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법이 있다.(마 20:16). 여기엔 있는 자는 받아 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법이 있다.(마 25:29)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치료할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다. 세울 때가 있고 헐 때가 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평화할 때가 있고 전쟁해야 할 때가 있다.(전 3:1~8) 우리는 (자기부인) 이외의 모든 수고가 거짓과 기만에 불과하고 다섯 번이나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일 뿐이라는 전도자의 설교를 이미 다 알고 있다. 어차피 결과를 알기 때문에 아무리 베드로처럼 모른다 모른다 부인하고 도망치려 해도 결국 그 자리로 돌아올 밖에 없음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도 왜 과거를 회개치 못하고 현재를 돌이키지 못하고 미래를 처음으로 돌아가게 못하나? 대답은 다시 신학의 오류요 패착이다. 그리고 그 오류와 패착의 산물(産物)이 ‘먹고사는 기독교’다.

기독교는 이제 아무리 부인해도 먹고사는 기독교(좀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자아실현의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가장 반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의미로 끼리끼리 나누어 먹는 기독교. 그것이 자아의 실현과 사역적 성공과 직업적 정상을 오르는 스펙이 되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강단의 목사들(평신도도 마찬가지다)이 무슨 유사복음 비슷한 강론을 펼쳐도 그것은 공개된 레토릭이거나 짜고 치는 알리바이밖에 안 된다. 모든 처음이자 처음의 기초인 그 신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변질이 아니다. 결론은, 처음부터 부재한 신학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는 것이다.

내게는 그들에게 회개를 기대할 수 없는 명백한 증례가 한 가지 있다. 유럽여행을 함께 간 간사들은 눈앞에서 그의 비행을 보고도 그의 평소 성격을 알기에 아무 말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이것이 이 문제를 권력의 문제로 진단하는 한 증거일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리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처음부터 이들의 사역이란 이따위 사이비(似而非) 복음이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복음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이 배운 것은 기껏 유사복음의 말과 말의 흉내뿐이었다. 기지도 못하면서 나는 척을 해온 것이다. 그런 게 무슨 결과를 말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가령 라이즈업무브먼트의 사무총장은 대표의 친동생이었다. 그는 형의 행위들을 전혀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공개될 때까지 숨겨질 수 있었을까? 왜 이동현 목사는 사임을 선언하며 동생에게 대표직을 넘기겠다고 했을까? 왜 그들은 예정대로 집회를 강행한다고 했을까? 이것은 누가 결정한 것인가? 이것이 과연 권력과 욕망의 문제인가? 개인들의 윤리적 문제일까? 그들의 뒤에는 오륜교회와 김은호 목사 같은 대회장들도 있었다. 모셔오고 모셔주는 영적 인적 네트워크들. 회개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용서란 없네, 회개만 있을 뿐

나는 라이즈업무브먼트와 이동현 목사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들이 그쪽 방면에선 꽤나 유명했는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없어도 그만이었던 셈이다.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라이즈업무브먼트뿐이 아니다.) 그러나 없는 게 나았던 그것이 있음으로써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영혼들을 파괴하고 젊은이들을 망쳤다. 무엇보다 적은 누룩이 기독교 전체를 쓰지 못할 것으로 오염시켰다. 그런데 그렇게 망한 정신으로도 그래도 괜찮다며 꾸역꾸역 계속해서 사역이란 걸 하려고 한다. 왜, 왜, 왜? 이에 관련해 매우 적절한 뜻밖의 사람이 과거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왔다.

최덕신 전도사(그는 이제 전도사가 되었다)는 이동현 목사의 죄행이 이렇게 공개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했다. ‘하나님이 그를 귀히 여기셔 이 일이 터지게 하셨다고 믿는다. 그것이 그를 살리는 것이기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그는 ‘유명해지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라 지적했다. ‘자신이 뭔가 된 듯한 착각을 갖기 쉽고 영적으로 대단하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동병상련이랄까. 그러나 여전히 그의 관심이 공개된 죄행의 수치와 불운에 있지 그 악행의 희생자들에게 있지 않음이 아쉽다. 그는 아직 자기가 왜 그렇게 됐는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는 걸까. 그런데 놀라운 건 그도 역시 계속 사역이란 걸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게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다. 과연 회개란 무엇인가?

“용서란 없네. 오로지 참회만 있을 뿐.” 이 말은 법정 스님의 질문에 성철 스님이 답한 《설전(雪戰)》(책읽는섬, 2016)이란 책에서 읽은 말씀이지만, 작금 우리 기독교의 현실에 딱 들어맞는 설교다. 회개란 처음의 그 태세 그 하나로 일생을 견지해 나가는 것. 그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는 구원의 길이다. 성서에 용서가 아무리 강조되고 많이 나온다 한들 죄인의 고백은 오로지 회개뿐이다. 용서의 강조도 회개의 촉구인 것이다. 희생자가 읽을 때에도 회개일 터인데 하물며 파렴치한 가해자가 가증하게 용서를 운위할 수 있겠는가. 한번 회개했으니 죄가 씻겼다고 그것이 복음이라 주장하려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구원파가 아닌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하고 멋대로 설교들을 한다. 온갖 죄인들이 오히려 잘났다고 떠들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게 지금 이 나라의 풍속이나, 그것으론 절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과연 악귀가 말을 잘하지 않았는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 19:15) 밑천이 다 드러나 벌거벗은 채 도망치면서도 끝내 기독교 전체를 끌고 다니려는 스게아의 일곱 아들. 당신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랑의 비평을 위하여

폐일언(蔽一言). 들을 리 만무겠으나 비평이 비평되기 위해 대안을 제시하겠다. 라이즈업무브먼트는 이미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억울하겠지만 이제부터 하는 사역은 불법이고 사기다.

청년들은 이제부터 ‘자기를 믿지 말라’ 가르치는 선생에게 가라. 자기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공중 부양하는 말쟁이들의 퍼포먼스, 거짓 치유집회, 생의 막중한 책임의 고뇌를 종교적 용어의 감언과 센티멘털 찬양과 유치한 중보기도로 회피하고 진정한 직면과 책임을 배울 기회를 당신들에게서 박탈하는 종교 사업가들에게 현혹되지 말라. 그들에겐 처음부터 신학이 없어 올바른 사색과 사유와 사상이 나올 수 없다. 그러니 감언이설 외에는 보여줄 게 없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그런 이들에게 맡기지 마시라. 그들은 당신들의 자녀들을 자기들 사역의 도구, 자아실현과 욕망의 도구로 인식한다. 그것이 그들의 신학이다. 만일 알고도 그런 자들과 함께 믿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그들의 바알이고 당신들의 아세라일뿐 기독교와 상관이 없다.

성도들은 이제 그런 자들을 기독교의 사역자로 인정해주지 마시라. 총회장이니 대회장이니 고문이니 온갖 감투를 쓴 그들에게 권위와 명예와 돈주머니를 맡기지 마라. 그들에게서 떠나고 그들이 유사 기독교 사역을 그치도록 그들을 굶겨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무엇이 우리를 이 유사복음, 사이비 기독교에서 구원해줄까? 그는 누구일까? 그런 사역자가 없다면 나라도 감당하고 싶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지. 나를 믿지 말고 당신도 믿지 말고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자. 교회든 선교단체든 아카데미든 그 어떤 단체나 사역이나 모임이나 지도자나 스승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각자 자기부인의 허리를 동인 자립인(自立人)이 되자. 차제에 비난을 싫어하고 사랑의 주님만을 섬기는 독자들께서는, 그 사랑으로 나의 주제넘은 비평도 사랑으로 용서해주시기를. 흐르는 강물처럼. 

천정근 / 자유인교회(경기도 안양) 담임목사. 모스크바국립대학 및 대학원(석사)에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연민이 없다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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