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은 올 것인가?
종말은 올 것인가?
  • 지성수
  • 승인 2016.09.10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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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첫 번째로 하는 일이 TV를 켜서 간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살피는 일이다. 그러나 하루도 어김 없이 언제나 지구촌 곳곳의 고통이 화면에 펼쳐진다. 도대체 이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일까?

당장 내 목구멍에 밥이 들어오고 편안히 잠을 자는 데는 지장이 없고 이런 편안한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를 계산 하면서 사는 나 같은 소시민에게는 이런 질문이 분수에 넘치는 것일 것 모른다. 그런 고민쯤은 힐러리 보다는 훨씬 솔직한 트럼프에게나 맡겨 놓고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할 일일 줄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 들은 먹물은 빠지지 않은데다가 희미하나마 신앙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메시아주의는 미래의 어느 막연한 시점에서 현실의 절망적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한 슈퍼스타를 기다리는 열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메시야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정감록의 정도령 사상마냥 인간이 열심히 믿고 잘 하고 있어야 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하는 것을 보아서 오는 것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이 땅의 민중들이여,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 이제 곧 그 분이 오신다!” 라고 주술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즉 개신교의 메시아주의는 역사적 종말과 인간의 믿음 사이에 일정한 함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이 들면서 그런 메시야주의에는 점점 회의적이 되어 지금쯤은 유대교로 개종을 해야할가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발터 벤야민

그것은 유대교의 메시야주의 때문이고 나에게 그런 눈을 뜨게 해준 인물로서 발터 벤야민이라는 인물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파국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서구 세계의 변증법적 시간관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는 법이여…”이다. 즉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의 지평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벤야민은 파국을 향하여 치닫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게 그럴까?” 하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유대교 메시아주의에는 세상의 법칙과 하늘의 법칙, 세속적 질서와 신적 질서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구원이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원리도 아니고, 인간 주체의 변혁을 향한 의지와 노력과도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유대교 사상에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구원은 전적 초월의 사건이 되는 셈이다.

기독교에서 종말에 대하여 특별히 예민한 종파들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제7일 예수재림교회’라는 것이 있다. 흔히 안식교라고 하는 그들은 늘 종말에 징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좋은 것만 먹고 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종말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흔히 종말론에 매몰되어 있는 다른 교파와 달리 좋은 점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유엔 제재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북의 경제가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김정은의 등장으로 내부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군도 이탈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조금만 더 조이면…” 북한이 조만간 망할 것이라는, 망해야 한다는 믿음에 사로 잡힌 보수 우익들 처럼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다.

‘실현되지 않을 종말론’이라는 것이 있다. 즉 종말론은 실제 이루어질 사건이라기보다 인류에게 경고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종교인들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시작이 있었으니 언젠가는 끝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너무 종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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