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탐욕의 곳간'을 즉각 비워라!
교회는 '탐욕의 곳간'을 즉각 비워라!
  • 강만원
  • 승인 2016.09.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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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은과 금은 없다. 그러나..."


강만원 대표 (미주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물은 고이면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썩은 물은 악취를 풍겨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마침내 소중한 생명을 빼앗는다. 물은 계속 흘러야 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서서히 흐르면서 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곳곳에 생명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물의 존재이유이다.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고이면 물이 썩듯이 재물도 한 곳에 고이면 반드시 썩을 수밖에 없다. 탐욕으로 썩고, 방탕으로 썩고, 교만으로 썩고, 걱정과 염려로 썩을 수밖에 없다. 물이 썩어 고약한 악취를 발하듯 재물이 고이면 더러운 욕망의 악취를 풍긴다. 재물에서 썩은 냄새가 나서가 아니라 재물을 향한 탐욕이 속절없이 사람을 타락과 부패로 썩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토록 타락하고 목회자들의 부패와 비리가 코를 찌르듯 악취를 뿜어내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흔히 지적하듯, 신학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목사들의 허술한 자질 때문인가? 물론 학문의 깊이도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버젓한 신학교가 하나도 없던 시절에 오히려 목사들은 지금보다 한결 깨끗하지 않았던가.

원인이야 여럿 있겠지만, 교회가 타락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에 재물이 고이기 때문이다. 교회 곳간에 닥치는 대로 쌓아둔 ‘은과 금’이 차고 넘치면 마치 물이 고여 썩고 말 듯이 교회는 타락하고 만다. 재물은 타락을 부추기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예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성과 비교하시겠는가. 교회는 훗날을 기약하며 재물을 쌓아두는 닫힌 곳간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수시로 재물을 나눠주는 열린 곳간이 되어야 한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에게 베드로가 외쳤다.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행 3:6). 영어 성경에서 이 구절은 복문으로 구성된 한 문장이 아니라 분리된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한글성경처럼 ‘...없거니와... 걸으라’가 아니라 ‘...없다. 그러나(But)... 걸어라’로 엄연히 다른 문장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무슨 뜻인가? 은과 금이 ‘없을망정’ 다른 것이 있다는 대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은과 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소중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필연적인’ 의미이다. 교회의 곳간에 재물이 넘치면 그에 역비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은 초라하게 작아진다.

마음 가득히 재물을 담으면 면 사람은 너나없이 재물의 가공할 능력(power)에 하릴없이 의존하기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넘쳤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을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돈주머니를 차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는, 돈에 의존하지 말고 온전히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라는 명령이다. 은과 금이 넘치면 서서히 영성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곳간에 은과 금을 쌓아둔 교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상실한 교회이다.

예수께서 도우라고 명령하신 세상에는 먹을 빵이 없어 굶는 자, 마실 물이 없어 목마른 자, 돈이 없어 병든 채 죽어가는 자가 차고 넘치는데 곳간에 재물을 넘치도록 쌓아두고 예배당 지을까, 선교센터 지을까, 목사 노후자금을 얼마나 비축할까 고민하는 교회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 존재한다고 보는가?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일한들 100만원 남짓한 수입에 지나지 않는 초라한(?) 일자리를 잃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세 모녀’가 동반 자살하는 비참한 현실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정작 교회라는 곳에서 수천 억짜리 교회당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소리치며 ‘사랑이 제사보다 소중하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들, 입으로는 ’주의 종‘이라며 정작 주인의 자리에서 온갖 영화를 탐하는 자들에게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느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영성은 신비한 표적을 드러내는 초월적 능력에 머물지 않는다. 신비나 기적은 다른 종교들이나 심지어 이단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병을 고친다든지 귀신을 내쫓는 능력은 일부 용한(?) 무당들이나 축사逐邪하는 자들에게서도 쉽게 보고 듣는다. 그런 허접한 이방신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영’이다. 그리고 사랑의 영은 허세와 탐욕을 모두 내버린, 가난한 영성에서 비롯된다.

교회는 주저 없이 곳간을 비워야 한다. 예수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셨다. 따라서 ‘새 언약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신약시대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명목으로 종종 종교인들의 배를 불렸던 헌금이나 십일조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기 위한 연보가 있을 뿐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해야 하는 '연보'를 거둬들여 화려한 건물 짓는데 혈안이 되고, 겉멋에 빠진 종교인들이 허세 부리는데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곳간을 비워 가난한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나눠주어야 한다.

사랑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바쳐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명백한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보내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진다. 아르케처치... 재정 사용부터 시작해서 반드시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교회가 돼야 한다.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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