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우리를 억압하는 폭력
신화, 우리를 억압하는 폭력
  • 최태선
  • 승인 2016.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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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된다

얼마 전 리우 올림픽 펜싱 에페 종목에서 박상영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11:14라는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15:14로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동시타'라는 것이 있는 에페 종목에서 역전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상영 선수는 마음속으로 '할 수 있다'를 반복하며 한 점, 한 점을 따라붙어 마침내 기적 같은 역전승을 일궈냈습니다. 정말 해설자가 방송을 하지 못할 정도로 소리를 지를 만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금메달을 딴 박상영 선수에게 축전을 보내며 대통령은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승리를 일궈낸 그를 거론하며 우리 국민도 박상영선수와 같이 '하면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한국민들이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면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금수저, 흑수저하는 패배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런 정신을 가지기만 해도 현실을 타개할 수 있다면, 박상영 선수 이후의 모든 펜싱선수들은 그런 정신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한 것일까요? 단체전에서는 박상영 선수도 그다지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그도 금메달을 딴 후에 정신이 해이해져서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가 사라졌던 것일까요?

신화

모든 운동 선수들이 '하면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운동을 하지만 극소수의 선수들만이 국가대표가 되고, 국가대표들이 된다고 해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면 된다'는 정신이 없어 국민들이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대통령의 사고는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사실 '하면 된다'와 같은 사고는 일종의 신화입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가족과 또래와 문화가 부여한 사고방식과 기대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그런 기대와 사고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안에 가득 차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 중 일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참 존재에는 장애가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이 요구하고 강요하는 모습에 우리 자신을 끼어 맞추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려받는 많은 지식들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지식의 상당 부분이 일반화라는 안일한 사고와 고정관념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게 구성된 일련의 지식체계를 신화라고 부릅니다. 신화는 실재처럼 가장된 채 우리에게 전해지는 허구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수용되고, 안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신화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신화는 우리를 억압하는 폭력으로 작동합니다.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지는 수도 있지만(박상영) 대부분(박상영 이외의 선수와 모든 운동선수들)의 경우에는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화는 정말 신적인 존재들이나 신의 기적적인 도움을 받은 이에게만 가능한 특별한 비실재입니다. 그것을 일반화할 때 그것은 약자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통치의 수단이 됩니다. 그 결과로 희생양이 양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재

기독교 신앙이란 이런 신화의 허구성을 파악하고 복음의 실재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세상의 신화를 바로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당연히 삶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방식이 허구이며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실재임을 믿고, 그것을 보여주는 길을 걷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신화는 ~~하면 ~된다는 식으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불의해도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합니다. 개인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불의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세상의 모든 불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 눌린 자, 갇힌 자, 병든 자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이웃이며 그들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있어야 그런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돈이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콩 한 쪽이 있으면 나누어야 합니다. 콩 한 쪽도 없으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의복과 신발은 40년간 해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신화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공급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실재입니다.

선택

그리스도인의 앞에는 늘 세상의 신화와 복음의 실재라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결과와 책임이 따릅니다.

스가랴서 2장에는 스가랴 예언자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람과 육축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곽이 없습니다. 성곽이 없는 고대 도시는 무방비 상태의 위험한 곳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와께서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어주십니다. 여호와의 불 성곽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불 성곽은 무용지물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그 불 성곽을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불 성곽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여호와의 불 성곽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십니다.

이 상징은 대단히 중요한 성서의 은유입니다. 불 성곽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은 결코 가시적이거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강력한 힘보다, 더 정확히는 재물이나 돈보다 완벽합니다. 여호와의 불 성곽은 그 어떤 인간들의 철옹성보다 더 안전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언자의 환상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신앙이란 어려운 것입니다. 여호와의 불 성곽에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용기가 없는 신앙인들에게 그 선택은 너무도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선택과 용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알았지만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기적이 그분을 죽음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부활은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담대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성령공동체를 이루어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복음을 살게 하였습니다. 기적은 그들의 일상이었고,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믿음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그 선택을 한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것, 나아가 우리의 삶으로 이 시대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복음이 진리라는 것, 그리고 복음이야말로 실재라는 것을 증언하고 입증해야 합니다. 노파심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 선택에 이어지는 삶은 복된 삶이며, 가장 행복한 삶이 될 것임을 밝혀둡니다. 그 삶이 하나님 나라의 샬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복의 삶을 여러분들과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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