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학교와 공교육의 발전 그리고 기독교
초기 학교와 공교육의 발전 그리고 기독교
  • 유영
  • 승인 2016.10.12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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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과 공공성의 관계 (3)

2부에서 이어짐

18세기 이후, 사회 제도와 산업 구조는 큰 변화를 맞는다. 이 시기 근대 학교가 시작되면서 국민 교육은 강조, 강화되었다. 특히 산업 구조를 유지할 공장 노동자 양성을 위한 기본 교육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는 교육의 공공성 논의를 불러왔다. 근대 교육 제도에서 학교는 교육 공공성의 상징이자 논란의 대상으로 존재했다. 

조선 말기, 열강의 무력에 의해 개화가 이뤄진 이후, 학교는 우리나라의 교육 중심으로 들어왔다. 선교사들에 의해 발전한 기독교교육도 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우리 사회에서 학교는 상류 계층으로 올라갈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이로 인해 학교와 입시 제도는 공공성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학교가 공공성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 안에 있는 불합리를 강화하는가 약화하는가에 달렸다. 이를 위해 학교 제도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학교와 제도의 공공성 논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피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 학교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짚어 보면 현재 우리 교육이 나갈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주민의 요청으로 세워진 조선시대 첫 학교인 원산학교.

근대식 학교와 공교육의 발전

교육은 인간 창조 이래 존재했다. 선대의 노력으로 알아낸 생존하는 방법과 숙련된 기술을 후대에 전수하는 것에서부터 교육은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인간의 지식이 발달하면서 학교가 등장한다. 서양과 동양에서 모두 교육 공동체로서의 초기 학교 형태가 나타나지만, 현대적 학교는 근대 유럽에서 시작했기에 유럽의 학교 형성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 유럽의 경우, 학교는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만 존재했다. ‘수도원 학교'나 ‘대성당 학교', ‘대주교 학교'와 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교회가 학교를 세우고 관할했다. 그러나 도시의 발전은 이러한 교육 구조에 큰 변화를 요구했다. 중세 말, 도시 발달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교회 인력만 양성하는 학교들만으로는 시민들의 교육 욕구를 다 채울 수 없었다. 결국 교육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도시에는 새로운 학교가 세워졌다. 

성직자학교 전경.

이렇게 출현한 세속적 학교가 라틴어 학교와 문법 학교, 모국어 학교 등이다. 라틴어 학교와 문법 학교에서는 수도원 학교나 대성당 학교와 큰 차이가 없었는데, 라틴어와 성경, 자유과를 중심으로 교육했다. 모국어 학교는 라틴어 학교의 하위 단계로써 초등교육 수준의 모국어 읽기, 쓰기 등을 가르쳤다. 

중세의 교육제도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학교 형태는 중세 말기, 즉 13세기에 출현한 대학이다. 대학의 출현은 '학교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었다. 대학은 교회나 국가가 주축이 된 것이 아닌, 교사, 학생이 모인 조합(길드)의 형태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은 교사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이룬 일종의 독자적 조합으로 행정적, 정치적, 재정적 독립을 이룬 단체였다.

학교는 조금씩 발전해 갔지만, 아쉽게도 보편적으로 모든 이가 학교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대다수는 부모의 직업을 이어갔기에 학교보다는 생활을 통해 교육하는 환경이 더 유력했다. 기술공이나 예술가 조합은 학교라는 형식보다 도제 형식의 전수를 선호했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르네상스를 거쳐 프랑스 시민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도래하는 18세기 말까지 이어진다. 

중세 시대 세워진 대학의 수업 모습.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은 인간 삶의 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특히, 산업혁명은 이전보다 강력한 도시화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일차 산업 종사자들을 도시로 모아, 이차 산업 공장 노동자가 되게 했다.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등장한 엘리트 지식층과 자본가, 공장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계급은 도시화로 등장한 노동 계급에 새로운 민중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지식인들은 르네상스 전통을 이어 계몽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고, 부르주아들은 계속 발전하는 기계를 돌리기 위해 공장 노동자들의 기초 교육을 원했다.

이러한 사회적 필요는 다양한 형태의 학교를 낳았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의 경우, 네 종류의 민중 학교가 생겼다. 숙련장인 계층의 자녀와 제자가 다니는 기계공학교, 가장 열악한 환경에 있는 민중 계층이 이용한 일요학교, 민중 전체를 대상으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한 모험사립학교와 조교제학교가 있었다. 

이중 모험사립학교와 일요학교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일요학교는 아동 노동자를 착취하던 당시 상황이 반영되어 세워졌다. 주 중에도 나가서 일해야 했던 아동들이 유일하게 배울 기회를 일요학교가 제공했다. 민중이 일요학교를 선택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많은 민중이 모험사립학교를 선택한 것은 의외였다. 조교제학교는 상류 계층의 자선 사업으로 재정과 교육 환경이 우수했다. 이에 비해 모험사립학교는 자립적이고 독립적 운영을 추구했다. 이 시기 노동자 계층도 경제적 독립과 자립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산업혁명 시기, 공장에서 일하는 아동 노동자들.

안타까운 것은 모험사립학교가 열악한 환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은 국가적 지원과 교육 제도를 개선해 영향력을 넓힌 조교제학교가 공식적 초등학교로 발전했다. 조교제학교를 평가하는 다양한 시선이 있지만, 정부가 주도하는 국민 대상의 보통 교육이 공교육으로 등장한 것이다. 

유럽 다른 국가에서도 공교육은 다양한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시작된다. 프랑스의 경우는 영국과 다른 논의에서 시작한다. 대혁명 이후, 국민의회는 국민교육제도의 기본 방향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한쪽에서는 교육은 국가를 위한 것이므로 공공 목적을 위해 철저히 국가가 관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가 이제 자유시민의 것이 되었으므로 교육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교육은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공교육론자들이 승리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교육 결론은 전 세계 교육의 방향을 결정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 주도의 공교육은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 이뤄낸 시민 교육 논의가 이뤄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근대 교육 형성과 개신교의 영향

한국의 근대 교육은 개항 이후, 즉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 직후 시작됐다. 1883년, 정부가 세운 동문학과 원산 지방 민간 유지들이 세운 원산학교가 근대 교육 기관 설립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근대 교육은 서구 열강에 대비할 힘을 기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조선의 봉건적 체제 요소 위에 서구 문명을 선별적으로 배우도록 했다. 

1895년, 홍범 14조가 발표되면서 신분제와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문명개화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이 사회적으로도 자각됐다. 이후 근대 학교 설립 열기는 뜨거워졌고, 전국적으로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근대 교육이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개화 초기 정부가 주도한 교육 변화는 역사적으로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한계가 뚜렷했다. 정부가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탓이다. 먼저 재정 부족으로 교육 시설이 부족했다. 구시대적 사고가 바뀌지 않아 교육 기회 역시 상류 계층에게만 열려 있었다. 하층민에게 돌아오는 교육 기회는 적었다.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육 기회가 열려 있던 조선의 남성은 물론, 교육 기회가 없었던 백정, 노비,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조선 민중에게 교육을 제공했다. 교육 기회가 열려 있던 조선의 남성은 물론, 교육 기회가 없었던 백정, 노비,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선교사들의 교육 목적은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교육 활동을 통해 서양 문물과 선진 사상을 소개하고, 구습을 개혁해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여 자주, 자립, 자치하는 정신적 자세를 가르치는 데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교육이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 ‘입신양명.’ 흔히 말하는 출세의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는 현대 한국 사회가 지닌 교육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해 볼 여지가 크다. 경상대학교 노영숙 교수는 당시 조선의 교육 목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 교육은 참된 유교사상을 벗어나 교육을 개인적인 입신, 출세와 영달의 수단, 즉 과거에 급제하여 고급 관리가 되는데 목적을 두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교육은 출세 및 영달을 위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했다. 따라서 교육은 개인주의와 상고주의를 장려하고, 단지 개인 일신상의 편익과 일가의 영예를 누리게끔 해주는 하나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 교육은 계급 사회였던 조선 사회가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한 공로가 크다. 배재학당에서 전승되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이야기가 이를 잘 드러낸다. 그는 하인을 교실까지 데려온 학생에게 '하인 없이 학교에 다니는 게 공부의 시작'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홍범 14조로 법 조항에 명시된 차별은 없어졌지만, 시대정신에 남아 있던 차별을 없애는 데 주력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학교 수업은 식민지 지배 강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우리 사회에는 서구적 학교 제도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근대화 논리로 무장한 지배 세력도 서구적 학교 제도 정립에 힘을 쏟는다. 유럽 지배층의 논리와 같이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사용하기 원했다. 이로 인해 황국 신민을 강요받아 보통(국민)학교 제도가 정착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위기에 끝까지 저항한 학교들은 독립을 지향하던 민족 사학과 기독교 정신을 강조해 신민이 되기를 거부한 개신교 사학들이었다. 이러한 저항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발발로 막을 내린다. 일제는 모든 외국인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선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이 땅을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우리 사회의 공교육 논의는 해방 이후 이뤄진다. 해방을 맞이한 한국은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공교육을 실시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미국식 학제를 가져와 초등 6년, 중등 6년 과정의 학제를 시행하지만, 곧 중등과정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바뀌면서 대학 4년을 포함해 미국식 6, 3, 3, 4 제도가 자리 잡힌다. 국가가 주도해, 공적 자금으로 학교 제도를 마련해 국민 교육을 진행한 공교육 국가가 되었다. 

공교육은 산업혁명의 부산물로 공장 노동자 양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 역시 크게 받은 탓이다. 산업 발전을 주도하는 것과 민주적이고 주체적인 시민 양성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는 공교육 제도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시대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려 노력했다. 기독교교육이 공공성을 크게 증진하게 도운 결과였다. 일제강점기 아래 기독교교육이 증진한 공공성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며, 기독교교육이 사회의 공공성 논의에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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