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학교와 여성 교육을 통한 공공성 증진
초기 기독교 학교와 여성 교육을 통한 공공성 증진
  • 유영
  • 승인 2016.10.20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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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과 공공성의 관계 (4)

3부에서 이어짐

기독교 교육으로 세상을 변화해 갔던 학교들이 공교육 제도 속으로 들어가면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아니, 기독교 사학들이 오히려 공공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꼽히기까지 한다. 기독교 학교들이 사회 지도층 양성에 교육 초점을 맞춘 인재 양성에만 열을 올린다. 명문대학·명문 고등학교를 명패로 내걸고, 높은 수업료와 학벌 사회를 조장하여 오히려 교육의 공공성을 훼손했다. 

거기에 국가 교육 정책을 넘어 기독교 가치로 무장한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나선 기독교 대안학교들도 ‘귀족 학교’라는 오명으로 얼룩지는 추세다. 국가 교육 정책에서 벗어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학교 운영이 학생들이 내는 학비와 기부금 등으로만 운영되는 탓이다. 이를 이용해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하거나 시설 비용을 늘려 높은 학비를 받는 학교도 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초기 기독교 학교와 선교사들이 사람에 집중하는 교육으로 어떠한 변화를 이끌었는지 살피고, 현대적 상황에서 변화한 공공성의 문제를 짚어 어떠한 대안이 있는지 모색해 보도록 한다. 

초기 선교사들의 여성 교육과 박에스더

선교들이 세운 학교는 당시 신분 제도와 남녀차별을 극복하는 일에 일조했다. 이중 여성 교육을 통한 신여성의 등장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여성 차별 문제는 여전한 사회 문제이지만, 초기 학교가 이러한 문제 제기를 시작하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학교가 키운 여성들의 인식 변화가 어떠했는지 구체적 인물을 통해 고찰해 본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통해 주체적 삶을 산 대표적 여성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를 꼽을 수 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이었다. 결혼 후,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남편 성을 따르는 서구 방식을 받아드려 박 씨가 되었다. 신앙이 깊어져 세례를 받기로 했을 때 올링거 목사에게 에스더라는 이름을 받았다.

초기 이화학당 학생들. 몇 년간 악의적 소문으로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 없었지만, 여성이 주체성을 세워가도록 도운 대표적인 학교로 성장했다.

김점동은 김홍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감리교 선교사들이 김홍택의 집 근처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는데, 김홍택은 아펜젤러의 눈에 들어 고용됐다. 그는 선교사들을 도우면서 스크랜튼 대부인이 여학교를 세운다는 소식을 접했고, 좋은 기회라고 여겨 결혼 적령기였던 첫째와 둘째 딸 대신 셋째 점동을 입학시킨다. 

점동의 입학은 초기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이 눈알을 파먹는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악의적인 소문이 많았던 터였다. 길거리에 버려진 여아들이 주로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에 입학했다.

점동은 총명했다고 한다. 영어를 금방 배웠고, 선교사들과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이러한 영어 실력은 여성 의료 선교사 로제타 홀이 보구여관 의사로 왔을 때, 통역으로 일할 기회를 마련해 준다. 그곳에서 일손이 필요했던 로제타 홀에게 병리학과 약학 등을 배우며 의료를 접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서양 여의사들의 유용한 조수로 성장한다. 

주체적 여성으로의 성장

16세가 된 김점동은 가족과 보구여관 조선인들에게 결혼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특히 부모는 혼인을 시키지 않으면, 비기독교인에게라도 시집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에 의료 선교사 윌리엄 홀이 박유산을 신랑감으로 추천한다. 자신이 선교한 건실한 그리스도인 청년이라고 본 것이다.
결혼 후, 박에스더와 박유산이 함께한 촬영한 사진.

의학 공부를 하려고 했던 점동은 결혼을 두고 크게 고민하지만, 해야 할 결혼이라면 조건 여부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인과 결혼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이는 당시 점동이 로제타 홀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남아 있다. 

"당신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압니까? 3일 동안 저는 뜬 눈으로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느질도 잘 못 합니다. 그러나 우리 관습은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점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박 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저의 어머니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줄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참 묘한 느낌이 듭니다." 

고종의 훈장 수여식에서 촬영한  박에스더의 사진.
조선으로 돌아와 많은 여성을  돌보는 의사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선교사로 살았다.
33살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편지 내용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박에스더는 당시 막노동을 하던 박유산의 재산과 지위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를 어머니에게 피력하겠다고 밝힌다. 이는 당시 조선 여성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고백이었다. 사회 흐름과 부모의 압박에 반박하는 일은 지금도 쉽지 않다. 믿음을 유일한 조건으로 보겠다는 생각 또한 기이했다. 당시 박에스더가 선교사들에게 교육받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고백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윌리엄 홀 선교사가 사망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로제타를 따라 박에스더 부부도 미국으로 따라간다. 박에스더는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결혼부터 도미까지 기간은 1년 6개월에 불과했다. 이때마다 박에스더는 자기 생각과 의지로 진로를 결정한다. 주체적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남편 박유산도 특이한 선택을 한다. 남편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던 남녀관계를 선택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외조에 온 힘을 다한다. 로제타 홀 가족 농장과 박에스더가 진학하는 볼티모어 여자대학 근처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 뒷바라지를 한다. 하지만 박유산은 에스더의 졸업 시험 3주 전 병으로 사망한다. 

조성 여성 선교를 위한 첫 조선인 선교사

고된 경험과 상황 끝에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박에스더는 조선 여성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첫 마음을 잃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1900년, 조선에 돌아온 에스더는 보구여관과 평양의 여성병원(광혜여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며 선교사로 활동한다. 

여성해외선교회의 연례보고서에 활동 지역과 내용이 들어가는데, 박에스더의 이름과 활동이 1910년 사망할 때까지 들어간다. 그녀가 당시 여성해외선교회에서 인정한 유일한 조선인 여성 선교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에스더의 성장 배경과 의료 선교 업적을 연구한 이화여대 이방원 박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박에스더는 한말 격동기에 태어나 의료 선교사로서 활동하다 34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한국 여성 의학의 문을 열었으며 참된 의술을 실천함으로써 한국 의료여성기독교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한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한말 한 여성이 자신의 제한된 환경을 극복하고 전문인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회가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로제타 홀 선교사 가족과 박에스더 부부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촬영한 사진.

박에스더는 당시 여성 선교사들의 교육 선교가 양성평등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해 얻은 사회적 공공성 증대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창조 세계에서 인간의 무지로 인해 여성은 평등한 권리와 자리를 확보할 수 없었다. 이를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아 제자리를 찾도록 도운 것은 선교사들의 기독교 교육의 영향이었다. 

이 외에도 많은 여성이 초기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받아 '신여성'으로 성장한다. 이화학당 출신 여메레는 교육자로 신앙 지도자로 활동하며, 많은 족적을 남긴다. 이 외에도 간호사, 교사 등 전문직종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기독교 학교를 통해 양성된다. 기독교 교육은 '주체성' 획득과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갈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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