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것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못난 것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양재영
  • 승인 2016.11.20 0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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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와 저항'의 박총원장 제자목자회 강의 정리

[미주뉴스앤조이(LA)=양재영 기자] LA를 방문중인 한국의 재속재가(在俗在家) 수도원인 ‘신비와 저항'의 박총 원장 세미나가 계속되고 있다.

제자목자회 주관으로 18일(금) 주님의빛교회(주혁로 목사)에서 열린 강의에서 박총 원장은 ‘왜 수도원 운동인가?’라는 주제로 ‘한국 교회의 새로운 대안으로 재속 재가 수도원 운동을 선택한 이유와 그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나눴다.

<미주뉴스앤조이>는 개신교 내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도심속 수도원 운동에 대한 박 원장의 강의를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

'신비와 저항'의 박총 원장 ⓒ <미주뉴스앤조이>

- 우선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저는 학부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문학자가 되려고 대학원까지 다닌다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공부했다.   거기서 한국에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유명한 브라이언 월쉬(Brian J. Walsh)와 함께 공부했고, 나중에 가톨릭 신학대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2011년에 한국으로 들어가 <복음과 상황>이란 잡지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다, 병에 걸려 병가를 낸 후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신비와 저항’이라는 대안적 교회를 4년째 꾸려오고 있다.

가족으로 아내 하나와 아이들이 넷이 있다. 제가 아내가 하나라고 한 이유가 있다. 제가 입은 수사복에는 세 개의 매듭이 있는 띠가 있다. 각각의 매듭은 ‘가난’, ‘정결’, ‘순명’을 상징한다. “우리는 가난이라는 귀부인과 결혼했다”고 말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뜻을 따라서 우리도 가난하게 살기로 결단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결혼 안하고 살았지만, 저 같은 재속 수도사는 '사람'과 '가난'이라는 두번의 결혼을 했다고 한다. 

- 재속 재가(在俗在家)라는 말을 설명해 달라.

저 같은 사람들을 흔히 재속회에 속해 있는 ‘재속 재가 수도사’라고 말한다. 재속(在俗)은 속세에 거하면서 수도하는 사람들, 재가(在家)는 가정을 꾸리고 수도하는 수도사들을 재속 재가 수도사라고 말한다.

세상과 분리되어 은거하면서 수도하는 탈속수도의 전통을 깊이 존중한다. 우리 가운데 그런 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분들을 통해 통찰과 격려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전혀 다른 자본주의 시스템에 살면서 재속재가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수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밥벌이에 치이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받는 것 자체가 이미 수도라고 생각한다.

토마스 머튼은 이를 ‘위장된 묵상'이라했다. 세상에서 일도하고 사람도 만나는 등 소소한 일들을 다해야 한다. 이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우리는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저는 30명의 작은 공동체를 자비량으로 이끌면서, 여섯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짜증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수도생활이고 묵상이다. 머튼의 말처럼 ‘위장된 묵상'인 것이다.

사자성어 중에 '거진이진'(居塵離塵)이란 말이 있다. ‘먼지 속에 거하되, 먼지를 떠나있다'라는 뜻으로, 세상 속에 거하되 세상을 떠나 살았다는 바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대인 은어시'(大人 隱於市)라는 말도 있다. 인간의 욕망이 가장 겉으로 드러나는 곳이 시장이다. '대인은 그런 시장 속에 은거하여 산다'는 말이다. 저는 큰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이러한 동양의 말을 통해 큰 감동과 통찰을 얻고 있다.

제 딸 이름이 '화니'(花泥)이다. ‘진흙 속에서 핀 꽃’이란 의미로 더러운 진흙 같은 세상을 살되 연꽃처럼 아름답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이다.

박총 원장이 새로운 수도원 운동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 <미주뉴스앤조이>

- ‘신비와 저항’이란 명칭이 흥미롭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와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저항'이 결합된 명칭이다.

한국교회는 교회라는 온실 속에서 신앙을 키워내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하지 않는 영성은 자기 만족일 뿐이다. 영성적 측면에서 한국교회의 두가지 금기어인 ‘신비'와 ‘저항'의 봉인을 풀지 않는 다면 주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신비와 저항은 ‘팔색조'의 공동체이다. 🔺 만민제사장제를 격하게 믿는 ‘평신도 공동체’, 🔺 삶을 누리고 즐기고 희열하는 ‘향유 공동체’, 🔺 적은 소유 속에 큰 풍유함을 누리는 ‘청빈 공동체', 🔺 뭇 생명과 벗하며 살아가는 ‘생태 공동체', 🔺 더불어 즐거이 공부하는 ‘학문 공동체', 🔺 이 땅의 불의에 맞서는 ‘저항 공동체', 🔺 가슴은 물론 물질까지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 🔺 획일성을 싫어하고 다양성을 좋아라 하는 ‘발랄 공동체'를 추구한다.  

신비와 저항을 시작할 때 사용했던 문구가 있다.

“우리는 주님 품에 안길때까지 이 땅에서 수도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수도는 세속과 담을 쌓는 대신 세상 속에 들어가 벌고, 쓰고, 먹고, 싸고, 사랑하고, 애 낳고, 즐기고, 아파하고, 분노하고, 저항하는 재속/재가수도입니다.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은 주중수도원입니다. 지역교회에서 미처 일구지 못한 밭을 함께 일구어가는 동역자로서 존재하고자 합니다. 지역교회를 섬기고 더 풍성한 목회적 지형도를 갖추고자 합니다.”

첫해 10여명이 모였다. 지금도, 30명을 넘기지 않으려고 제한을 하고 있다. 만 3년이 지난 작년에 다섯 분이 종신서원을 했고, 올해에도 한 분이 서원을 했다. 3개월, 6개월씩 하는 유기선언과 달리 평생 주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종신서원은 두려운 일이다. 자신의 삶과 생명, 인생을 거는 것이다.  

- 수도원 운동은 개신교 전통에선 낯설게 들린다.

4세기 이후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시절이 지나가고 교회가 교권화되면서 기독교가 부귀와 영화의 종교로 타락한다. 이때 먼 옛날에 목마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본질을 찾으려는 운동이 수도원운동으로 이어진다.  

베네딕토(한자로는 ‘분도') 성인 등이 주도한 수도원 운동은 동방에는 사막 교부들의 영성으로, 서방은 공동체 안에서의 수도원 운동으로 이어진다. 수도원 운동은 교회의 타락을 방지하고, 주님의 삶을 온전히 따르고 싶은 이들에게 길을 보여준다. 로마 가톨릭의 저력은 수도원에 있는 것 아닌가?

안타깝게도 개신교는 수도원에 대한 부정적 정서가 있어 오랫동안 금기시 되었다. 하지만, 수도원은 결코 가톨릭의 전유물이 아니다. 종교개혁의 후손들은 모두 수도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막스 베버는 종교개혁을 설명하면서 “루터와 칼빈은 수도원을 없애고, 대신에 온 세상을 수도원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종교개혁 정신은 모든 직업이 성지(聖地)이고, 그 장소가 성소(聖召)이다. 그래서 수도원을 혁파하고, 온 세상이 수도원임을 선포한 것이다. 개신교는 수도원 파괴주의자가 아닌 온 세상을 수도원으로 만든 루터와 칼빈의 후예들인 것이다.

개신교 수도원 운동을 이끌고 있는 김진 목사는 “종교 안에 수도원이 없다는 것은 병리현상이다"고 진단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에 잃어버린 수도원 전통의 명맥을 되살릴 때가 되었다.

요즘 은퇴하신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기도원'이라 했을 텐데, ‘수도원'이라 부르는 것이 흥미롭다. 이동원 목사의 ‘필그림 하우스', 김진홍 목사의 ‘두레 수도원' 등이 그렇고, 장신대에서 은성수도원에 가는 것이 필수 코스로 되어 있다. 개신교 안에서도 수도원이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개신교 안에서는 ‘수도원’, ‘수사’ 등의 단어는 어색한 면이 있다.

- 오늘 주제인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존의 수도원도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하나님만 경배하며 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급자족을 해야하기 때문에 거의 하루종일 노동을 하며 살았다. 가장 중요한 예배와 기도는 노동이었다. ‘삼종기도'라는 것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루 세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것으로, 그만큼 일을 많이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가톨릭과 성공회, 정교회에는 재속 수도회가 많지만, 개신교에는 거의 전무하다. 개신교 전통에 그 명맥이 끊겼기 때문에 이를 다시 시작해보자는 움직임을 ‘새로운 수도원 운동'(New Monasticism)이라 했고, 연구자들은 수도원 운동의 끊어진 명맥에 불을 지핀 사람으로 본 훼퍼 목사와 떼제 공동체(The Taizé Community)의 로제 수사를 언급한다. 특히, 떼제 공동체는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에 메이지 않은 진정한 에큐메니컬 수도원이었다.

본 훼퍼 목사님은 나치정권에 반대하면서도 세상속에 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끌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공모에 가담해 사형을 당하기도 한다. 그의 유명한 비유인 ‘미친 운전사의 비유'를 보면 그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

“만일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큰길로 나간다면 나는 목사라고 해서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한테서 핸들을 뺏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본회퍼 목사는 <신도의 공동생활>과 <나를 따르라>라는 책을 통해 ‘교회 개혁은 수도원의 갱신으로부터 나온다'며 수도원 공동체를 수입하려는 비전을 친히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본 훼퍼 목사를 새로운 수도원운동의 원조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12가지 지표'는 이 운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일 될 것이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12가지 지표>

1. 제국의 버려진 땅(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체제)에 재정착한다.
2. 공동체 구성원이나 궁핍한 사람들과 재물을 나눈다.
3. 낯선 사람들을 환대한다.
4. 교회와 지역 공동체가 분리된 현상을 애통해 하며 정의와 화해를 실천한다.
5.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겸손하게 따른다.
6. 예수님과 옛 수도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공동체의 규율을 만든다.
7. 공동체 간의 삶을 공유하고 나눠라.
8. 독신을 서원한 비혼들과 결혼한 가정의 자녀들을 지원한다.
9.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가까이 산다.
10.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라 지구를 보존한다.
11. 폭력과 갈등 해결을 위해 평화를 이룬다.
12. 관상적 삶을 훈련한다.

 

제자목자회 주관으로 주님의빛교회에서 ‘왜 수도원 운동인가?’라는 주제로 박총 원장의 강연회가 열렸다 ⓒ <미주뉴스앤조이>

- 현실을 살면서 남과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이 결코 쉽게 들리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풍요로운 소비사회인 미국 문화와 상충된다.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자리가 아닌 듯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소비사회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는 <상징적 폭력>을 말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옛날처럼 힘으로 누르지 않는다. 자기를 이상적으로 보이도록 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상징'이라는 폭력을 통해 살아간다. 피지배자가 지배자가 소유한 것을 욕망하는 자리에 서있는 한 불의한 체계는 계속될 수 밖에 없다. 트럼프의 펜트하우스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한 이 사회의 불의한 체계는 지속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이 체제를 유지하는 공헌자이기도 하다.

강준만 교수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바꾸려는 열정보다 상류층에 편입하려는 열정이 더 큰 이상, 전 인구의 한 자리수 밖에 안되는 상류층의 이해관계가 온 국민의 다수결의 원리로 관철되는 불의가 지속될 수 밖에 없다"

이 말은 미국과 같은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보면 우리가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우습게 알고, 하나님의 가치를 욕망하면서 그것을 위해 서원하고 살아간다면, 우리시대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위협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정신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에 38년된 병자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베데스다 연못은 세상의 ‘루저’들이 모인 곳이다. 그 연못은 한 명만이 치유될 수 있는 ‘승자독식',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우리 사회와 같은 곳이다.

그런데, 38년된 병자는 자신을 연못에 넣어줄 사람도 없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아무런 인적, 물적 토대가 없는 사람이다. 애초에 지기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마치 장미꽃을 돋보이기 위한 안개꽃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요즘 한국사회는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가 아니다. 수많은 좌절에도 희망이 없으니 ‘헬조선’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나?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촛불을 든 사람들은 그나마 건강한 사람들이다. 절망 속에 자조적이 된 사람도 많고, 실제로 먹고 살기 바빠 시간이 없는 사람도 많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민망하게 여기시며 ‘자리를 접고 떠나라' 하신다. 그가 깔고 있던 매트는 병을 낫고 싶은 사람들의 ‘미련'이다. 도박하는 사람들이 본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승자독식’ 사회에서 승리할 수 없으니 '자리를 들고 떠나라'는 예수님의 말에 순종하자마자 병이 나았다.

예수님은 기존의 경쟁시스템에 미련을 두고 남아 있지만 ‘잉여’와 ‘루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그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lifestyle)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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