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난 것이 오히려 은혜였다"
"교회를 떠난 것이 오히려 은혜였다"
  • 최태선
  • 승인 2016.11.2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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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논문 표절과 거짓 입학 등의 문제로 재판 중에 있는 한 교회의 성도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제게 문제가 있기 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노라고 말하면서 사실 그동안 교회를 그토록 오래 다녔는데 실상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몰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마치 통조림 공장에서 나온 깡통들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은 지금 교회를 떠나 있지만 교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이 오히려 은혜였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성도님과 같은 가나안 성도들이 많아진 것은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잘못된 교회의 모습을 참된 교회로 알고, 거기서 들은 왜곡되거나 편향된 복음을 복음으로 알고 고착된 채 성숙하지 못하거나, 교리만을 고집하며 스스로의 구원을 확신하는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부패한 가톨릭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개신교 신자들이 되었고,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 종교개혁으로 쇄신에 이르게 된 가톨릭을 생각하면, 오늘날 가나안 성도들의 존재는 분명 떠난 자와 떠나지 않은 자 모두에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안일한 신앙에서 벗어나 복음이 말하는 진리의 길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가 되었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교회와 복음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히 교회와 복음을 떠나 세상 지혜로 회귀하는 경우가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자의 자리에 앉게 되어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십상입니다.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배움이 필요하지만 교회를 떠나 혼자 있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이 가나안 성도가 처하게 되는 상황이며 어려움입니다. 게다가 교회는 물론 자신이 가졌던 믿음 자체에 대해 회의가 들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길에 들어서고, 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리적인 믿음이나 사변에 치우친 믿음은 허망한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열매를 보아서도 알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교회 잘 다니고 믿음 생활 잘 할수록 권위적이 되고 남을 판단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앉게 됨은 물론 사납고 폭력적이 된다는 것을 그동안 목격해 왔을 것입니다.

차제에 가나안 성도님들이 믿음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성도님들과 함께 걸어보는 아브라함의 여정'이라는 제목으로 묵상하는 글을 써보려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성도님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첫 번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 전승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유일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거나 생경한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그가 어떻게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알려면 유대인의 전승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전승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전승(희년서, 미드라쉬, 필론, 요세푸스 등등)들을 따라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과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상의 허무함을 깨닫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상인이었습니다. 물론 그 역시도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우상들을 보며 자랐고 우상을 만드는 과정과 만들어진 우상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신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상의 허무함을 깨닫는 것은 동시에 참된 신에 대한 숙고로 이어졌습니다.

한 번은 신전에 큰 우상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본 아브라함이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신이 어떻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아브라함의 묵시록 1장)

한 번 이런 생각이 들자 아브라함은 마음속으로 밀려오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 손으로 만든 것들을 섬겨야 하는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우리 삶을 지속시켜 주는 이 땅을 신으로 섬겨야 하는 것 아닌가?' 계속해서 그의 생각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이 소출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이번에는 하늘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밀려오는 생각은, 해가 비치지 않으면 세상이 캄캄해지고 땅도 아무런 소출을 내지 못한다는 에 이르자. 이번에는 태양만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가 지는 것을 보고는 '태양은 신이 아니다.'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해가 지면서 달과 별들이 뜨자 그것들을 보고는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자 이렇게 말했다. "이것들도 신이 아니다." 그는 더욱 고민하게 되엇다. '이러한 것들이 신이 아니라면 진짜 신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것들은 떴다가 지는데 그러한 것들을 움직이는 신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미드라쉬, Hagadol, 창세기12:1)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런 숙고의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은 마침내 참된 신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깨달음을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아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공공연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일은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가장 첫 번째 사람이 바로 우상제조자였던 그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랍비 하야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데라는 우상 제조업자였다. 그가 한 번은 어딘가를 가면서 아브라함에게 우상들을 팔도록 했다. 한 남자가 와서 우상 하나를 사려고 하자 아브라함이 "손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하고 물었다. 손님이 쉰 살이란다."하자 그는 "세상에 쉰 살이나 되었으면서도 하루도 살지 못하는 우상에게 예배드리려합니까?"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껴 떠나갔다.

다음에는 한 부인이 밀가루 한 바구니를 갖고 와서 아브라함에게 청했다. "이것들을 저 우상들에게 바치렴."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고 막대기를 들어 그 우상들을 부숴버렸다. 그러고는 막대기를 가장 큰 우상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도대체 네가 우상들을 향해 무슨 짓을 한 것이냐?"하고 물었다. "제가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리지요. 한 부인이 고운 밀가루 한 소쿠리를 갖고 와서 우상들에게 바치기를 원했답니다. 제가 그렇게 하려고 했더니, 한 우상이 '내가 먼저 먹어야 한다.'고 우겼어요. 그러자 다른 우상이 '무슨 소리, 내가 먼저 먹을 거야.' 하고 우겼어요. 그러자 가장 큰 우상이 일어나서 그 우상들을 막대기로 때렸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나에게 장난치는 거냐? 어떻게 걷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저 우상이 다른 것들을 부숴놓았겠느냐?" 그러자 아브라함이 외쳤다. "아버지, 지금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아버지는 우상들이 걷지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을 알면서 왜 숭배하나요?"(<창세기 랍바> 38,13)

하나님을 알게 된 이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믿음을 삶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으로 한 번은 아브라함에게 그 우상을 팔도록 시켰다. 한 사람이 우상을 사러 오자. 아브라함은 우상들의 머리를 망치로 치면서 "이것으로 사겠습니까? 아 이것이 더 좋겠네요." 하였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본 손님이 그냥 가버렸다.(미드라쉬 하가돌; 창세기12:1)

전승의 존재 이유

유대 전승이 전하는 데라와 아브라함에 대한 여러 우상 이야기들은 성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그 근거 역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던 것일까요?

그들은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셨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참된 종교심에서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승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그 첫 번째는 이성의 중요성입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우상숭배자들과 달리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사서 그 우상에게 복을 비는 종교적인 행위는 오늘날도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따르는 관습이며 의식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신앙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믿음의 행위에는 우상숭배자와 다르지 않은 수많은 요소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저는 교리중심의 신앙 역시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미를 모르고 무작정 믿고 따르는 종교적인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복음의 파괴력을 상실하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을 뿐 아니라 지탄까지 받는 한심한 종교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처럼 생각하지 않고 믿는 우리의 신앙행태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신앙은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결과적으로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달라지면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해해주지도 않습니다. 다른 것은 배척을 당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론 생명을 내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자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용기를 개인에게만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공동체를 이루어내고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은 공동체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용기를 내는 것이 아브라함처럼 개인적인 몫만은 아닙니다. 그런 공동체가 없는 상태에서 당시로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아버지에게 맞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됩니다.

갈등은 박해로 이어집니다. 박해를 하는 이들은 다수이고 박해를 당하는 이들은 소수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다수는 항상 소수에 대해 무자비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음 번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 소수는 단지 희생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신앙은 이처럼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큰 건물과 좋은 시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지만  오늘날 대형교회들이 붐비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려는데 기인한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대가 없는 신앙은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All or Nothing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그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다해 응답한 것입니다. 그냥 어느 날 뚝 떨어진 명령에 밑도 끝도 없이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선택한 후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정말로 알고 믿고 있는가?

그분의 말씀대로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가?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분을 따르려는가?

주님은 과연 나의 모든 삶의 주인인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다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영원히 불만족스러운 것이며 성서가 우리에게 약속한 어떠한 것들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그야말로 All or Nothing입니다. 이번 기회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라함처럼 응답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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