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다움 회복하려는 교회여, '광장에 서라'
교회다움 회복하려는 교회여, '광장에 서라'
  • 유영
  • 승인 2016.12.03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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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뉴스앤조이 (뉴욕) = 유영 기자] 얼마 전 참석한 한 목회자 포럼에서 있었던 일이다. 11월 초에 진행한 행사다 보니, 언론에 집중조명이 시작된 ‘최순실 게이트’를 두고 많은 말이 오갔다. 점심시간이나 강의 중간에만 이야기 나온 게 아니다. 발제를 마치고 토론 시간에도 이와 관련한 질문이 던져졌다. 

설교를 두고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교회 청년들이 이 일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는 참석자 발언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70년대 대학생이었던 기독 청년들의 질문과 다르지 않았다. 많은 목회자가 안타깝게 여기며, 이러한 교회 현실이 부끄럽다고 했다.

“교회에서 더욱 심각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우리는 말을 못 하고 있다. 교인들이 이러한 현실을 이야기하게 하고, 목회자들도 변해야 한다. 우리 내부가 외부에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많은 목회자가 아쉬운 답안지에 100% 수긍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 개혁을 위해 교회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실제 교회에서도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교인들은 강단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여과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지난 2012년 문창극 씨가 한 교회에서 일제식민 사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연한 영상 갈무리.)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도 광장이 필요하다. 토론하고, 대화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시위를 통해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다. 초대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사도들이 교회의 모든 것을 운영하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헬라파 교인들이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고 나섰다. 구제 물품이 히브리파 교인들 중심으로 나뉜 탓이다. 

이 일로 사도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교회의 분위기를 다잡고,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하고 가르치는 자리에만 있겠다고 선언했다. 교회 행정과 정치는 이를 전문적으로 맡아서 진행할 집사를 선출해 이뤄지도록 했다. 

교회에 광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당연히 물리적 광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교인들이 모여서 의견을 피력하고, 토론하고, 결론에 따라 지도자가 책임을 지는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광장은 너무나 교회다운 일이다. 교회와 신학은 그렇게 세워져 왔다. (아무리 담임목사라고 해도 손을 떼고 물러나야 하는 부분에서는 물러나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연습하고, 사회에 ‘등경 위에 놓인 등불’이 되어야 한다. 교인들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도록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민주적(또는 민주주의)이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다수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정이 가장 중요한 탓이다. 어떠한 일이 논의되고, 결정되고, 진행되고, 열매 맺는 과정 말이다. 무척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지난 11월 9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신학생 시국 기도회 (사진 : 뉴스앤조이 이은혜)

최근 뉴저지 베다니연합감리교회 이기성 목사의 지난 27일 설교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 목사는 불의에 저항하는 목회자들의 사회적 행동을 ‘비성경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근거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명제였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소리는 ‘헌법’에 명시된 것이니, 기독교인은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주권을 외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설교를 접하면 교회에 광장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러한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지적이 온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하다. 설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에 토론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천주교의 교황무오설과 무에 다르단 말인가.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한 말은 우리 생사여탈과 모든 행보가 그의 손에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우리 모두가 놓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국가를 이룬다. 국가는 정치를 통해 조직된다. 이때 생기는 권력의 주체는 나라마다 다르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세워진 우리나라는 ‘대의민주주의’로 이뤄졌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권력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우리 국민에게서 나온다.

성경도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정치와 관련이 있다. 초기 이스라엘은 대단한 정치 기구도 없는 지방 자치를 선택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지파와 지역을 다스리고 판결하는 판사(사사)가 중심이 되어 살았다. 모두가 하나님의 공평한 다스림을 받는 동등한 백성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왕을 원한 건 실수다. 마지막 사사 사무엘은 ‘왕정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님’을 강조했다. 그래도 광장에서 백성들은 왕을 요구했다. 토론하고, 결정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왕을 주신다. 하나님을 상징하고, 대리하는 하나의 직책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간다. 왕이 있던 시기 국민을 지칭하던 백성으로 말이다. 

하나님께서 반대한 왕을 세웠지만, 지금 우리 교회를 보라. 설교와 교회학교 공과는 모두 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는 걸 반대했는데, 백성이 광장에 나와 요구해 왕이 섰다. 그러니 이 왕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고 하는 목사가 몇이나 있겠는가.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거리에서 함께 기도하는 기독교인들. (사진 : 뉴스앤조이 구권효)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민주적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인 까닭이다.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한다. 그리고 우리의 탐욕이 사람을 버려 아픔을 느낀다. 그 눈은 늘 고통받고, 억압받고, 불의에 놓인 ‘사람’을 향한다. 이 민주적 절차가 목회자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질서', 그 자체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절차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광장에 서야 한다.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고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다. 이는 교회에서만 아니라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민주적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조차 하나님은 대의를 이뤄가기 위해 사용하신다. 그러한 선한 의지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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