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보며 떠올린 '하나님나라'
[채식주의자]를 보며 떠올린 '하나님나라'
  • 유영
  • 승인 2016.12.08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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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 [채식주의자]를 읽고

[미주뉴스앤조이 (뉴욕) = 유영 기자] 최근 한강 작가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미국에서 책을 구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미뤄왔는데, 며칠 전 전자책으로 출판된 사실을 알았다. 책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까 우려하며, 종이책보다 30%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해 태블릿 PC로 한장 한장 읽어 나갔다. 

주인공 영혜를 둘러싼 화자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혹독했다. 폭력 그리고 죽음, 고기가 영혜에게 주었을 이해받지 못한 고통이 답답하고 암울하게 다가왔다. 소설을 평한 글은 많이 있으니 개인적 감상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도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 아닌가. (소설을 보는 이해력이 떨어져 곡해할 수 있으니 주의하시라.)

<채식주의자> 표지와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

광대가 튀어나올 정도로 마른 주인공 영혜와 달리 튀어나온 아랫배가 인상적이라 그런지 ‘채식주의자’라는 제목 자체에서 받는 공포가 컸다. 육식을 즐기는 터다. 거기에 영혜가 채식을 선택한 이유는 기괴한 꿈과 기억을 보며, 나를 육식하는 사람에 이입했다. 그래서인지 육식주의자(?)의 폭력이 담긴 서사가 가장 눈에 띈다.

52쪽과 53쪽에 나오는 어린 시절 영혜의 기억이다. 

'어느 날 우연히 주인집 딸인 나 영혜의 다리를 물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만 했던, 주인집 딸을 물기 전까지 영리하다고 동네 사람들 칭찬이 자자했던 우리 개 흰둥이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 "달리다 죽은 개가 고기 맛도 좋다"는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근거 없는 말 때문에 오토바이에 매달려 동네를 일곱 바퀴째 도는 동안 살점이 툭툭 터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대문간에 서서 오토바이에 묶일 때부터 그 개가 죽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던 아홉 살 영혜는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죽인 개로 잔치를 벌이며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그 개의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말에 얼떨결에 흰둥이의 살 한 점을 얻어먹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뚝딱 비울 정도로 흰둥이의 살을 맛있게 먹었었다. 오래전에.’

영화 <채식주의자>의 한 장면. 언니가 새집으로 이사해 가족이 모인 자리, 가족들이 영혜에게 고기를 권하며, 억지로 먹이려고 한다. 아버지가 나서기 전, 어머니가 먼저 딸에게 몸을 생각해 고기를 먹으라고 권유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으로 7명을 죽인 전공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며,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일상에서 느껴지는 흔한 폭력이 보였다. 영혜의 언니가 새집으로 이사해 가족을 부른 자리에서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던 장면이다. 남동생이 뒤에서 영혜를 잡고, 아버지는 강제로 고기를 입에 쑤셔 넣으려고 한다. 말라가는 딸을 생각하려는 마음도 보이지만, ‘왜’ 채식을 선택했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가서 영혜는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육식을 일상의 폭력으로 규정한다면, 음식 거부는 모든 욕망을 거부한다고 해석된다. 죽음 자체를 거부할 필요가 있는지 묻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언니가 떠올리는 장면에서 두 자매는 대비된다. (심지어 남편과 동생의 예술과 불륜의 경계에 있던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후의 일이다.)

일상의 평범함 폭력을 받아들이고, 집과 사업을 확장하며 일상의 욕망을 충족한 언니는 영혜를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한다. 이렇듯 마른 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의 시점이 담긴 연작 소설 제목은 <나무 불꽃>이다. 언니의 자살을 막았던, 하지만 동생 영혜의 죽음을 언니가 받아들이게 하는 존재다. 

일상의 폭력에 내몰린 여성을 본다. 그리고 폭력이 상징하는 존재, ‘육식하는 나’를 돌아본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일상의 폭력을 정당하게 여기고, 이를 받아들이게 다시 여성에게 강요하는 존재는 아닌가. 그리고 내 주변의 남성은 이 일에 동참하는 공범이 아닐까.

이를 예술과 육체의 욕망으로 승화하는 형부의 모습은 어떤가. 유일하게 처제를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여성의 아픔을 표현으로만 이해하고, 위로하려는 남성의 모습은 아닐까. 처제가 다른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 아무 말없이 앉았던 그다. 하지만 과도로 자해하자 무언가 상실감에 다급히 그를 업고 병원으로 향하는 모습에서 폭력에 동조하고,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 위로하고 이해하는 듯 말하는 남성을 본다. 

영화 <채식주의자>의 한 장면. 정신병원에서 모든 음식 섭취를 거부하고 말라 죽어가는 영혜와 언니 인혜.

오늘도 육식을 했다. 일상의 폭력에 동참했다. 나의 만족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했다. 돼지 불고기를 먹으며 이런 노래가 떠올랐다. (죄책감이 조금, 많이 찾아왔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기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자와 어린 양이 뛰어논다. 사자는 일상의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을, 어린 양은 폭력의 피해자인 희생양을 의미한다. 일상의 폭력이 먹고 사는 문제로 더는 정당화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리라는 가사는 그런 의미에서 참 아프다. 가능할까 의아하다.

내가 저지르는 일상의 폭력을 돌아보며, 멈추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일상의 하나님 나라는 일상의 폭력을 깨닫고 멈추는 일에서 시작된다. 내가 '사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영혜처럼 누군가 “꿈을 꾸었어”라고 말하며, 냉장고에서 고기를 모두 치우는 일은 계속 우리 집과 이웃에 넘쳐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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