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와 가족 중심의 크리스마스가 되기까지
소비와 가족 중심의 크리스마스가 되기까지
  • 손태환
  • 승인 2016.12.09 0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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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벌금에서 평민 노동자 산타까지: 간략한 미국 크리스마스의 역사

어느덧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거리에는 캐럴이 울리고, 광고 간판과 쇼윈도우에는 선물 꾸러미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뉴욕의 거리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사용할 나무를 판매하는 이들도 종종 만납니다. 

그러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대체 언제부터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되었을까. 세계 모든 사람의 축제가 된 게 좋아 보일 때도 있지만, 이러한 문화(?)가 생긴 배경이 참 궁금합니다. 

본 글은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기에 무척 유익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어떠한 맥락과 배경에서 생겼는지 안다면 이를 두고 더 발전적인 고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뉴저지 세빛교회 손태환 목사가 페이스북 노트에 올린 글을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 편집자 주

크리스마스? 벌금!

현대적 크리스마스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습니다. 17세기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 절기를 즐기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범법자에게는 5실링의 벌금을 물렸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짐작하시다시피 그것이 이교도의 문화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좀 더 재밌는 속사정이 있습니다. 당시 이 시즌이 되면 사회적으로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이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거나 구걸을 하고 폭식이나 폭음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청교도들이나 상류계층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에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작농들이 부자들을 찾아가 선물(음식이나 술 또는 돈)을 요구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대한 답례로 그들은 (술 취한 상태에서) 노래를 불러주었죠. 말하자면,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사회적 역할의 역전 혹은 자리바꿈 현상(role inversion)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상류층 사람들과 부자들은 이런 크리스마스 절기가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크리스마스 절기를 없앨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해서 이 '꼰대'들이 생각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 중심의 크리스마스? 실패!

"1년에 한 번씩, 크리스마스는 큰 망치와도 같은 힘으로 삶의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강타한다. 갑자기 어디에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모든 교회가 설교와 노래와 상징으로 그분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모든 빨간 코 사슴을 타고 계시며, 양배추 인형 뒤마다 아래 숨어 계신다. 멀리 또는 가까이서, 그분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모든 잔 속에서 건배를 당하신다.” (브레넌 매닝)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 사이에서 오랜 싸움을 해 왔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교회는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애썼고, 거리와 백화점에서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예수와 별 상관없는 그들만의 축제를 즐겨왔지요. 저는 이 싸움의 역사를 미국의 식민지 시절 뉴잉글랜드에서부터 찾아보려 합니다. 

어제 살펴본 것처럼, 뉴잉글랜드에서는 크리스마스 절기를 지키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청교도들이 그 기간에 일어나는 사회적 하층민들의 '무질서'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역할의 역전 현상'은 하층 계급들을 ‘통제'하는 데 있어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한 청교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가난하고 단순한 피조물들은 미신적이고 성스럽지 못한 이 절기가 끝나면 미쳐 날뛴다." 

하지만 아무리 벌금을 매기며 통제를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이 싸움은 18세기 중반 회중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갑니다. 이들이 볼 때 크리스마스 축제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크리마스를 아예 경건하고 절제된 종교 형태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없애지 못할 바에야 새로운 형태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18세기 중후반의 유니버설리스트나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는 유니테리언들까지 동조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신학적 근거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크리스마스를 세속적 영역으로부터 성스러운 영역으로 ‘구원’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에 교회 문을 열면 사람들은 교회로 올 것이고 상인들은 문을 닫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일들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뉴잉글랜드 공동체의 세속화는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일어났으므로),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였습니다. 19세기에 이르렀을 때, 대부분의 교회는 크리스마스에 문을 닫았고 상점들은 여전히 대목을 누렸으며 거리에는 여전히 술 취한 이들이 돌아다녔습니다.

교회가 세속적 문화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길 때,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할로윈 축제에 대한 미국 한인 교회들의 접근 방식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위에서 살펴본 뉴잉글랜드의 크리스마스 축제 방식이 할로윈과 비슷한 거 눈치채셨나요? Trick-or-treat!)

결국, 크리스마스를 교회 중심적 홀리데이로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끝일까요? 아닙니다. 19세기 중반 뉴요커들이 이 ‘크리스마스 배틀’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집니다. 

뉴요커들의 크리스마스? '아, 옛날이여'

우리는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나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며 잠들던 어린 시절 교회는 안 다녀도 선물을 받으러 교회 갔던 기억, 성탄 이브에 교회에 모였다가 새벽송 돌고 밤새 '올나잇'하던 재미있는 추억들이 하나쯤 있을 겁니다. 

19세기 초 뉴욕에도 과거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당시 뉴욕은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고 계층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에는 종종 싸움이 일어났고 심지어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과 같은 풀타임 전문 경찰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뉴욕 거리가 어땠을지 짐작이 가지요? 술 취한 사람들과 구걸하는 이들도 가득했습니다. 이건 공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뉴욕의 부자들과 상류층 사람들은 이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실제 폭동으로 이어진다든지 해서 자신들의 위치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실 과거(17, 18세기)에는 비록 무질서해 보이는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를 흔들 만큼 중대한 이슈는 아니었죠.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에게 선물(음식, 술, 돈)을 요구하고 선물의 답례로 노래(drunken song)를 불러줄 때, 그것은 일시적이고 상징적인 역할 바꿈(role inversion)이었지 실제적인 계층의 자리바꿈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1년에 한 번 있는 그 풍습은 오히려 계층 구조를 확고히 하는 기능까지 해 주었지요. 

19세기 크리스마스는 상류계층이 골치거리로 여겼던 과거 크리스마스 문화가 그리워질 정도로 계층 갈등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19세기 초 뉴욕의 크리스마스는 전혀 달라 보였습니다. 부자들과 노동자 계층 간에는 심각한 갈등과 적개심이 존재했습니다. 음식을 받고 노래를 불러주는 "선의의 선물 교환"은 이제 훈훈하고 아련한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과거 뉴잉글랜드의 선조들에게 골칫거리였던 크리스마스 문화가 이들에게는 오히려 되돌리고 싶은 노스탤지어가 된 것입니다. 아, 옛날이여.

스티븐 니센바움(Stephen Nissenbaum)이라는 학자에 의하면, 과거 전통에 대한 향수를 가졌던 뉴욕의 귀족층들(Knickerbockers)이 새로운 형태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들에 의해서 과거 크리스마스 전통과 풍습을 소재로 한 소설(물론 사실과 다른 픽션)과 시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여기에 산타클로스의 원형인 성 니콜라스(St. Nicholas)도 등장하지요.

그들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축제의 장소를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즉 뉴욕의 거리에서 각 가정집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선물을 요구하고 받는 주체는 가난한 농민에서 어린아이로 대체됩니다. 아이들은 산타(혹은 부모)로부터 선물을 받고, '기쁨과 환호'로 답례합니다. 

뭔가 비슷한 구조가 보이시나요? 과거 크리스마스 시즌에 부자들과 농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선의의 선물 교환"이 새로운 옷을 입고 재탄생한 것입니다. 단, 계층 간 자리바꿈의 위험성이 집 안에서 '안전하게' 이루어진 것이죠. 

이것이 바로 미국인들의 "가족 중심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형성되는 첫 배경입니다. ‘왜 미국인들은 성탄절에 교회 안 가고 가족끼리 모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제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이 'family-centered Christmas"가 성공을 거두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산타 할아버지에 관해 살펴볼까요?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의 등장

식당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미국 아이들을 보며 '미국 애들은 저렇게 얌전하게 앉아서 식사하는데, 왜 한국 애들은 식당에서 돌아다닐까?' 하면서 궁금해하는 한국 부모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거 아십니까? 그들은 주로 유럽 아이들과 자신들의 아이들을 비교하지요. 

19세 미국의 상류층 사람들은 무례하고 천박해 보이는 미국의 가난한 하층민들에 비해 같은 하층민이라 하더라도 예의를 아는 독일인들을 보며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의 배경이 뭘까 궁금해했죠. 그들이 찾은 답은 '가정'이었습니다. 우리도 흔히 그러잖아요? 미국 애들은 가정 교육이 잘 돼서 저렇게 나와서도 잘하는 것이라고. 

아무튼, 미국의 엘리트들은 독일의 그 가정 분위기를 미국인들의 가정 안으로, 무엇보다 하층민들 가정으로 가져오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독일의 가정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중심으로 선물을 주고 받는 - 이미 당시 독일에서는 문화로 자리잡은 - 그 센티멘탈한 분위기에 그들은 매료되었습니다. 미국의 각 가정에 세워지게 되는 크리스마스트리는 이런 이들의 노력에 의해 소개되고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점차 대중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가정 중심의 크리스마스를 종교학적으로 볼 때, 크리스마스 트리는 그 종교 의례에서 하나의 중심 제단(alter)으로서 기능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크리스마스가 술과 싸움이 난무하던 뉴욕 거리로부터 각 가정으로 그 축제의 장을 옮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산타클로스입니다. 여기서 잠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요?

많은 사람이 코카콜라가 광고용으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요. 하지만 코카콜라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구도 좋아하지 않고 유명하지도 않는 캐릭터를 광고용으로 만들어내지는 않았겠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산타클로스는 그 이전에 이미 미국 안에서 익숙한 인물(?)이었고, 사용 가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배경을 살펴볼까요?

아시다시피 산타클로스의 원형은 성 니콜라스(St. Nicholas)이지요. 성 니콜라스를 아이들에게 선물 주는 캐릭터로 변형하여 소개한 인물은 John Pintard인데, 역시 뉴욕 거리에 가난한 노동자들이 증가하는 것을 위험요소로 보았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나중에 언급하게 될 텐데, 산타클로스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A Visit from St. Nicholas>의 저자 클레멘트 무어(Clement Clarke Moore)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첨부한 그림을 보면, 이 그림 속 성 니콜라스는 아직 친근한 할아버지라기보다는 실제 주교(bishop)에 가깝지요. 주교 가운을 입고 홀을 들고 있고 표정도 영 '산타 할아버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옆의 아이들을 보면, 여자아이는 선물을 받고 웃고 있는 데 반해 남자아이는 울고 있죠. 아마 매를 맞은 것 같습니다. 

이 그림 속에 성 니콜라스는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못된 아이에게는 벌을 줍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한 해 동안 아이들의 행실을 판단하는 일종의 심판 날이 되는 것이죠. 이쯤에서 노래가 생각나죠?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이 유명한 캐럴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한 심판자 이미지의 성 니콜라스가 어느 순간부터 주교 복을 벗고 껄렁껄렁한 표정으로 담뱃대를 문 평민으로 바뀝니다. 우리 산타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산타가 평민 노동자가 된 이유

자, 산타 할아버지 이야기를 좀 더 해 볼까요? 성 니콜라스에게서 근엄하고 심판자 이미지가 사라진 것은 클레멘트 무어가 지어 1823년 출간한 <A Visit from St. Nicholas> (혹은 <The Night Before Christmas>) 덕분입니다. 이 시는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너무 유명한 시입니다. 오늘날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와서 굴뚝 타고 내려와 선물 주는 산타 할아버지'를 보편화한 작품이지요.

무어는 이 시 속에서 성 니콜라스를 근엄한 주교가 아닌 친근하면서도 코믹한 모습의 할아버지로 재탄생시킵니다. 이 산타는 선물은 주지만 결코 벌을 주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성 니콜라스가 굴뚝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잠시 살펴 볼까요? (시를 싫어하거나 영어 울렁증이 있는 분들은 스킵해도 됩니다)

He was dress'd all in fur, from his head to his foot,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이 달린 옷을 입고

And his clothes were all tarnish'd with ashes and soot;
옷은 재와 매연으로 잔뜩 그을려 있었습니다.

A bundle of toys was flung on his back,
등 뒤에는 장난감 한 자루를 메고 있었는데

And he look'd like a peddler just opening his pack:
마치 자루를 열면서 물건을 파는 보따리장수 같았습니다.

His eyes — how they twinkled! His dimples: how merry,
눈은 얼마나 반짝이는지! 보조개는 얼마나 귀여운지!

His cheeks were like roses, his nose like a cherry;
볼은 장미처럼, 코는 체리처럼 빨갛고 귀여웠죠. 

(중략)

The stump of a pipe he held tight in his teeth,
이 사이에 파이프를 꽉 물고

And the smoke it encircled his head like a wreath.
화관 같은 연기를 머리 위쪽으로 내뿜었습니다. 

(중략)

He was chubby and plump, a right jolly old elf,
그는 통통하게 살이 찐, 쾌활한 늙은 요정이었습니다. 

And I laugh'd when I saw him in spite of myself;
나는 그를 보고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A wink of his eye and a twist of his head
나를 보고 윙크하며 머리 흔드는 것을 보며

Soon gave me to know I had nothing to dread.
나는 그에 대해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8년에 이 시가 단행본 형태로 나왔을 때 포함된 그림을 보면 이 산타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첨부한 그림(왼쪽)의 산타를 보시면, 시 내용과 매우 흡사하지요? 위에서 소개한 스티븐 니센바움이라는 학자는 무어가 성 니콜라스에게서 주교 옷을 벗기면서(defrocked) 심판자로서의 권위를 없앴을 뿐 아니라, 그의 사회적 계급을 강등(declassed) 시켰다고 평가합니다. (<The Battle for Christmas> 라는 책인데,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세요. 제가 쓰는 이 글도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림 속에 담뱃대(파이프)를 주목해 보세요.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이 담뱃대의 길이가 계층과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습니다. 부유한 상류계층은 긴 파이프를, 가난한 하층민 노동자들은 짧은 파이프를 사용한 것이죠. 결국, 무어가 짧은 담뱃대를 성 니콜라스를 물린 것은 그를 평민으로 묘사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무어는 동네 네덜란드 출신 수선공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어는 왜 산타를 평민 노동자 계층으로 묘사한 것일까요?

제가 앞에서 언급했는데, '크리스마스에 부자들을 방문하여 깽판 부리며 먹을 것을 요구했던 하층민 노동자들' 생각나시죠? 무어의 산타클로스는 바로 '크리스마스 방문객'이었던 이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산타는 절대 행패를 부리거나 위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착하고 유쾌한 서민층 할아버지인 것이죠. 선물 주는 주교의 역할은 남아있지만, 이미지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서민적인 산타클로스가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런 미화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가 대중화되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노동자들이 행하는 모든 술 취함, 구걸, 모든 종류의 행패와 같은 행동은 부적절한 크리스마스 풍습을 넘어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심지어 선물도 주는 평민 산타클로스를 강조할 때 나타나는 상대적 효과인 것이죠. 현대 크리스마스의 역사에는 이렇게 계층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는 것이 중요 포인트입니다.

소비하는 크리스마스의 완성.

자, 이로써 거리에서 즐기는 카니발리즘으로서의 크리스마스는 '비정상적'인 것이고, 아이들과 함께 즐기는 가족 중심의 크리스마스가 진짜 '정상적인 크리스마스'라는 인식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자리 잡게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산타가 선물을 가지고 가려면 그 선물을 어디서 구하죠? 구하긴요, 사야죠. 어디서? Macy's 백화점에서! 산타가 크리스마스 소비문화의 상징이 된 그 배경이 다음 주제입니다.

손태환 / 뉴저지 세빛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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