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실패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최태선
  • 승인 2016.12.10 02: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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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교회를 떠난 것이 오히려 은혜였다."는 말이 독자들에게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그분들도 공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대부분 본인의 의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 교회를 떠났습니다. 가능했다면 교회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습니다. 그래도 견뎌보려고 참고 노력했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회에 대한 분노와 함께 신앙에 실패했다는 좌절감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했던 은혜가 찾아옵니다. 그동안 모르거나 눈감아 왔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에 대해 회의가 들고, 지난날의 신앙이 너무 맹목적이었다는 자괴감이 들기까지 할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매우 정상적인 일들입니다. 믿음의 여정 자체가 떠남과 실패와 좌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9:12)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선 줄로 생각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대부분 그동안 자신이 정해놓은 범위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하고, 구역 모임에도 참여하고, 금식이나 구제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주차봉사나 주방설거지까지 했습니다. 교회를 위해 죽을 때까지 봉사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 기준에서는 선 줄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각자 스스로 정해놓은 신앙의 범위에서 벗어나라고 가나안 성도들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들어서서 믿음의 여정을 계속하라고 가나안 성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을 묵상하며 교회를 떠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아브라함의 여정을 함께 걸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부르심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창12:4)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하란에서 주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5장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그리고 이 사실은 느헤미야서(9:7)와 사도행전(7:2-4)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이처럼 하란에서의 부르심이 있기 전, 갈대아 우르에서 첫 번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란에서의 부르심은 두 번째 부르심입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

갈대아 우르에서의 첫 번째 부르심에 따라 아브라함 일행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갔습니다. 성서의 독자들은 하란에 머문 아브라함을 보고 그가 목적지를 향해 가지 않고 다른 곳에 머물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게 된 것에는 잘못된 점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독자들은 아브라함의 목적지가 가나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아브라함은 가나안이 목적지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 일행은 하란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 정착하였습니다.

1) 엄청난 대가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인류 최고의 문명으로 손꼽히는 수메르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수메르 문화입니다. 둘은 같은 문명을 가리킵니다. 최고의 문명답게 수메르 문명은 각종 최초의 기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시국가의 수립, 왕정제의 수립, 문자사용, 법전 제정, 학교교육, 바퀴 달린 전차의 사용, 맥주의 생산 등과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최초의 기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수메르 사람들은 뛰어난 건축술로 기원전 4100년 경 수도인 우르에 신전 탑을 세웠는데 4층으로 된 이 탑을 고대인들은 지구라트라 불렀습니다. 맨 꼭대기 층은 우르의 수호신인 달의 신 '난나'에게 왕과 제사장이 제물을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4만 여명의 사람들이 8미터 높이의 성벽을 두른 성 안에 벽돌집을 짓고 살았고, 20만 명의 농민들이 성 밖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관개시설을 통해 강물을 끌어들여 밀농사를 지었습니다. 물이 새지 않는 구운 벽들을 깔아 운하를 건설해 물을 끌어들였고, 그런 운하가 도시 곳곳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갈대아 우르의 정착민이었던 아브라함이 목적지도 모르는 채 떠돌이 유랑민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뉴욕 시민이 어느날 아프리카 난민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그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이며 공통적인 속성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나를 좇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는 것을 버리고 부르심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본 훼퍼 목사가 말한 값비싼 대가일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들어선다는 것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모두가 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고, 치러야 한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나와주면 좋아라 하는 기독교 문화 속에서 우쭐거리기만 했습니다. 모태 신앙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삼대째니, 사대째니 하며 가족의 믿음의 역사를 자랑만 할 줄 알았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가 성서가 말하는 교회가 될 수 없고, 신자들 역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돈과 권력을 거머쥔 목사들에 의해 부패와 타락이 만연하게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은 당신을 좇으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2) 문화

그러나 기꺼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떠난 믿음의 길은 처음부터 난관이었습니다.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문화였습니다. 목적지를 모르고 출발했기에 더욱 그랬을런지도 모르지만 아브라함 일행이 향한 곳은 하란이었습니다. 하란은 당시 갈대아 우르와 자매도시였고, 종교적으로도 같은 신인 달의 신 '난나'를 섬기고 있었으며, 이미 수많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두 도시 사이를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갈대아 우르는 경제적으로 쇠하고 있었는데 반해 하란은 여전히 경제 중심지의 하나로 굳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란은 나일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곳으로, 비옥한 삼각주가 형성된 곡창지대로 유명하였습니다. 하란은 터키어로 '얄튼 바삭'으로 불리는데 이는 '금빛 이삭'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름진 평야에서 황금빛 밀 이삭이 익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명칭입니다. 하란은 그만큼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데라와 아브라함은 풍요의 땅 하란에 머물며 순례의 여정을 멈추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하란이 바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풍요가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그곳 하란에 14년을 머물게 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풍요는 항상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은 성급하게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예단하고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서가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듯이 부는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먼저 무력화(無力化)해야 할 극복의 대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화는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방식을 기꺼이 바꾸겠다는 선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 혹은 물질이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곧 모든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성공과 부, 혹은 치유와 위로를 위해 주님이 필요하고 복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미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에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우리가 익숙한 세상 문화에서 탈피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라는 새로운 문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 적확히 말하면 돈이 주도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이 주도하는 삶을 살겠다는 공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상 교회에 나오는 것이 믿음의 전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곧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의 삶과 삶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좇아 새로운 삶,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는 따라야 할 모범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브라함을 비롯하여 예수님이라는 모범과 그분을 따랐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명한 사실이 실제로는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이신칭의', '사후천국'과 같은 교리와 십일조와 주일성수, 금주, 금연과 같은 스스로 정해놓은 몇 지 준수사항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평가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고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자체가 하란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성도들이 떠난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란임을 깨달을 때 새로운 믿음의 여정이 시작될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르심

하나님의 첫 번째 시험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고 고향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믿음의 여정에 들어섰지만 하란에 머묾으로써 바로 이 첫 번째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실패한 아브라함을 하란에 머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두 번째 부르심입니다. .

성서를 살펴보면 첫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 인물이 아브라함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나도 베드로도 첫 번째 부르심에서 실패했습니다. 요나에게도 두 번째 주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욘3:1) 주님은 시몬이라는 베드로의 옛 이름을 부르며 베드로를 다시 불러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이런 사실들은 단순히 두 번째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은 세 번째, 네 번째 부르심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을 계속해서 불러주십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버려진 자식들이 아니고 고아들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사49:15)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믿음의 여정이 실패를 통해 배우는 학교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에서 아브라함은 열 번을 실패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그가 그토록 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면 평범한 우리들이야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우리는 실패를 통해 배울 것입니다. 떠남과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믿음의 여정을 계속한다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듯이 우리도 온전한 믿음의 후예들이 될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 여러분의 실패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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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진 2016-12-10 11:46:30
성경을 보는 눈을 좀 더 넓혀야 겠네요.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