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탄생 눈 내리는 겨울밤은 아니었다.
예수 탄생 눈 내리는 겨울밤은 아니었다.
  • 김동문
  • 승인 2016.12.11 0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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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이야기, 동화가 아닌 역사로 다시 읽기

우리의 성탄 이야기, 동화가 아닌 역사로 다시 읽기 성격적으로 우리의 성탄 이야기는 얼마나 성경적인가?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기 보다 오래 묵은 동화 같은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에수 탄생의 신학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탄 이야기(또는 내러티브)가 성경이 아닌 오류 가득한 익숙한 주장들이 반복되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성탄의 계절에, 성경이 말하는 성탄 이야기, 예수 시대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성탄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몇 번에 걸쳐서 예수 탄생 이야기 천천히 읽기를 이어간다.

'첫 번째 장면 : 나귀타고 움직이는 마리아?'

돈 없이 여행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고 먹는 일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니 제대로 잘 수도 먹고픈 것을 먹을 수도 없을 것이다. 성탄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요셉은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 여행이라는 단어가 낭만적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어떻게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갔을까?

예수 탄생 장면에, 마리아와 요셉이 나귀를 타고 이동하는 이런 장면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익숙하다. 예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많은, 아니 거의 모든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오류라고 한다면,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나귀의 존재에 얽힌 이야기부터 풀어보자. 나귀는 예수 시대에 2-30년 전 한국에서 자동차 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제3세계 농촌마을에서 자동차 같은 존재였다. 목축하는 이들에게 양떼 앞서서 길을 이끄는 길잡이로서,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수단으로서, 먼 길을 가는 유력자의 이동 수단으로서 나귀는 요긴했다. 나귀는 부와 권력의 판단 기준이 되기도 했다. 하얀 나귀는 권력자의 상징이었다.

나귀를 탄 마리아, 나귀를 끌고 가는 요셉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요셉과 마리이가 가난해서, 집에 나귀가 한 마리밖에 없어서, 임신한 마리아만 나귀를 태운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억측이다. 가난한 이들은 이동할 때도, 아무리 임신한 여인이라도 가난한 경우는 걸어서 가야만 했다. 부잣집의 나귀를 몰아주는 나귀몰이꾼(오늘날의 운전기사나 조신시대의 가마꾼이나 마부를 연상시킨다.)도 있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얼마나 가난했는지는 아래와 같은 언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눅 2:24)

사내아이를 출산하고 40일이 지나면 정결의식을 치루기 위해 제물을 바쳐야 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바칠 수 있는 제물이 바로 비둘기였다. 마리아와 요셉은, 집비둘기를 바칠 수밖에 없는 빈민이었다. 이 빈민 가정에 나귀가 있다는 것은 고려할 수 없다. 먼 길을 가는 임신한 마리아와 요셉에게 부자 친척이 나귀를 빌려줄 수 있지 않았겠냐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자연스럽지 않다. 그냥 마리아와 요셉이 가난한 형편으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오가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있는 것일까?

눈에 덮힌 예루살렘 성전산 그 너머로 감람산이 펼쳐진다. 하룻밤에 수십센티미터씩 눈이 쏟아지던 그곳에서의 겨울을 떠올려 본다.

'두 번째 장면. 겨울에 태어난 예수?'

많은 이들은 성탄절 하면 눈 내리는 겨울밤을 기대하곤 한다. 예수가 겨울에 태어났다고 의심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성탄절이 예수 탄생일이 아니라, 예수 탄생 기념일이라는 것을 말하는 이들도, 예수 탄생의 계절 배경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 2:8)

그 오래전,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려주었다. 이 본문 안에 쉼표(,)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부분들을 표시해 본다.

“그 (베들레헴)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이 짧은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의 눈앞에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가? 목자들과 양떼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는 어떤 냄새가 어우러지고 있나?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체감온도는 얼마로 느껴지는가? 추위? 더위? 쌀쌀함? 목자들의 얼굴 표정과 생김새, 옷차림은 어떠한가?

이 사건이 벌어진 때는 낮인지, 밤인지, 저녁인지, 아침인지? 겨울인지, 봄인지? 가을인지? 어떤 환경이었는지?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이 한 겨울에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 겨울에는 벌어질 수 없는 풍경이 이 본문 안에 가득 차있다. 성경의 땅의 겨울 풍경을 만나보자.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성경 표현을 기억하는가? 이른 비는 늦가을에 내리는 비로, 우리 절기에 따르면 입동 무렵이다. 늦은 비는 늦겨울에 내리는 비로, 입춘쯤이다. 입동에서 입춘까지의 기간, 그때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겨울철이다. 그 시기에 성경의 땅에, 눈도 비도 내린다. 특별히 레바논 남부, 우리에게 익숙한 헬몬산 지역은 물론 북쪽 백향목 산지의 겨울은 매서운 북서풍과 곳곳이 많은 눈으로 덮인다. 하룻밤에 50 센티미터 이상이 쌓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눈 내리는 성경의 땅의 겨울, 물론 성경의 무대인 오늘날의 중동 지역 모두가 눈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조금 더 지금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겨울철의 어느 날 풍경이다. 갈릴리 호수 북쪽의 바산골란지방(오늘날의 골란고원)과 헬몬산으로 이어지는 지역은 눈이 내린다. 해발고도가 해저 200~400미터가 되는, 갈릴리호수에서 사해로 내려오는 요단계곡 지역은 비가 내린다. 사해에 오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사해를 따라 홍해로 이어지는 아라바 광야는 따스함 또는 여름철의 더위를 느낀다. 사막이 펼쳐지는 남방(네게브) 지역은 강한 바람이 따스한 햇살과 어우러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곳에 따라 펼쳐진다.

목자들은 양떼를 먹이기 위하여 떠돌아 다녔다. 그런데 겨울철과 다른 계절에 그 목축 풍경은 큰 차이가 났다. 겨울이 되면 들에게, 밤에 양떼를 풀어놓을 수 없었다. 겨울이 되면 갈릴리 호수 남쪽부터 홍해까지 이어지는 요단 계곡으로 내려오거나 낮에는 들에서 꼴을 뜯기고, 밤에는 우리에 들였다. 추운 겨울에 폭설과 엄습하는 추위로부터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본문은,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밤에 들에 양떼를 풀어놓는 것은 겨울철에 일어나는 풍경이 아니다. 또한 해발고도 6~800미터 정도 되는 베들레헴 산지와 들녘에서 겨울밤에 펼쳐지는 풍경도 아니다. 성경은 ‘베들레헴 지역의 들’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말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겨울철에 벌어진 사건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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