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는 복음주의 4인방의 열매
이랜드는 복음주의 4인방의 열매
  • 최태선
  • 승인 2016.12.27 0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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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기독교 기업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분들의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와 정확한 금액까지 보도내용에 밝혀져 있습니다. 그 기업의 매출액에 비하면 그야말로 껌값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그 기업의 경영철학과는 정확히 대치되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여 불매운동에 나서자는 댓글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불매운동에 나설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

그 기업의 회장은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하는 목사님들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기업은 처음부터 이분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분들이 그 기업 회장의 멘토였습니다. 4인방 목사님들이 한국교회에 큰 변화를 이끌었듯이 그 기업 역시 기독교 기업 문화를 선도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그다지 좋지 않은 열매가 드러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큰 틀에서는 바람직한 면이 적지 않습니다.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 이동원 목사(좌로부터)

기독교적 가치관에 따라 기업을 운영하겠다는 시도는 신선한 것이었고, 수많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 기업은 연매출 십조 원을 올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초기의 이 기업의 회장의 정직과 뇌물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신앙을 일상생활, 혹은 실생활과 접목시켰다는 점도 사실 대단한 변화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기업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 기업과 같은 기업을 꿈꾸는 것도 일종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 기업의 역사는 지금도 이 기업의 경영철학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운영되는 이 기업에서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잔인한 일들이 행해지게 되었을까요?

여러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기업 역시 복음주의 4인방들이 가지고 있던 복음 이해에 따라 성장지상주의를 택했다는 사실입니다. 4인방 목사님들의 성과는 이분들이 이룬 대형교회와 함께 전도폭발 운동과 코스타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과에 담겨 있는 신학의 주된 특징은 번영주의, 고지론, 엘리트주의 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우 현실적이며 효율적인 방식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신학은 간단히 그 특징적인 방향을 말할 수 있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들의 신학입니다.

사실 이 기업의 회장은 4인방 목사님들의 또 다른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 기업 회장에게서 똑같은 신학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에 따라 이 기업은 경쟁을 기조로 효율과 업적을 냉정하게 따지는 기업문화를 일구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경영원리이지만 성서가 말하는 가치관과는 동떨어진 가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기체와 조직

진부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유기체와 조직의 차이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장지상주의에 빠지면 교회는 반드시 조직으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교회가 그럴진대 기업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결국 그렇게 조직이 되어버린 교회나 기업은 생명과 사랑이 아니라 돈과 경쟁이 주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기체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체는 언제나 가장 약한 부분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게 됩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약하거나 고장 나면 몸 전체가 약해지고 불편해진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고, 약한 부분을 먼저 신경 써서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몸 전체가 건강해질 수 있고, 본연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입니다. 경쟁을 통해 조직은 끊임없이 자신을 확대재생산해야 합니다. 경쟁에 뒤쳐지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부분은 제거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해야 합니다.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 일부가 잘라져 나가는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잘라져 나가도 고통을 느낄 수 없습니다. 희생되는 것은 다만 잘라져 나가는 것들뿐입니다. 따라서 그런 희생이 많아질수록 조직은 효율적이 되고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관건이 되는 것은 교회나 그리스도인이 하는 기업이 유기체를 지향하느냐 조직을 지향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대형교회는 유기체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결코 없습니다.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유기체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목장이니 셀이니 가정교회니 하는 방식은 대형교회의 틀 안에서 성서적인 공동체의 방식을 살리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생명이 있는 유기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건 기업이건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유기체를 지향한다면 그곳은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들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지만, 그 마음은 자신의 희생에 아파하는 마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아픔을 온전히 품고 해결치 못하는 인간의 한계가 가지는 안타까움이 주님께 전달되는 방편입니다.

작은 자들의 나라

한 마디로 신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더 큰 일을 하겠다는 의욕이 또 다른 종교적 욕망이 되고 만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고자 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실패가 더더욱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로 빗나가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러한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서 자신을 조율하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비워 무력한 자가 되어야 하는데 일단 큰 자가 되고나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라는 생각으로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고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하게 되고, 욕망이 되어버린 종교적 열망에 따라 점점 더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짐은 물론 자기의에 도취되어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랜드 계열의 패밀리 레스토랑 '애슐리'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아주 미묘한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가 시간이 지난 후에는 완전히 다른 결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희생하려 했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남을 희생시키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헌신한 결과가 자신의 영광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큰일을 하기 원하고,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자신의 일이 큰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큰 자가 되려는 자신의 욕망을 낱낱이 파악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숨은 동기까지도 발견해 제거해야 합니다. 실낙원 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낮아짐과 비움의 상징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비우고 작아져서 마침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때까지 경성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환란을 자랑했고, 사도 바울은 '부득불 자랑해야 한다면'리하는 조건을 달아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이 작은 자가 되는 길이라는 걸 명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은 자가 될 때 비로소 섬기는 자가 되고, 섬기는 자는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는 존재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일에 일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원의 품꾼들의 비유와 하나님 나라

제가 설교를 할 때 듣는 분들의 저항이 가장 심했던 본문은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입니다.(마20:1-16) 새벽 여섯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과 오후 다섯 시에 들어와 한 시간을 일한 사람들의 품삯이 똑같이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오후 다섯 시까지 일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성서는 빈둥거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절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빈둥거린다고 빈정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도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루저'들입니다. 경쟁에 패한 사람들입니다. 애초부터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오후 다섯 시에 불러주어 일하게 한 것은 그들이 사람임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루치 품삯을 지급한 것은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우리는 품삯이라는 돈에 현혹되어 포도원 주인이 한 이 위대한 일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존엄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들도 남들과 똑같이 살 수 있도록 하루치 품삯을 지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포도원 주인에게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교회, 어떤 기업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직 유일한 한 가지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경쟁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효율과 업적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 사람들이 어우러져 더불어 함께 사는 곳,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복음주의 4인방도, 언급한 기업의 회장도 모두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분들입니다. 이분들에게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분들이 지향했던 방향입니다. 본인들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분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달리 큰 자가 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들의 나라입니다. 작은 자들만이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상호복종하며 서로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만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찬양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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